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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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남성이 누워 있었다.
시체처럼 쓰러진 채 미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매우 위태롭게 보였다. 창백하게 물든 안색과 온몸에 감긴 붕대, 그것을 본 흑발의 여인은 남성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휘.”
사랑하는 남성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털썩 쓰러지듯이 의자에 앉았다.
붉은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남성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나 때문이다. 모두 나 때문이다.”
악몽이다.
실로 끔찍한 악몽이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악몽이라며 부정하려 하였으나,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와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는 잔혹한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부담을 안기지만 않았더라면….”
막중한 신뢰는 곧 무거운 부담으로 전가되었을 터.
내가 믿음의 중압감을 가했기에.
내가 부담을 계속해서 가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성휘는 어떻게든 혼자서 해내겠다는 만용을 품고 3백 명에 달하는 흉적들을 향해 생사결을 벌인 것이리라.
“내가 귀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 때문이다.
이 남자는 나 때문에 휘말린 것이다.
항상 나는 주변 사람들을 상처 입혔으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목숨을 잃어갔으니까.
분명 나에게 가해진 악업과 저주가 이 남자의 목숨을 앗아가려 한 게 틀림없었다.
이성휘가 죽을지도 모른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처럼 축 늘어진 이성휘의 모습을 본 조조는 비통함에 찬 한숨을 토해내면서 자괴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하다.”
조조의 두 눈에서 비련이 뚝뚝 떨어졌다.
비련(悲戀).
슬프게 끝나는 사랑.
그녀의 눈물은 어쩌면 비극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랑을 슬퍼하는 비통의 두려움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성을.
내 모든 것들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남성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바닷물처럼 결국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애통함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일어나다오….”
의자에 앉은 흑발의 여인이 비통함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무력하게 늘어진 사내의 손을 움켜잡았다.
항상 따스하던 손이,
나를 항상 다독여주던 듬직한 손이,
눈물이 왈칵 흘러나올 정도로 싸늘하고 무력했다.
천하에 감히 대적할 이가 없다고 알려진 중원제일 검의 손이 이렇게 무력해질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오래전에 죽은 시체를 붙잡은 것만 같았다.
“나는 귀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한없이 나약하고 연약해서… 귀관이 없으면 격정에 휩쓸릴 뿐인, 그런 몹쓸 계집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다….”
천하에 귀관이 없다면,
드넓은 강산과 산택을 모두 차지한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
훗날 내가 차지하게 될 천하는 귀관과 함께 일구어낸 성공이어야 한다.
내 평생을 바쳐 사랑하기로 맹세했던 귀관이 내 옆을 지켜 주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영광과 영예들을 누린다고 한들 조금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귀관이 내게 다가오기 전부터… 나는 귀관을 매일 바라보며 애달픈 마음을 느껴오고 있었다.”
조조는 이성휘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두 눈을 끔뻑이면서 과거를 선명하게 회상했다.
찬연하게 빛나는 사내가 있었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난세 속에서도 뚜렷하게 빛나는 본연의 색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괜찮아질 것이라 말하듯이 항상 앞으로 나아갔다.
이 썩어빠진 세상에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백성들을 보살피는 그의 모습을 회한과 허무를 담은 눈길로 지켜보았다.
“귀관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네…. 황실을 부흥시키겠다는 의기도, 난세를 틈타 천하를 도모하겠다는 야심도 귀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귀관은 누구보다 열심히 오늘을 달려 나갈 뿐이었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세간에 동떨어진 사람처럼,
모습과 행동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난세가 뿜어내는 끔찍한 광기 속에서도 본연의 색채를 빛내던 사내에게 점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두루뭉술해진 기분이 들었네. 더러운 권모술수를 짜내던 내 뇌리에 귀관이라는 사람이 들어오게 되었지.”
귀관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면서부터,
음흉한 계략과 권모술수로 물들어가던 뇌리에 새하얀 감정이 피어나게 되었다.
당장에라도 검은색에 먹힐 것 같았음에도 새하얗게 피어난 감정은 만개를 거듭해나가며 난세로 피폐해진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 주었다.
“만약 귀관이라는 사람을 몰랐다면 나는 계략과 권모술수에 먹힌 야망의 괴물이 되어 버렸겠지. 오직 야욕과 야망을 불태우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버리고 내팽개치는 냉혈한이 되어 버렸을 걸세.”
참으로 어리석고 우둔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하지 못했던 말을,
사랑하는 상대가 혼절한 채 사경을 헤매는 처지가 되어서야 전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다면 성공적으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우둔하기 짝이 없는 계집은 사랑하는 상대가 죽어 가는 처지가 되어서야 지금까지 꾹 간직해온 마음을 전달하는 우행을 범하고 말았다.
“미안 하네, 정말… 미안 하네….”
한참 동안이나 답변 없는 말들을 쏟아 낸 흑발의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죄책감이 흘러내렸다.
여인의 뜨거운 눈물이 싸늘하게 식은 사내의 육신에 떨어졌다.
“흐윽…! 흑, 흐윽… 흑흑!”
몰아치는 파도에 모래성이 금세 허물어지는 것처럼 조조의 마음이 삽시간에 바스러졌다.
구슬픈 울음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웠다.
미처 못다 전한 마음을,
마음을 아득하게 메우는 슬픔을,
가슴을 찢어발기는 죄책감과 아련한 애통함을 눈물로 대신 표현했다.
“내가 귀관을,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내가 귀관에게 부담을 안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결코 없었을 텐데… 나는 끔찍한 재액과 비극만을 몰고 오는 저주받은 계집이니까… 귀관을 매번 상처 입힐 뿐이니까….”
통곡과 읍소는 그 뒤로 한참 동안 이어졌다.
마음을 두고 떠나려는 듯,
조조는 지금까지 품어온 따스함의 감정을 이성휘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를 짝사랑하면서 느꼈던 따스함과 환희를, 연주성의 아름다운 정경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입맞춤을 했던 기쁜 추억과 사랑스러운 경험마저도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두었다.
“나는 이제 사람의 마음을 잊으려 하네.”
두 눈을 감은 채 미약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조조가 속삭였다.
이제 괴물이 될 것이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괴물이 되고자 했다.
귀관을 이렇게 상처 입히고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모든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구덩이에 메워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귀관에게 품었던 내 마음과 소중한 추억들을 옆에 두고 떠나겠네.”
흑발의 여인이 천천히 허리를 숙이면서 침상에 누운 이성휘의 뺨에 수줍은 입맞춤했다.
그것은 작별을 뜻하는,
소중한 마음과 추억들을 둔 채 떠나겠다는, 이별을 담은 입맞춤이었다.
* * *
병실을 나온 조조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중경과 의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어떻게든 반드시 살려내라. 소생에 성공한다면 내 평생 잊지 않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중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조가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가택을 나섰다.
해가 저문 깜깜한 밤이었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횃불들이 대낮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에 칠흑의 장막이 감히 흑발의 여인을 침범하지 못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어르신, 전군 집결했습니다.”
허리에 검을 찬 무관들이 조조에게 보고했다.
선봉군이 모두 집결했다.
서주를 시산혈해의 땅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병력이 태산국에 모였다.
중원의 패자가 내린 호령에 태산국에 1만에 달하는 병력이 소집되었으며, 또한 4만에 이르는 병력이 태산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맹덕, 내가 선봉을 이끌게 해 줘.”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패국의 여걸이 착잡함에 물든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주자사 도겸은 분명 팽성에 있을 거예요. 감히 달아나지 못하도록 속전속결로 달려들어 팽성을 포위해야 해요.”
전쟁을 망설이듯 착잡함에 젖은 표정을 짓는 하후돈과는 달리, 조홍은 격앙된 표정을 지으면서 전쟁을 재촉했다.
도겸군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감히 내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으니까.
이대로 영영 이성휘가 눈을 뜨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감을 증오와 분노가 되어 조홍의 마음을 격앙시키고 있었다.
“안 된다! 멈추어라, 아만!!”
조조가 자매들을 좌우에 거느린 채 출진 명령을 내리려 했을 때,
중년남성이 아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찌 필부처럼 감정에 휩쓸려 수만 명에 육박하는 생명들을 전쟁터로 내몰려 하느냐! 당장 멈추어라!!”
감히 중원의 패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정면에서 가로막은 중년남성은 그녀의 부친인 조숭이었다.
두 팔을 크게 벌리며 가로막았다.
가려거든 내 시체를 밟고 가라는 듯한결연한 각오가 느껴졌다.
아들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낸 조숭은 격앙된 표정을 지으면서 딸을 만류했다. 천하를 거머쥐기 위한 패업(霸業)을 거듭해온 딸이 감정에 휩쓸려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것들을 내던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키십시오, 아버지.”
인간의 마음을 포기하기로 했다.
소중한 감정과 추억들은 사랑하는 남성의 옆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 누구도 복수를 위한 출진을 막을 순 없으리라.
설령 아버지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출진을 막을지라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이 제 스스로 대망과 야심을 내던지고서 파멸의 구렁텅이로 향하려 하는데, 천하에 어떤 아비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차라리 이 아비를 먼저 죽이고 가거라!!”
분개가 담긴 조숭의 꾸짖음에 조조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 외침에 하후돈과 조홍 또한 어깨를 떨면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중강.”
조조의 하명에 호위병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조숭을 제지하기 시작했다.
그에 조숭은 노쇠한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호위병들을 떨쳐 냈다. 어떻게든 딸이 파멸로 향하려는 것을 막겠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이 아비가 무릎이라도 꿇으마. 그러니 제발 스스로 길을 포기하려 하지 말거라!”
호위병들에게 두 팔이 붙잡힌 조숭이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애처롭게 빌었다.
절대로 외도(外道)에 빠져선 안 된다.
시체들로 산을 쌓아 천하를 거머쥔들,
그렇게 거머쥔 천하가 몇 년이나 가겠는가?
복수는 결국 복수를 반복할 뿐. 복수의 연쇄에 빠지는 순간, 천하를 향한 대업과 야망은 한낱 일장춘몽이 되어 바람 앞에 사라지게 되리라.
“서주는 제 전부였던 사람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니 저 또한 놈들에게서 전부를 앗아갈 겁니다.”
잠시 망설이듯 발걸음을 멈춰 선 조조는 호위병들에게 붙잡힌 부친을 지나쳤다.
애달픈 부르짖음이 들렸으나,
인간의 길을 포기한 흑발의 여인은 대학살의 길로 나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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