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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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휘는 패국조씨 가문의 부자와 함께 사냥과 낚시를 다니면서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그간 성과가 있었음을 보여주듯,
조숭과 매우 막역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함께 후원을 산책하거나 만찬을 즐기는 등, 부자 관계가 된 것처럼 끈끈한 친밀감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난감해하는 모습을 더러 보여주었지만 이제는 이성휘도 완전히 마음을 연 듯했다.
“덥지 않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비가 올 때 입는 도롱이처럼 호랑이 가죽을 눌러쓰고 다니는 조숭에게 물었다.
그에 조숭은 껄껄 웃으며 답했다.
산군이라 불리던 대호의 피혁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조숭은 어찌 범선생을 홀대할 수 있겠냐며 지극정성으로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에 이성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그만 돌아가 보겠네.”
“살펴 가십시오.”
예비 장인어른을 가택까지 안전하게 호위한 이성휘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년남성의 뒷모습을 본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마치 새 가족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허 웃으면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조숭과 동생처럼 싹싹하게 구는 조덕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가족이 생긴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가족이라….
참 정겨운 단어였다.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감정이 떠오른 것처럼 심중에서 격정이 흘러넘쳤다.
‘정해진 섭리와 이치를 바꾼 덕분에 조숭과 패국조씨 일가를 구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대학살까지 막아 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변사체로 발견됐어야 할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 있다.
이성휘는 조숭과 조덕 부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순리를 바꿨음을 깨달았다.
사실상 가장 위험한 절정선을 지났다고 볼 수 있었다. 조조가 천하통일의 대업에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서주 대학살’이 아니었는가.
서주 대학살을 막은 이상,
조조의 천하통일의 대업을 방해할 변수는 이제 원소 밖에 없을 것이었다.
“명공, 다녀오셨사옵니까.”
가택으로 돌아오자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경국지색의 미녀가 화사한 미소로 맞이해주었다.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처럼,
이성휘가 일과를 모두 끝내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지 줄곧 대문 앞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산길을 뽈뽈 누비고 다니는 작은 다람쥐처럼 앙증맞은 귀여움을 자랑하는 초선의 모습에 이성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화답했다.
“슬슬 날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내실에서 기다리십시오.”
“명공께서 추위를 무릅쓰고 바깥일하고 계시온데 어찌 소녀가 구들장에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초선은 귀엽고 상냥한 면모들을 자주 보여주었지만 뜻밖에 고집이 센 성격이기도 했다.
외골수인 양부를 닮았는지,
상대가 부담을 느낄 정도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코 초선의 고집을 꺾을 순 없겠다고 판단한 이성휘는 추위에 차가워졌을 초선의 두 손을 감싸주면서 따스한 온기를 나눠 주었다.
“우으으…! 부, 부끄럽사옵니다…!”
자기 두 손을 상냥하게 감싸주는 이성휘의 행동에 초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추위를 두른 손을 감싸는 온기에,
그만 마음마저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성휘와 초선은 갓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성휘가 슬며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깍지를 끼자, 초선은 수줍었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진류군에 들르게 되면 사도 어르신을 뵈려고 합니다.”
“아버지를 말이옵니까?”
이성휘는 예주 전선으로 내려갈 때 진류군으로 다시 복귀할 유협과 초선을 호위할 생각이었다.
근래에 들어 소식이 뜸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성휘는 진류군에 있는 사도 왕윤에게 잠시 안부를 전하려 했다.
‘조숭과 패국조씨 일가가 피습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처럼 왕윤과 태원왕씨 일가 또한 낙양의 참화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 정해진 결과를 바꾼 미래 때문에 새로운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그쪽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겠지.’
왕윤의 태원왕씨 가문은 황실과 조정을 향한 강직한 충성심과 절개를 겸비한 집단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훗날 황실과 조정의 권위와 위세에 도전하려는 조조와 대립하게 될 터.
이성휘는 벌써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 * *
조조는 군사 진궁과 부군사 순욱, 새로 임관한 곽가와 예주 전선에서 올라온 순유와 가후까지 모두 집무실로 소집했다.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군사행동을 잠정 중단한 뒤,
세력 강화와 내정 확대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였지만 난세의 흐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돌변하고 있었으므로 면밀히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서주의 도겸과 형주의 원술을 연이어 격파했습니다만 아군은 여전히 사방으로 포위된 형국입니다. 세작들이 보내온 첩보에 따르면 원술이 흑산적과 남흉노까지 끌어들여 연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부군사 순욱의 말에 팔짱을 낀 채 경청하던 흑발의 여인인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포기를 할 줄 모르는 놈이로군. 부관에게 양성에서 대패를 당했음에도 여전히 연주를 노리고 있단 말인가.”
원술은 대의와 대업을 도모할 그릇도, 능력도 없는 한낱 소인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원술군이 주변 군벌들과 모두 연합하여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한다면 조조군으로선 매우 골치가 아픈 상황이 펼쳐지게 될 것이었다.
어떻게든 요격해야 한다.
그를 우려한 조조는 원술군을 주축으로 한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그것을 분쇄하려 했다.
“흑산적의 맹주와 남흉노의 선우가 원술과 손을 잡는다면 사방에서 공격해 올 터. 전선이 길게 늘어진다면 아군은 금방 열세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팽성 전투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한 도겸군 또한 머리를 치켜들 테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쳐다보던 조조는 우려를 내비쳤다.
원술은 천하의 얼간이였지만,
그 휘하에 있는 참모들은 나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수재였다.
당장 5만 대군을 이끌고 원술군의 거점인 형주 남양군을 쓸어 버리고 싶었으나, 아군은 서주 정벌을 종결한 직후였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명부, 연주 바깥의 문제들도 시급하지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 또한 시급합니다.”
군사 진궁이 입을 열었다.
외우(外憂)를 대비해야 마땅하지만
먼저 내환(內患)부터 다스려야 할 때였다.
“동평국 문제입니다.”
그녀는 현재 원소군이 점령하는 동평국(東平國)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은 기주와 인접하는 국경으로,
흑산적을 토벌하고자 황하 이남으로 내려왔던 원소군이 그대로 차지하는 땅이었다.
엄연히 동평국은 연주에 속한 땅이건만 계속 원소군이 차지하는 것을 두고 연주의 사대부와 호족들 사이에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다.
“일부 사대부와 호족들은 원소를 따르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명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 말입니다.”
연주의 원로인 변양과 그 일파들이 바로 조조의 통치에 반대하는 무리였다.
한나라 황실과 조정을 동원하여 번왕처럼 군림하려는 조조의 강압적인 통치에 노골적으로 반골 성향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조조가 연주에 입성했을 때부터 계속하여 통치에 반대해 왔다.
“어떻게 처결했으면 좋겠나, 군사?”
조조가 진궁에게 물었다.
그에 진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양은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로부터 존경과 경의를 받는 학자입니다. 우선 명부께서 온 건책으로 그들을 달래셔야 합니다.”
“하지만 변양과 그 무리들은 줄곧 온 건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만을 외치지 않았는가? 군사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만, 그저 계속 어르고 달랜다면 저들에게 우습게 보일 것일세.”
유화책에만 매달리는 것은 스스로 통치와 정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통치에 필요한 것은 힘과 권력,
반대와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위압과 공포였다.
몇 번이고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도 건넨 기회들을 모두 뿌리치고 저항을 이어 나간다는 것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군사좨주.”
“예, 어르신.”
조조의 부름에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주황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한 걸음 나섰다.
“변양과 그 무리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게. 동평국을 방비하는 순우경과 내통하여 연주를 팔아넘길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원소군이 순우경을 동원하여 동평국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중원으로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로 쓰기 위함일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하며,
날카로운 눈썰미로 미래를 예견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훗날 천하의 패권을 걸고 자웅을 겨루게 될 적수를 경계하는 조조는 어떻게든 원소군의 군기가 꽂힌 동평국을 탈환하려 했다.
“아군은 원소군과 동맹 관계를 이루고 있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니… 본초가 제 스스로 내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겠지.”
잘 익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툭툭 건드린 흑발의 여인이 지도를 쳐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하북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원소군이 기주 지역의 패권을 걸고 공손찬군과 격렬한 접전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명 지금도 세력권을 두고 다툼을 이어 나가고 있을 터.
“흐음….”
잠시 침음을 흘린 조조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면서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천신만고 끝에 중원의 패권을 거머쥐었으나 여전히 세력을 위협하는 적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력권이 점점 늘어날수록 부담해야 하는 전선들이 넓어지고 있었기에 조조는 매일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참모들과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밤이 늦었다. 모두 퇴청하도록.”
참모들과 함께 한참 동안 열띤 토론을 펼치던 조조는 어느덧 시간이 해시(亥時)를 넘게 되자 퇴청을 명령했다.
당장 결정해야 할 사안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조조는 퇴청을 명령함으로서 참모들의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주군의 배려에 감복한 참모들은 예를 갖추면서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홀로 집무실에 남게 된 조조는 아슬아슬하게 타오르는 등불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성휘가 떠올랐는지 집무실 바깥에서 부름을 기다리던 시녀를 호출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채비를 부탁한다.”
“알겠사옵니다.”
해시.
늦었다면 늦은 시각이고,
이르다면 이른 시각이기도 하다.
등불을 바라보던 흑발의 여인은 오늘 하루도 자기 아버지 때문에 바쁜 일과를 보냈을 부관을 위로하기 위해 발걸음을 행차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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