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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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정벌에서 큰 성공을 거둔 조조 군은 중원을 호령하는 패자로서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4만의 병력과 3만의 군세가 격돌했던 팽성 전투가 조조 군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세력들은 마른 갈대밭을 불태우는 들불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조조 군에 더욱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손견과 함께 반란 정벌에 앞장섰던 장수인 도겸이 설마 그리 무력하게 대패를 당할 줄은 몰랐기에 놀라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주군께서 격노를 거두시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부드러운 상아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여인이 미소를 살포시 지으면서 말했다.
모두 이성휘가 나서준 덕분이다.
부군사 순욱은 그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같은 주군을 섬기는 막료로서 그에게 진심 어린 경외를 느끼게 되었다. 옥쇄의 각오를 한 충신처럼 주군을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그는 존경해 마땅한 사람이었다.
“만약 중원제일 검이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명부의 대업은 꿈속의 꿈이 되어 버렸을지도 몰라. 우리 참모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중원제일 검이 해준 거야.”
머리카락을 진한 금발로 물들인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순욱과 마찬가지로 군사 진궁 또한 이성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대업의 붕괴를 막아주었다.
만약 명부를 막지 못한 채 학살이 벌어지게 되었다면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대업과 야망은 파도에 쓸려 나가는 모래성처럼 사르륵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도중에 멈추게 돼서 정말 다행스럽지. 팽성 전투에서 도겸군 놈들을 무찌른 것만으로도 충분해.”
순욱과 진궁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과격하고 호전적인 성정의 그녀라면 당연히 전투의 지속을 외쳐야 마땅하겠지만, 사촌이 자칫 절대로 넘지 말아야 선을 넘을 뻔한 경우였으므로 전투를 조기에 종결하여 다행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이렇게 마무리돼서 정말 다행이야.”
하후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이 무사했다.
조조와 이성휘도.
숙부와 패국조씨 가문의 일가친척들까지도.
이성휘가 옥쇄하듯 몸을 내던지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결과였다.
그가 나선 덕분에 숙부와 패국조씨 가문의 일가친척들은 흉수의 피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서주의 산과 들을 모두 피와 시체로 물들이겠노라고 선언했던 조조의 광기를 무사히 잠재울 수 있었다.
‘참 대단한 녀석이야. 일신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하다니…. 전쟁터에서 적들을 죽이기만 할 뿐인 나하고는 달라. 역시 중원제일 검이라고 해야 하나….’
하후돈은 조조를 막아섰던 이성휘를 떠올리면서 남몰래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달콤한 호의가 묻어나왔다.
투박하고 완고한 모습을 자주 보여 준 여장부는 어디로 갔는지 연모의 마음을 품기 시작한 숫처녀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아, 이번에 새 인재들을 뽑는다면서?”
하후돈이 물었다.
그에 순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쟁으로 인해 잠시 연기했던 인재 선발을 다시 진행하려 합니다. 연주성에 구름처럼 모여든 선비들을 추려내 주군의 대업에 동참하기에 충분한 인재를 선발하겠습니다.”
순욱은 도겸군과의 전쟁으로 잠시 연기되었던 인재 선발을 다시 재개하려 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조조가 중원의 패자로 거듭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더 많은 인재들이 연주로 몰리고 있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학식이 뛰어난 인물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곧 조조에게 천 명(天命)이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 *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소녀가 재빠른 걸음으로 치소에 도착했다.
이윽고 남성을 발견한 소녀는 오랜만에 만난 주인을 향해 졸래졸래 달려드는 강아지처럼 품에 폭 안겨들었다.
“그대,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생사경까지 헤맸다는 소식을 들었다!”
햇볕에 말린 지푸라기처럼 포근한 온기를 담고 있는 금발과 귀엽게 빛나는 큼지막한 금색 눈동자.
진류왕 유협이었다.
낭야국에서 3백 명에 달하는 흉수들과 혈투를 벌이다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는 소식이 결국 진류군에도 전해지게 된 걸까. 유협은 황망함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에게 매달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무사합니다. 전하에게 심려를 끼치게 하여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지금은 그대의 안위가 우선이다!”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대하는 이성휘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는지 작은 황녀가 다그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뺨에 바람을 넣으면서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타인에게는 항상 정성을 다하지만
본인의 안위에 대해선 지독할 정도로 관심이 옅은 사내를 타박하려 했다.
“그대가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선아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아느냐! 밤마다 이부자리에 누워 울었다! 그리고 새벽마다 천지신명에게 그대가 무사하기만을 간곡히 빌었단 말이다!”
“…그렇습니까.”
비참한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초선을 대신하여 유협이 이성휘를 향해 분개를 쏟아 냈다.
그에 이성휘는 죄책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이면서 겸허히 받아들였다.
나의 무모한 행동이 수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작은 황녀는 물론,
경국지색의 시녀에게 또한.
최악의 참사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독단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을 때 조조가 크게 분개하여 서주로 쳐들어가지 않았던가. 조숭과 패국조씨 가문의 식솔들만 구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안일한 행동에서 비롯된 멍청한 우행이었다.
자기 우둔함을 인정한 이성휘는 그 독단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게 된 수많은 사람에게 정중히 사과해야겠다는 생각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저의 무리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인하여 전하와 선아에게 무거운 마음고생을 시키고 말았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이성휘가 예를 갖추면서 사과하자,
그제야 기분이 풀어졌는지 작은 황녀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는지 쀼루퉁하게 물든 얼굴은 그대로였다.
“흥…! 그대의 불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나, 내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도록 하겠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 대신! 그대는 달콤한 벌꿀사탕을 포함한 군것질거리들을 공물로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명하신대로 공물을 바치겠노라는 이성휘의 대답에 유협이 방긋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벌꿀사탕을 공물로 바치겠다는 말에 기쁨을 참을 수 없었는지 어린아이답게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지고 말았다.
“명공!”
이성휘가 무릎을 굽히면서 작은 황녀와 시선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시녀가 다가왔다.
보석처럼 빛나는 하늘색 눈동자.
새하얀 얼굴과 잘 익은 앵두 같은 입술.
달조차 부끄러워하며 구름 속에 모습을 숨길 정도의 절색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두 눈에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아.”
“예, 명공. 무, 무사하신 모습을 뵈니… 정말 다행이옵니다….”
미녀는 우는 모습조차 아름답다고 했던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면서 애써 웃음을 짓는 초선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걱정을 많이 했사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옵니다…. 소, 소녀는 명공께서 분명 무사하시리라고 믿고 있었사옵니다.”
이성휘의 사과에 초선은 감읍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고개를 폭 숙였다.
며칠 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웠지만 상관없었다.
명공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억눌러 온 슬픔과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자신은 평생 은인을 모시기로 한 몸. 은인에게 함부로 투정을 부릴 순 없었다. 그저 은인을 믿고 기다릴 뿐. 그것이 바로 자기 역할 일 테니.
“먼저 기별을 주셨다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
“명공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사옵니다.”
이성휘의 말에 초선은 사랑스러운 몸짓을 취하면서 수줍게 고백하듯 말했다.
* * *
연주와 예주 전역에 구현령(求賢令)이 반포되었다.
천하를 운영할 인재들을 구한다.
인(仁)과 효(孝)를 불문하고 오직 출중한 자질을 갖춘 인재들만을 선발하겠다는 능력 위주의 관료 등용을 내세웠다.
사공(司空) 조조의 명령으로 실시되는 구현령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수많은 인재들이 구름처럼 연주성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와 진짜 엄청나게 몰려들었네!”
아름다운 주황빛 머리카락을 기른 여인이 빼곡하게 몰려든 선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족히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중원의 패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조조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증명하듯 구현령을 내리자마자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발을 디딜 틈도 없겠는데. 무턱대고 인파에 끼어들었다간 그대로 압사당할 것 같고….”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왜냐하면 백수였기 때문이다.
시집을 가든가,
아니면 다른 사대부 여식들처럼 관료라도 되든가.
조조의 심복이 되어 출셋길을 걷고 있는 영천순씨 가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본가는 결국 한량처럼 방구석에서 경전이나 읽던 여식을 반강제로 떠밀기에 이르렀다.
‘등용에서 떨어지거든 모질이에 반푼이 같은 영천남씨 가문의 공자에게 시집보낼 줄 알아라!’
약관을 치르고도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이 방구석에서 나뒹구는 딸의 모습이 여간 한심스러운 게 아니었는지 결국 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듣고 본가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코를 질질 흘리는 바보 같은 놈에게 시집을 갈 순 없으니 어떻게든 임관해야지.”
어릴 적 감나무에서 떨어져 바보가 되어 버린 영천남씨 가문의 공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관료로 임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부군사로 임관했다는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한테 그냥 도움을 받을까…? 추천서도 보내줬었잖아. 아냐, 일단은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봐야지!’
물론 임관에 떨어지면 그때 가서 아쉬운 듯 도움을 구걸해야 하겠지만.
일단 본인의 능력과 자질로 임관에 성공하고 싶었던 영천곽씨 가문의 여식은 들뜬 기대감을 떠안으면서 발걸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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