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
본진을 호위하던 수천 명의 장졸들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길을 내는 모습은 강철로 된 바다가 둘로 나뉘는 것처럼 웅장했다.
강철의 파도가 갈라지면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박한 인상.
무뚝뚝한 얼굴.
그를 본 흑발의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온몸으로 경악을 발산했다.
사고가 멈추고 말았다.
생각이 완전히 정지했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성은 자기 전부였던 사내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정말 그 사람이 맞는 걸까,
사내의 모습을 본 조조는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다.
온전치 못한 내 정신이 만들어낸 환영일 것만 같았기에. 툭 하고 건들면 사르륵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환영처럼 보였으므로.
“…귀관.”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으니까.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내와 감동적인 재회를 하였음에도 흑발의 여인은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귀관, 정말로… 귀관인… 겐가…?”
이 남자를 잊으려 했다.
뇌리에서 잠깐 접어두려고 했다.
무고한 생명들을 도륙하고 학살하는 내 모습을 그는 절대로 원치 않을 터.
그가 사랑했던 나의 모습은 빛나는 이상과 대망을 추구하던 조맹덕이었지, 살의와 증오의 괴물로 떨어져 버린 조맹덕이 아닐 테니까.
“예, 맞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짧고,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흑발의 여인이 오매불망하며 기다려온 말이기도 했다.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두 눈에 눈물이 범람했다. 증오에 물든 두 눈에 연모의 마음으로 빚어진 눈물이 차올랐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차차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분명 빈사 상태가 된 채 누워 있어야 할 이성휘가 멀쩡히 돌아오자 하후돈이 놀라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순욱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조와 이성휘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하후돈과 순욱은 뒤로 물러서면서 두 남녀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모, 몸은 어떤가…! 정말 일어나도 되는 겐가?!”
“괜찮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던 이성휘의 모습을 떠올린 조조가 입술을 떨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갑자기 피를 쏟아 내면서 쓰러지진 않을까.
사랑하는 사내가 피를 쏟아 내면서 시름하던 모습을 두 번 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몇 번이고 상태를 확인했다.
“귀관, 혹… 혹시… 꿈은 아닌 겠지…?”
“꿈이라 생각되십니까.”
이성휘가 조조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면서 손을 뻗었다.
애처롭게 보일 정도로 바르르 떨던 그녀의 손을 감싸주었다. 피비린내가 감도는 싸늘한 손에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손을 감싸는 두터운 감촉.
조조가 손가락 끝을 움찔 흔들었다.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감촉에 기쁨과 당혹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으윽…!”
가득 범람했던 눈물이 마침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애써 참아내려 했건만,
그리웠던 목소리와 손길을 느끼게 된 조조는 결국 눈물을 참아내지 못하고 왈칵 쏟아 내고 말았다.
처연한 울음소리와 함께 눈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면서 평범한 계집아이마냥 엉엉 울었다.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 히끅히끅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저, 정말… 귀관인… 겠지? 정말, 정말로… 귀관이 맞는가…?”
울음을 엉엉 쏟아 내는 조조의 모습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아만.”
그때,
진심 어린 고백을 했을 때처럼.
이성휘는 눈물에 물든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상냥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흑발의 여인은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귀, 관…! 귀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떨구던 흑발의 여인이 두 팔을 뻗으면서 이성휘를 꼭 껴안았다.
품에 고개를 파묻으면서,
꿈이라면 부디 깨고 싶지 않다는 듯이 온몸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이 행복한 꿈이 깨지지 않기를.
부디 이 행복한 꿈과 함께 가라앉기를.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던 연인과 다시 재회하게 된 흑발의 여인은 지금까지 억눌러 온 감정을 일 거에 해방하듯 오열을 쏟아 냈다.
“맹덕 님.”
그녀의 가냘픈 등을 토닥여주면서 울음을 잠시 진정시킨 이성휘가 입을 열면서 얼굴을 마주했다.
“그간 괴롭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 아닐세…! 내가 부족하여… 내가 불민하여 귀관에게 모든 부담을 떠맡기고 말았네…! 모두 내 잘못일세…!”
사랑하는 이성을 향한 연모의 마음은 모순적이게도 그를 잃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법이다.
수많은 후회를 하고,
수많은 죄책감을 경험했다.
이성휘가 혼절하여 사경을 헤매는 동안, 조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후회와 죄책감을 되뇌면서 무작정 그를 의지하려 했던 자기 행동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맹덕 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이성휘가 조조에게 말했다.
“서주에서 철군하시지요.”
그 말에 흑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허나… 도겸은 살수들을 보내어 내게서 귀관을 앗아가려 하였네. 어떻게 그를 용서하란 말인가?”
비극과 불행의 원흉이 된 늙은이를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내게서 부친과 일가친척들을… 사랑하는 부관을 앗아가려 했던 놈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아니던가.
놈의 식솔들을,
놈이 서주에서 쌓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잿더미로 불태우려 했다.
그래서 조조는 도겸을 지지하는 서주 백성들을 참회의 구렁텅이로 밀어 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것은 장개와 그 일당들이 꾸민 소행이지 않습니까?”
“어찌 그를 믿으란 말인가. 도겸이 끄나풀들을 앞세워 꾸민 소행일지도 모르네.”
철군을 종용하는 이성휘의 말에 토끼처럼 두 눈이 퉁퉁 부은 조조는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5천의 포로들에게 내리기로 했던 참형은 중지하겠다, 감정에 치우쳐진 아무런 실리 없는 만행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서주에서 완전히 철군할 것을 종용하는 이성휘의 말에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도겸을 향한 분노와 원한을 결코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겸은 철천지원수다.
기필코 놈에게서 모든 것들을 빼앗겠노라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도겸은 분명 자신을 우습게 볼 게 틀림없었다.
“복수와 원한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학살과 도륙을 부를 뿐입니다. 서주는 나중에 다시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부디… 현명한 처결을 내려주십시오.”
이성휘의 말에 조조는 입을 꾹 다물면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연모의 마음과 시커먼 증오 속에 놓인 채 번민하는 듯했다.
“귀관은 분하지도 않는 겐가? 도겸이 부하를 내려 보내지만 않았어도, 간악한 놈이 흉수를 부리지만 않았더라도 일이 이렇게 악화 일로를 겪게 되진 않았을 것일세!”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흑발의 여인은 두 눈을 떨면서 이성휘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내가 어떤 각오를 하고서 왔는데!
어떻게 이대로 물러난단 말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지금까지 쌓은 증오와 원한의 불씨가 너무도 깊었다.
“이대로 물러서란 말인가? 아직 도겸은 그 어떤 징벌도 받지 않았거늘! 어찌 귀관은 비극의 원흉인 도겸을 궁지 끝에 몰아 넣었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물러서라고 진언하는가!”
이성휘를 향해 증오에 물든 외침을 전한 흑발의 여인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어떤 심정으로 군세를 일으켰는지 아는가? 귀관을 향한 마음을, 지금까지 나눈 추억들까지도 모두 두고 떠나왔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이대로 철군하라는 말을 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두 눈은 짙은 원망과 노여움에 물들어 있었다.
나를 믿어 준 귀관이라면,
나를 이해해준 귀관이라면,
분명 내 심정을 헤아려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설령 내가 잘못된 길로 향할지라도 충직하게 나를 보필해온 귀관이라면 함께 가담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원망스러웠다.
재회하게 되어 한없이 기쁜 귀관이 원망스러웠다.
“거병하기 전에 맹덕 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빛나는 이상과 미래를 보여주겠노라고.”
격정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
흑발의 여인과 대치하듯 우두커니 선 이성휘가 다소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들을 도살하고, 무고한 서주 백성들을 살육하는 학살이 제게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던 빛나는 이상입니까!”
격노에 찬 이성위의 외침에 조조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입을 열어 반박하려 했지만,
바르르 떨리는 입술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만들 뿐이었다.
이성휘의 성난 외침에 그녀는 거병하기 전에 그와 나눴던 시간들을 회상했다.
함께 이상을 그리면서,
허무맹랑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던 미래를 분주하게 구상했다.
오랫동안 연모해온 남성과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가면서 이상을 입에 담으며 열띤 설명을 펼쳤던 그날의 시각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맹덕 님께서 두고 떠났던 마음과 추억들을 모두 가지고서… 맹덕 님에게 다시 돌아왔단 말입니다!”
이성휘가 결연함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조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결연한 마음을 전달했다.
당신이 두고 떠났던 마음과 추억들이 다시 돌아왔노라고, 인간의 면모를 포기하고 괴물이 되려는 당신을 막기 위해서 왔노라고.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몸을 던졌던 그녀를 다시 끄집어냈다.
“…….”
잘못을 꾸짖는 목소리.
우악스럽게 어깨를 붙잡는 손길.
괴물로 떨어지려는 자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눈빛까지.
증오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끔찍한 복수심이…,
도살하고 잔륙하겠다는 살의가 아침을 맞이한 물안개처럼 점점 걷혀갔다.
그토록 굳게 맹세하고 다짐했거늘.
연모하는 남성의 진심 어린 호소에 조조는 끔찍했던 악몽에서 깨어나듯 환열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귀관은 정말, 귀관은 정말로 무례한 사람일세.”
사랑하는 남성으로부터 열렬한 호소를 듣게 된 흑발의 여인이 입술을 꾹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기쁨과 환희의 응어리였다.
싸늘하고 무자비한 냉혹함이 맴돌던 얼굴에서 어느덧 따스한 온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게 어찌 이리도 무엄하게 목소리를 높인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흥…. 이번 한 번만 봐주도록 하겠네.”
자애로운 관용을 베푼 흑발의 여인은 잠시 고개를 돌리면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찬연한 광채를 내뿜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싸늘하게 물든 새벽이 끝나고,
따스함이 세상을 물들이는 아침이 도래한 것이다.
“전군, 서주에서 철퇴한다.”
길고 길었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게 된 중원의 패자가 장수들을 향해 철군을 명령했다.
포로들을 죽이지 않겠다.
서주 백성들을 살육하는 일 또한 없으리라.
학살의 공포와 위협은 끝났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생명들을 대상으로 했던 학살은 시작되지 않은 채, 살벌하고 위태로웠던 시도로만 끝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