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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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 전투에서 3만에 이르는 도겸군을 완파한 조조 군은 팽성국(彭城國)의 군현들을 크게 포위했다.
잔륙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처럼,
팽성으로 도망친 도겸에게 투항할 것을 종용한 조조 군은 기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도겸군에 가세하려는 공손찬군과 원술군마저 몰아내려 완전히 포위망을 굳혔다.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팽성에 웅거하는 도겸군을 도울 세력은 그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하비국(下邳國)와 동해국(東海國)에서 팽성에 갇힌 도겸을 구원하기 구한 지원군이 당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그렇겠군.”
정욱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팽성은 서주의 중심지이며,
또한 강 너머에는 수많은 병력과 물자들이 있는 하비국과 동해국이 있었다.
도겸군이 대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방관들은 서둘러 지원군을 준비할 터. 필시 팽성을 크게 포위하는 아군 군세의 후미를 공격하려 들 것이었다.
“도겸이 과연 항복을 해 올까?”
하후돈이 물었다.
그녀는 도겸군이 투항해 올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보이었다.
도겸이 웅거하는 팽성은 손으로 꼽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놈들은 분명 성에 비축해 둔 양곡들이 다 떨어질 때까지 성벽에 몸을 숨긴 채 저항해 올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 필사적으로 농성에 주력을 다 할 테지.”
조조 또한 하후돈과 마찬가지로 도겸군이 투항해 올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예측했다.
“그럼 어째서 5천 명에 달하는 포로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거야? 게다가 하비국의 군현들에도 병사들을 보냈잖아.”
소름 끼치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5천 명에 달하는 포로들은 물론, 수만 명에 이르는 하비국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만약 도겸이 일주일 동안의 말미를 주었음에도 투항을 해 오지 않는다면 조조 군은 선언했던 대로 5천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조 군은 현재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상태였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정말로 그들을 모두 죽일 것만 같아,
하후돈은 조조에게 처음으로 꺼림칙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아, 아니지…? 닭장에 숨은 닭처럼 팽성으로 도망친 도겸을 위협하려고 거짓 위세를 부린 거잖아….”
하후돈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 내고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광기를 품고 있는 사촌을 향해 물었다.
그에 조조가 답했다.
“나는 거짓을 고한 적이 없다.”
“그, 그럼 너 설마….”
“일주일 뒤에 아침 해가 밝는 순간, 팽성의 장졸들이 내려다볼 수 있는 벌판에서 포로들의 목을 칠 생각이다.”
5천의 포로들을 모두 도살하겠다고 말한 조조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차갑고 냉혹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하후돈에게 몰살을 선언해 버렸다.
무자비한 광기에서 탄생한 살의였다.
수많은 격전들을 치렀던 하후돈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지독스러운 살의가 아닐 수 없었다.
한 사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과 소중한 추억들을 둔 채 발걸음을 돌린 흑발의 여인은 살의와 광기를 품은 학살자가 되어 있었다.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포로들만 해도 5천 명이 넘는다고, 맹덕! 잡은 포로들을 눈앞에서 모두 죽이면 팽성의 장졸들은 죽기 살기로 싸우려고 들 거야!”
5천 명의 포로들을 끔찍하게 살육하는 광경을 팽성의 장졸들이 보게 된다면 성난 벌떼처럼 일어설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죽여 무슨 이득을 본단 말인가?
괜한 도발일 뿐이다.
무의미한 살육일 뿐이었다.
“명령이다, 원양.”
조조의 날카로운 엄명에 하후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력을 이끄는 군주가 내린 결정이다.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군주의 명을 받드는 장수였으므로.
비겁한 생각일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증오와 복수심에 빠져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봐. 이성휘라면 분명… 복수심에 빠져 버린 네 모습을 원치 않을 테니까.”
“…….”
하후돈은 등을 돌리면서 떠나기 전, 비통함에 젖은 표정으로 조조에게 그리 말했다.
그 말에 조조는 답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를 바르르 떨며,
애처롭게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을 뿐이었다.
“부관이 어떻게 내 모습을 안단 말인가…. 지금 부관은 사경을 헤매는 중이거늘. 나를 안아줄 수도, 나를 말릴 수도 없단 말이다…!”
하후돈이 떠나고 홀로 남게 되자,
흑발의 여인은 오랫동안 묵혀온 슬픔을 토해냈다.
파도처럼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자신을 향한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대체 뭘 하는 걸까.
홀로 남겨진 한 그루의 나무처럼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고독함에 휩싸였다.
“부관….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이 못난 나를 책망하고 꾸짖어다오…! 그리고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나를 안아다오…. 그대가 없는 전장은, 그대가 없는 공간은 너무도 춥고 외롭단 말이다…!”
맹혹한 추위가 몰아치는 고립무원의 현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홀로 설원을 정처 없이 거닐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뭘 해야 하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잊어 버린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 * *
조조군으로부터 투항 종용을 받게 된 도겸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팽성에서 농성을 반복하면서 장기전으로 이어간다면 필시 조조 군의 군량이 먼저 바닥나게 될 터. 도겸은 조조군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팽성에 틀어박힐 생각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5천의 병사들이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건만, 도겸은 세력의 명맥과 존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매몰차게 외면해 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날카로운 월도를 어깨에 짊어진 여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중얼거렸다.
7일째를 맞이하는 새벽.
그동안 팽성의 도겸군은 철저히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붙잡힌 포로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에도 도겸은 7일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전령을 보내지 않았다. 붙잡은 포로들을 모두 죽이라는 의미였다.
“처형대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새벽녘이 되자마자 처형이 집행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두 자루의 철극을 허리에 매달고 있던 사내가 하후돈에게 말했다.
팽성의 도겸군에 예고했던 대로,
새벽녘이 밝으면 5천에 달하는 포로들을 모두 효수할 계획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들에 참전했던 조조군조차도 수천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모두 처형시키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장졸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교위,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하후돈이 물었다.
그에 하후돈의 부장이 대답했다.
“저는 그저… 주군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장수가 주군의 명령에 이의를 품는 것은 절대로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렇기에 하후돈의 부장, 전위는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면서 그저 명을 따를 뿐이라고 답했다.
“이제 해가 뜰 텐데….”
“어르신께서는 정말로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실 생각이신가?”
둔영 외곽을 호위하던 경계병들이 우려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싸움과 유혈이 무한히 반복되는 난세 속에서도 결코 해선 안 될 일이 존재하는 법이다.
포로들은 물론, 인근 군현들에 거주하는 백성들까지도 모두 잔륙하겠다는 조조의 선언에 장졸들은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포로들을 어서 처형대로 압송하라!”
“팽성의 도겸군 놈들이 볼 수 있도록 주변을 횃불로 밝혀라!”
해가 뜨기 직전,
조조의 친위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의 명을 받은 친위대는 예하부대에 명령하여 5천의 포로들을 모두 처형대로 압송할 것을 지시했다.
“살려주시오!”
“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뭐든지 할 터이니!”
갑옷과 병장기를 빼앗긴 채, 누더기옷을 입고 있던 포로들이 절규를 토해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벌판에 설치된 처형대들.
처형대를 본 포로들은 제발 살려달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분명 처형대에서 목을 치려는 게 틀림없었다. 심장을 조르는 듯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 도겸군 포로들은 온몸을 비틀면서 저항했지만 결국 조조군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린 채 처형대로 향하게 되었다.
“주군.”
갑옷을 입은 흑발의 여인이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직접 처형을 참관하려는 듯,
일말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서릿바람 같은 냉혹함을 온몸에 두른 여인은 살의에 물든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면서 상석에 올랐다.
상석에 앉은 그녀가 참(斬)이라고 적힌 목패를 바닥으로 내던지면 포로들을 일렬로 줄 세운 처형대에서 형이 집행될 터였다.
“후우….”
상석에 오른 흑발의 여인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차갑게 젖은 공기가 뺨을 에워쌌다.
내려앉은 추위를 잠시 느낀 그녀는 새벽녘을 확인하기 위해 동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뜬 것은 아니었지만 불그스름하게 물든 빛무리가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벽녘에 처형이 집행되리라는 것을 들은 포로들은 내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터.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늘은 포로들의 기도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은 매우 당연한 세상의 섭리였기 때문이다.
“맹덕!”
찬연하게 빛나는 빛무리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감싸고 있는 고독함을 곱씹은 조조가 상석에 앉으려고 했을 때,
붉은 머리카락의 여걸이 근위병들의 제지를 뚫으면서 난입했다.
그를 제지하려 했던 허저는 그녀의 부장이었던 전위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당장 그만둬! 이 미친 짓거리를 그만두라고!”
하후돈이 성난 표정을 지으면서 냉혹함을 두른 흑발의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그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결코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이대로 5천에 달하는 도겸군 포로들을 모두 처형시킨다면 그녀는 인두겁을 쓴 악귀로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것을 차마 좌시할 수 없었던 하후돈은 목숨을 걸고 조조를 막으려고 했다.
이성휘가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테니까.
자신은 이성휘가 될 순 없지만 적어도 그가 하려고 했을 일을 대신 나설 수는 있었기에 목숨을 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원양, 당장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겠다면 너를 군율로 다스리겠다.”
“패국의 담대한 여걸께서 그깟 군율 때문에 의기를 거둘 것 같아? 죽었으면 죽었지, 이대로는 못 물러나. 이성휘가 있었다면 분명히 이렇게 나섰을 테니까.”
“…원양!”
조조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그 이름을,
내 앞에서 그 이름을 부르지 마라.
내 전부였던 사내의 이름을… 학살자로 전락해 버린 내 앞에서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마치 날카로운 바늘로 사정 없이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 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의 머리맡에 두고 떠났던 연모의 감정과 추억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당장 내 앞에서 끌어내라.”
“예!”
조조의 명을 받들게 된 무관들이 앞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있던 하후돈을 포위했다.
당연히 강제력을 발휘하여 군율을 어지럽히고 상관의 명을 거역한 장수를 붙잡아야겠지만, 상대는 조조의 사촌이며 또한 일군을 통솔하는 기장이었기에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주, 주군…!”
조조와 하후돈이 첨예하게 신경전을 일으키고 있을 때,
하후돈과 근위병들이 일으킨 소요 때문에 감히 가까이 들어올 수 없었던 무관이 작은 목소리로 조조를 불렀다.
급히 전해야 될 말이 있는지,
얼떨결에 근위병들에게 붙잡히게 된 무관은 초조함에 떠는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인가.”
자기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후돈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조조가 고개를 돌리면서 근위병들의 제지를 받던 무관에게 물었다.
그에 무관이 입을 열려 했을 때,
본진을 호위하던 수천 명의 장졸들이 좌우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도열했다.
두터운 갑옷과 날카로운 병장기를 든 장졸들 사이로 무뚝뚝한 얼굴의 남성과 상아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림총사가 당도했습니다…!”
본진을 호위하는 병력을 통솔하던 악진이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조조에게 고했다.
날카로운 눈매.
무뚝뚝한 얼굴.
주변에 위압감을 주는 인상까지.
부군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남성을 본 조조는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두 눈을 부릅뜨면서,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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