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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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었던 사내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애처롭게 통곡하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남편을 잃은 아내처럼.
아이를 잃은 부모처럼.
수려한 얼굴이 눈물에 범벅이 될 정도로 엉엉 울면서 구슬프게 한탄했다.
“미안… 정말 미안 하네…! 흐윽, 흑! 귀관에게 계속 부담을, 희생을 맡기게 하여 미안 하네…!”
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랑스러운 여인이.
나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했는데.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누구보다 드높은 긍지와 명예를 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예정된 학살을 막으려고 하였으며, 그녀가 올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삶의 전부가 되었으니까.
“귀관, 나를 따라오게.”
“내가 만들고자 하는 치세를 귀관에게 먼저 보여주겠네.”
“귀관이 내 곁을 끝까지 따라와 준다면 나는 찬연하게 빛나는 미래를 보여 줄 것일세.”
그녀는 수줍게 물든 표정을 지으면서도 당찬 목소리로 찬연하게 빛나는 이상향을 입을 담았다.
시궁창으로 망가진 난세 속에서,
패왕(覇王)이 되겠노라 선언한 그녀는 천하를 평정하고 백성들을 태평성대로 이끌겠다는 확연한 목표 의식을 보여 주었다.
본인의 이상향을 설파하면서 입가에 지었던 햇볕처럼 찬연하고 따스하여, 그때부터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나는 이제 사람의 마음을 잊으려 하네.”
“그러니 귀관에게 품었던 내 마음과 소중한 추억들을 옆에 두고 떠나겠네.”
홍옥처럼 찬연하게 빛나던 새하얀 이상향이 복수와 증오로 시커멓게 더럽혀져 갔다.
더러운 시궁창에 빠지듯,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수줍게 이상향을 설명하던 그녀가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당신은 절대로 떨어져선 안 된다.
어찌 지금까지 이룩한 꿈과 이상향을 포기하고 스스로 나락으로 향하려 하는가.
사내는 구렁텅이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그녀를 향해 맹렬히 손을 뻗었지만 애석하게도 닿지 않았다.
손이 닿지 않았다.
아무리 뻗어도 허공만 스칠 뿐이었다.
절규를 토해내면서 매달렸음에도 복수와 증오에 빠진 그녀는 예정된 파국으로 향하려 했다.
“…미안 하네, 귀관.”
진심으로 사랑했던 흑발의 여성이 이윽고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맹렬히 타오르는 참화 속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생명들을 무참히 앗아가는 학살자로 떨어져 버렸다.
예정된 비극을 미리 알고 있기에…, 시산혈해의 전철을 밟으려 하는 그녀를 향해 결코 닿지 않을 손길을 뻗었다.
* * *
“괘, 괜찮으세요…?!”
몸을 일으키자마자 맞이해준 사람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여인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던 사내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몸을 벌떡 일으켰으니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 극적으로 몸을 일으킨 이성휘를 응시했다.
“온몸이 천근처럼 무겁습니다만… 어떻게든 버텨볼 만은 합니다.
훗날 건안삼신의(建安三神醫)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될 화타와 장중경의 심혈을 기울인 치료 덕분에 이성휘는 죽음의 늪에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순욱의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달려온 의원들 또한 두 눈을 부릅뜨면서 경이를 토해냈다.
“주, 중원제일 검이 일어났다!”
“하늘께서 도우셨음이 분명하오!”
“역시 원화 선생이십니다! 정말로 소생에 성공했습니다!”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 이성휘의 모습을 본 의원들은 환희에 찬 쾌재를 불렀다.
중원제일 검이 되살아났다.
우여곡절 끝에 중원제일 검이 다시 눈을 떴음에 기적을 부르짖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하면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던가.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병자가 병환을 떨쳐 내고 일어나는 모습은 의원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부군사. 제가 쓰러진 뒤에 벌어진 일들을 소상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온몸에 꽂힌 침들을 다시 빼내고 있던 이성휘를 향해 순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까.
순욱은 입술을 꾹 다물면서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주군께서 결국 5만의 군세를 이끌고서 서주로 출정하셨습니다.”
결국 서주 침공이 벌어지게 되었다.
도겸군에게 선전포고를 내렸으며,
사절단으로 파견된 별가(別駕) 조욱과 서주 관료들은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현재 도겸군과 팽성 인근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을 터. 대학살로부터 한 발자국을 남겨두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당장 서주로 가겠습니다.”
“네?!”
이성휘가 억지로 몸을 움직이면서 침상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 위태로운 모습에 순욱은 물론,
지켜보고 있던 의원들 또한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죽음에서 겨우 되살아난 주제에 대체 어디를 가겠다는 말인가?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할 병자가 무리하게 움직이려 하자 의원들은 한사코 막으려 했다.
“안정을 취해야 하네!”
“대체 어디를 가겠다는 말인가!”
의원들의 만류에 이성휘는 순욱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맹덕 님을 막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이룩해온 모든 대업들이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무너질 겁니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학살을 막아야 했다.
결코 예정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절규와 복수만이 존재할 뿐인 전쟁을 무조건 저지해야 했다.
많이 늦었지만 마지막 기회까지 놓친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다.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성휘는 자신이 끝내 못 이룬 안배를 이번에야말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위험해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어림총사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주군을 구해 내는 것이 바로 저와 문약 님의 책무입니다.”
“…….”
사내의 완강한 모습에 영천순씨 가문의 여식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모두 그의 말대로였다.
그의 무대포 같은 말에 틀린 부분이 없었다.
야망과 이상향을 포기한 채 분노와 증오에 몸을 맡기고 있는 그녀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될 터. 뜻하던 대로 서주를 시산혈해로 만들 수 있을지언정, 그 혈겁 위에는 그저 패망만이 존재할 뿐이리라.
“…준비하겠습니다.”
결국 순욱은 이성휘의 억지 같은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길을 가려는 주군을 막는 것.
그것이 바로 곁을 보필하는 심복들의 책무였기에.
비록 너무 많이 늦어 버렸지만 말이다.
* * *
4만의 병력과 3만의 군세가 격돌했던 팽성 전투는 서주 백성들의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무시하듯 조조 군의 압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조조 군은 압도적인 힘을 떨쳤으며,
전선에 투입된 도겸군을 완파하고 5천의 병력들을 포로로 잡는 등의 성과까지 거둬냈다.
팽성 전투의 결과를 듣게 된 사대부와 호족들은 비명을 토해내면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청주자사 전해가 군세를 이끌고 임성국을 공격하였으나 하후연 장군께서 무사히 막아 내셨습니다.”
예상대로 공손찬이 움직였다.
원술과 동맹 관계였던 공손찬은 원술과 동맹을 맺게 된 도겸군을 지원하기 위해 청주(靑州)의 2만 병력을 급파했다.
그러나 곧 하후연의 병력과 마주하게 되었고, 치열한 격전 끝에 서주 전선에 개입하려는 청주자사 전해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공손찬이 움직였다면 원공로, 그놈 또한 움직였을 터. 자효가 잘 막아내는 모양이군.”
남양군의 원술 또한 움직였으리라.
원술군의 모습이 전장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예주에 주둔하는 병주군이 성공적으로 원술을 막아 냈다는 반증이었다.
공손찬과 원술을 저지해냈다.
덕분에 조조는 전투에서 대패하여 팽성으로 도망친 도겸을 보다 확실하게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장수들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하비국(下邳國)으로 이동하라. 필시 하비국 놈들이 팽성에 물자를 지원하고 있을 터. 신호를 보내면 하비국의 다섯 군현들을 불태워라.”
수릉현(睢陵縣). 취려현(取慮縣). 하구현(河口縣). 동현(僮縣). 양성현(良成縣).
조조는 장수들을 다섯 군현들에 파견한 뒤, 도겸이 만약 투항 종용을 거부하면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물론, 가축들까지도 모조리 잔륙할 생각이었다.
시체로 강을 틀어막고 산을 가득 메우게 되겠지.
서주에 존재하는 도겸의 모든 기반들을 초토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만약 도겸이 투항을 거부한다면…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5천 명의 병사들부터 처형시키겠다.”
팽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그 인근에서 처형을 집행하려 했다.
도겸을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저항과 반발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지를 보여 줄 것이다.
5천 명의 포로들을 살해하고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도륙하는 일 따위, 나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사람이 피투성이로 돌아왔을 때 느꼈던 아픔과 격통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무력감을 도겸, 네놈도 느껴봐라.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의 죽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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