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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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겉옷을 걸친 흑발의 여인이 연모하는 남성의 가택에 도착했다.
이성휘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출발하기 전,
미리 시녀가 기별을 알려 준 덕분이었다.
“그때처럼… 함께 걷지 않겠나?”
흑발의 여인이 제안 했다.
함께 밤거리를 거닐었을 때처럼,
정체를 숨긴 채 시가지를 암행(暗行)하지 않겠냐는 제안 해왔다.
그에 이성휘는 도포 아래에 의천검과 청강검을 숨기고서 흑발의 여인과 동행하게 되었다.
허저와 호위병들을 둔 채로 찾아온 그녀의 행동에 이성휘는 주의를 주려 했으나, 은밀하게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은 모습에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이성휘는 불쑥 찾아온 조조와 함께 암행을 나섰다.
위험을 동반한 행위였지만,
그녀의 뜻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검은색 너울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아름다운 미모가 구름 속에 비치는 달빛처럼 흘러나오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별이 유독 아름답게 뜬 밤일세. 별빛들이 찬연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한 번 걷고 싶었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조조가 고개를 치켜들면서 밤하늘에 가득 흩뿌려진 별을 응시했다.
아름다운 한색(寒色)의 별들이,
지상을 조명처럼 은은하게 비춰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주변 불빛들이 밝아 밤하늘의 별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조조가 불평하듯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그 말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어두운 장소로 가면 별들이 잘 보일 겁니다.”
게다가 그녀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이성휘는 불야성처럼 시끄러운 활기를 내뿜고 있는 시가지에서 잠시 떨어지기로 했다.
발걸음을 계속 움직였다.
혹시 모를 급습을 감시하면서,
흑발의 여인과 함께 적막과 고요가 감도는 한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발걸음을 계속 걸어 도착한 곳은 산책길처럼 아름답게 포장된 어느 한적한 장소였다.
“고맙네, 덕분에 밤하늘에 뜬 아름다운 별들이 잘 보이는군.”
흑발의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색 너울을 위로 걷었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다.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올 뿐이다.
암행을 시작한 이후부터 경직된 모습을 보이던 이성휘가 얼굴을 붉혔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두 눈을 빛내는 조조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귀관에게는 매번 미안 할 뿐이네.”
아름답게 뜬 별을 따라 뚜벅뚜벅 걷던 흑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슬픔을 담아낸 두 눈으로 옆에서 나란히 걷던 사내를 응시했다.
꾹꾹 억눌러 온 감정들을 일 거에 해방하듯 청려하게 빛나던 얼굴에 짙은 수심을 새기면서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귀관은 항상 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데… 나는 매번 그대에게 심려와 폐해를 끼칠 뿐이네. 이렇게 후안무치한 여자가 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달처럼 시린 눈물이 새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픔과 죄책감이,
달빛을 담아낸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흑발의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연모하는 남성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니,
결코 용서를 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기 무능과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죄책감을 힐난하고 자괴감에 가까웠다.
“목숨을 다해 주군을 보필하는 것이 바로 제 역할입니다.”
이성휘의 대답에 흑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귀관의 헌신과 희생을 받기 충분한 군주인가? 잘 모르겠네. 마치 바보천치가 되어 버린 것 같단 말일세. 감정에 휘둘려 행동할 뿐인 내가… 주군이라는 이유만으로 귀관의 헌신과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도 되는지….”
격노와 증오에 휩싸여 지금까지 이룩해온 모든 대업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했다.
참모들의 만류를 무시했으며,
살육을 반대하는 사촌을 내치려 했다.
목숨을 내던지고 생명을 불사르며 쌓아온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려 했다는 사실에 조조는 자신을 향해 강한 경멸감을 내비쳤다.
“단언컨대 저는 단 한 번도 주군을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맹세했던 마음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성휘가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조조에게 결연한 마음을 전달했다.
일말의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를 느꼈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 진심 어린 고백에 흑발의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아 냈다. 얼굴을 폭 가린 두 손 사이로 맑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흐끅흐끅 울음소리를 흘리면서 어깨를 떠는 그녀의 모습을 이성휘는 아무 말없이 지켜보았다.
“나, 난… 귀관의,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네…! 그런데도 나를… 그런데도 나를…. 못 나기 짝이 없는… 나를… 연모하는가…?”
흑발의 여인이 처연하게 통곡하며 물었다.
그 물음에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만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손을 들었다.
얼굴을 폭 가린 그녀의 손을 내리며,
눈물범벅된 새하얀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오열을 쏟아 낸 그녀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홍옥처럼 청려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이성휘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자기 흔적을 새기고 싶다는 욕망을 떠올렸다.
“고, 고맙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흑발의 여인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입을 열었다.
끝까지 따르겠노라는 그의 고백에,
조조는 사랑과 연모의 감정에 들뜬 표정을 지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두 눈으로 이성휘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도 이성휘와 마찬가지로 연모하는 상대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하고 있었는지 입술을 계속 달싹이면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목숨을 바쳐 내 아버지를… 그리고 친척들을 구해주어 고맙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멸하려 했던 나에게 손을 뻗어 주어 정말 고맙네….”
지금까지 수없이 헌신하고 희생해온 부관의 노력들을 허사로 만들려 했던 죄책감.
자멸하려 했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손을 뻗어 주었던 부관을 향한 사랑.
조조는 자괴감의 심정과 함께 애절하게 녹여낸 연모의 감정을 담아 고마움을 표시했다.
“몇 번이든 손을 뻗을 겁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겁니다. 저는 아만을…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으니까요.”
강렬한 눈빛과 함께 연주성의 불야성 거리를 내려다 보면서 고백했던 것처럼 진심 어린 말을 전달했다.
일말의 가식도,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재차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 것일까.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얼굴을 붉히던 흑발의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 나도… 부관을… 아니, 성휘를 진심으로 사랑해.”
날카롭게 뻗은 칼끝처럼 올곧은 고백은 마침내 그녀의 마지막 남은 마음의 벽마저 허물었다.
“나와 함께 해 줘서 고마워…!”
조조가 방긋 웃었다.
슬며시 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연모하는 남성의 메마른 입술에 자기 온기를 덮었다.
입술의 건조한 감촉과 함께 조조는 온몸으로 자기 마음을 전했다.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면서 대담하게 그의 입안을 훑었다.
“흐응!”
입맞춤을 나누던 이성휘가 돌연 자기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신음을 냈다.
호흡이 턱 막히면서,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요동쳤다.
분명 성휘와는 한 번 입맞춤을 했던 경험이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와의 입맞춤은 첫 경험처럼 짜릿하고 몽환적이었다.
“좋아해.”
흑발의 여인이 쑥스러움을 담아 속삭였다.
속삭임에 자극을 받았는지,
이성휘는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면서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타액을 빨았다.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입맞춤이었다. 지금까지 간직해온 애절한 마음을 해방하듯 거침이 없었다.
“흐응… 후으읏…!”
입맞춤이 이어질 수록,
더욱 농밀하게 변할 수록 조조의 신음 소리에 달콤한 교태가 서렸다.
위태롭게 뜬 발꿈치가 당장에라도 균형을 잃을 것처럼 흔들렸다.
거침없는 입맞춤에 온몸의 힘이 빠지는 듯했다.
그런 조조의 상태를 알아챈 걸까.
부드러운 입술을 한껏 유린하던 이성휘는 두 팔을 천천히 올리면서 그녀의 늘씬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흣!”
자기 몸을 지배하려는 듯한,
자기 마음을 완전히 정복하려는 것처럼 난폭하게 품에 안는 이성휘의 행동을 조조는 굴복한 듯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 * *
짧으면서도 길었던,
서로의 애절한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가 끝난 뒤.
조조와 이성휘는 갈대밭을 불태우는 들불처럼 뜨거웠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진화된 것처럼 금세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몸과 마음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다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망실이고 있었다.
이대로 끝까지 가 버릴까?
주변인들을 매번 답답하게 만들었던 두 남녀는 과감한 추진력을 보여줬던 모습들이 무색할 정도로 뻣뻣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택까지 호위해드리겠습니다.”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열기와 흥분 탓에 얼굴이 붉어졌던 이성휘가 조조에게 입을 열었다.
그에 조조는 몹시 부끄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수줍게 끄덕이면서 대답을 대신했다.
“…….”
“…….”
함께 길을 걷는 동안,
조조와 이성휘는 그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답답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일 뿐이었다.
‘무, 무슨 말이라도… 무슨 말이라도 성휘에게 해야 하는데…!’
흑발의 여인은 애타는 눈빛으로 이성휘를 바라보았지만, 호위에 전력을 다하는 이성휘에게는 닿지 않았다.
이대로 오늘 밤이 끝나는 것일까.
조조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우둔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신을 향해 한탄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을 계속 재촉했을 뿐, 우물쭈물 씹으면서 애달픔을 머금었던 입술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조조와 이성휘는 계속 걸음을 이어나간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택 앞.
지목한 목적지였다.
하지만 조조는 목적지인 가택에 도착했음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도착한 듯하여 오히려 불만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조를 보필하기 위해 시녀들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본 이성휘가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그에,
흑발의 여인은 망설임 가득한목소리로 사내를 향해 대담한 제안을 건넸다.
“서, 성휘… 괜찮다면… 그….”
머뭇머뭇대던 조조가 말을 이었다.
“내실에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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