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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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이 철병을 시작했다.
팽성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음에도,
조조 군은 병영을 거두고 서쪽으로 물러났다.
사로잡힌 5천 명의 포로들은 도겸군과 교섭한끝에 몸값을 받아 내는 조건으로 모두 석방했고, 서주의 군현들을 위협하던 병력들 또한 철병하면서 전화를 잠재웠다.
“고마워, 맹덕을 말려 줘서.”
정열적인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여인의 정중한 모습에 이성휘 또한 고개를 숙이면서 화답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제가 불민하여 유연한 대처를 하지 못했던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이성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유연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이성휘는 자기 책임을 통감하면서 자조 섞인 평가를 내렸다.
조숭과 패국조씨 일가만 구해 낸다면 서주 대학살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안약하게 생각했던 자기 비참한 실수를 통감했다.
이성휘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조조라는 여인에게 있어 ‘전부’로 여겨질 만큼의 존재라는 것을 망각한 점이었다.
“네가 만약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맹덕은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영원히 빠져 버렸을 거야. 그렇게 되었다면…, 평생 업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했겠지….”
하후돈이 숙연함에 찬 표정을 지었다.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질 뻔했다.
그대로 5천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모두 처형시켰다면 학살자라는 흉명과 함께 서주 백성들에게 영원토록 비난과 원성을 받게 되었으리라.
또한 무능한 황실과 부패한 조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천하를 다시 통일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룩하겠다는 꿈과 야망 또한 학살의 참화에 휩싸여 한 줌의 잿더미로 남았겠지.
“맹덕을 구해 줘서 정말 고마워.”
패국의 여걸이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재차 감사를 전했다.
죽마고우처럼 함께 유년시절을 지냈던 소중한 사촌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었다. 하후돈은 평생 이 남자를 은인처럼 여기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는 패국조씨 가문은 물론, 패국하후씨 가문의 영원한 은인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맹덕을 강경하게 다그칠 때 말이야… 어, 엄청 멋있더라…! 맹덕이 널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를 전하던 하후돈이 항상 씩씩한 기개를 보이던 얼굴을 숫처녀처럼 붉히면서 수줍음을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적장을 항상 일초지적처럼 쓰러트리는 용맹한 맹장이 처음으로 사내에게 여인의 면모를 보였다.
만약 하후연이 누이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을 내질렀으리라.
“아, 아무튼 말이 그렇다는 거야…! 내가 이런 말했다는 걸 절대로 맹덕한테는 말하지 마. 분명 다짜고짜 심술을 부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크흠! 크흠흠!!”
이성휘의 대답에 하후돈은 어색하게 헛기침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손가락으로 툭 건들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고백으로 오해할 법한 말을 한 패국의 여걸은 처음 느껴보는 마음이 크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맹렬하게 박동치는 심장 소리가 이성휘의 귀에 들릴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 네 덕분이야. 언젠가 이 은혜를 갚을게. 하후원양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어.”
풍만하게 솟은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맹세를 전한 하후돈은 이성휘를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알 것 같았다.
한겨울의 얼음장처럼 냉철하던 사촌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를.
그 이유를 격렬히 통감하게 된 여걸은 자기 마음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내심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 * *
철병을 서두르던 조조군이 마침내 서주에서 물러났다.
팽성 전투에서 크게 압승하여 서주 전역에 위세를 떨치게 된 조조 군은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석방하는 대가로 받아 낸 재물들을 짊어진 채 연주로 귀환했다.
연주 태산국에 도착했을 때,
조조는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누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조덕이 누이에게 달려와 예를 취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도겸군을 응징하기 위해 출격했던 병력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패국조씨 가문의 다른 일가친척들 또한 조덕과 함께 조조를 맞이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맞이하는 행렬에 한 사람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디 계시지?”
“저, 그것이….”
아버지의 위치를 묻는 조조의 물음에 조덕이 곤란함에 찬 난색을 지었다.
차마 말하기 민망했는지,
조덕은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물음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모습을 보였다.
“아비를 무시하고 떠난 딸 따위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으시겠다며… 칩거하고 계십니다.”
“칩거?”
“꽁한 채로 처소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누이도 잘 아시잖습니까?”
동생의 대답에 조조는 짙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언짢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폐관에 돌입했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칩거하면서 농성을 벌여댔다.
“…분명 못난 딸에게 실망하신 걸 테지.”
무릎을 꿇으면서 매달리던 아버지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원정길에 나섰다.
아버지가 화내는 것은 당연했다.
불효와 패악을 저지른 딸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재회한 아버지에게 씻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밀려드는 죄책감에 조조는 어깨를 떨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맹덕 님.”
과연 아버지께서 못난 딸을 용서해주실까.
잠시 번민에 빠져 있을 때,
우려스럽게 보였는지 이성휘가 다가왔다.
“괜찮네. 내가 불민하고 불효하여 벌어지게 된 일이 아닌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이성휘의 선의를 거절한 조조는 자신이 직접 해결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내가 뿌린 불화의 씨앗이니,
내가 그를 거두는 것이 순리일 테니까.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아버지를 매몰차게 뿌리쳤던 자기 모습을 떠올린 조조는 회한과 죄책감에 찬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아버지 조숭이 칩거하는 처소로 향했다.
“아버지.”
조숭이 머물고 있던 장소는 관리들을 위해 만들어진 역관(驛館)이었다.
역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분명 조숭의 지시로 굳게 닫힌 것이리라.
굳게 닫힌 마음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을 본 조조는 우두커니 선 채로 아버지를 불렀다.
“딸이 돌아왔습니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느냐! 어서 썩 물러가거라!”
문 너머로 들려온 조숭의 성난 외침에 조조는 숙연함에 젖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녀가 아둔하여 잘못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증오와 복수에 눈이 멀어 대업을 그르치려 했다.
아버지를 뿌리쳤으며,
부하들의 충언을 등한시하고 말았다.
입술을 꾹 깨물면서 자기 어리석음을 크게 한탄했다.
사랑하는 남성의 헌신과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했던 자기 우둔함을 곱씹으면서 두 번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겠노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차마 인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부관을 죽음 직전으로 내몰았던 서주 놈들을… 그와 연관된 놈들을 모조리 베고 싶었습니다.”
흑발의 여인이 쓴웃음을 흘리면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아버지가 듣고 있을까,
눈가를 바르르 떨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던 그 장수는… 제가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든 강판처럼 얼어 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 일념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아버지가 문 너머에서 계속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이성휘를 향한 마음을 밝혔다.
중원제일 검의 무명을 자랑하는 사내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 복수하고 싶었을 정도로 연모하는 사내였다.
조조는 자신이 무슨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아지경인 상태에 빠진 채 울음기에 젖은 목소리로 본심을 그대로 전했다.
“그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봤을 때…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너무 아프고 아파서… 어떻게든 마음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다른 곳으로 쏟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구차한 핑계에,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이룩해온 모든 대업을 내던지면서까지 복수를 꾀하려 한 이유를 아버지에게 모두 털어놓은 다음에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흑발의 여인이 마음속의 응어리들을 모두 고백하면서 고개를 떨궜을 때,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중년남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딸의 진심 어린 고백을 문 너머에서 모두 듣고 있었는지 열의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중원제일 검이 우리 가문의 사위가 될 예정이란 말이냐?”
단기필마로 돌격하여 3백 명에 이르는 흉수들로부터 가문과 가솔들을 구해 낸 중원제일 검은 딸이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숭은 뜨거운 활기를 띠며 물었다.
사내에 전혀 관심이 없던 딸이,
혼사를 포기하고 대업의 달성에 뛰어들었던 외동딸에게 마음에 둔 정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조숭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천하에 무명을 떨친 중원제일 검이 패국조씨 가문의 사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럼 혼사는 언제쯤 치를 예정이냐? 당연히 중원제일 검과 서로 혼약은 예정했겠지?”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분개하던 아버지가 화색을 띠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열렬한 질문 공세를 받게 된 조조는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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