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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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와 예주를 차례대로 제패하면서 중원의 패자라 불리게 된 사공(司空) 조조, 그녀의 부친인 조숭은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에 머물고 있었다.
서주는 매우 평화로운 곳이었다.
여러 전란들에 휩싸여 풍비박산이 난 다른 주군(州郡)들과는 달리 서주 지역은 서주자사 도겸의 활약으로 평화와 안정을 맞이했다.
그래서 조숭은 패국조씨 가문의 일가친척들과 함께 낭야국으로 피신한 채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아버지!!”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리는 나루터.
낚싯대를 드리운 채 삿갓을 쓰고 있던 중년남성을 향해 건장한 남성이 달려왔다.
중년남성이 아버지였는지,
씩씩함이 넘쳐나는 아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누님께서 연주에 이어…, 마침내 예주까지 제패하셨다고 합니다!”
조숭의 아들이며 조조의 친동생인 조덕이 함박웃음을 터트리면서 외쳤다.
누이의 활약이 기뻤는지,
조덕은 자기 일처럼 크게 기뻐해주었다.
연주에서 무려 백만에 달하던 황건적 무리들을 격파한 이후, 만고의 역신을 척결하기 위해 관동의 제후들을 이끌었던 누이가 마침내 예주까지 점령하면서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만의 기세가 실로 매섭구나.”
삿갓을 눌러쓴 조숭이 클클 웃음을 터트리면서 수면 위에 동동 떠 있는 찌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에는 부단히도 속을 썩이던 아이가 마침내 대성하여 중원의 패자라고 불리는 군벌이 되다니.”
옛날 생각이 떠오른 걸까. 삿갓을 눌러쓴 중년남성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중얼거렸다.
오래전에 부인을 사별한 이후,
딸을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하면서 키워온 그였기에 딸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을 걸을까 노심초사하며 걱정했던 것이 한낱 기우로 느껴질 정도로 딸은 매우 훌륭하게 자기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아버님, 한시라도 빨리 누님에게 가시죠! 분명 연주성에서 우리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조덕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누이를 가장 존경해온 동생답게,
중원 지역들을 차례대로 제패했다는 누이의 소식을 듣자마자 부친에게 연주로 갈 것을 주청했다.
서주 낭야국으로 피신을 온 것은 중원 지역이 매우 위태로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누이께서 중원을 제패하셨으니 더 이상 낭야국에 머무르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뭐가 바쁘다고 그리 서두르느냐. 머지 않아 네 누이가 사자를 보내올 게다.”
“무, 물론 그렇습니다만….”
태연자약한 부친의 모습에 조덕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누이의 낭보에 크게 기뻐하는 자신과는 달리 아버지는 매우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중원을 제패하는 대군벌이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누이가 그리 보고 싶으냐?”
“아,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왜 아니겠느냐.”
아들 조덕의 말에 조숭이 인자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딸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까.
입질이 없는 낚싯대를 무려 반나절 동안 공허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고기 따위야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는 일이지만 딸의 소식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드물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로 가면 원양 누님과 묘재 형님도… 자렴 누님과 자효 누님까지 모두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저도 패국조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이의 대업에 두 팔 걷어붙이고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섰던 누이를 대신하여 가문과 일가친척을 책임졌던 조덕은 누이의 대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야심을 예전부터 품어오고 있었는지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분명 누이에게 높은 벼슬을 받을 터.
누이를 돕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누이의 이름과 위광을 빌려 고관대작이 되고 싶다는 마음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싶으냐.”
아들의 속셈을 헤아린 듯 조숭이 물었다.
그에 조덕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서는 옛적에 대사농(大司農)과 대홍려(大鴻臚) 등의 관직들을 역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아들인 제가 벼슬길이 오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하잖습니까.”
“다 부질없는 허영이다.”
“태위(太尉)께서 역임하신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혈기 왕성한 사내 아니랄까 봐 벼슬과 출세에 욕심을 내는 아들의 모습에 조숭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사내가 출세를 마다 할까.
아들의 야심은 실로 당연한 욕망이었다.
자신도 젊을 적에는 출세가도를 위해 막대한 뇌물들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황실과 조정에 바칠 정도로 야심에 불타지 않았는가.
“네 누이가 머지 않아 사자를 보내올 게다. 일단 그때를 대비하여 가산들을 모두 처분하고 낭야국을 떠날 준비를 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누이가 사람을 보내오면 당장 떠날 수 있도록 가산을 처분하고 이주할 준비를 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조덕이 화색을 띄면서 대답했다.
이제 곧 누이가 소식을 보내올 터.
금의환향을 받으면서 연주성에 입성하게 될 것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승낙이나 다름없는 대답을 들은 조덕은 막대한 가산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도록 수레들부터 마련하기로 했다. 낭야국으로 이주할 때 옮긴 패국조씨 가문의 가산들이 많았으므로 아마 가산을 옮길 수레가 100대 이상은 필요할 것이었다.
* * *
과연 소식이 낭야국에 도착했을까.
아버지에게 보낼 서한을 작성하기 위해 붓을 들어 올린 흑발의 여인이 도톰한 입술을 툭툭 건드리면서 중얼거렸다.
발 빠른 전령을 낭야국에 보냈다.
분명 예주를 제패했다는 소식이 낭야국에 있는 아버지의 귀까지 전해졌을 터. 매번 무심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딸의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아버지라면 전령의 낭보를 듣고 크게 기뻐하리라.
“따, 딸에게… 연모하는 사내가 생겼습니다…. 아아악!!”
붓을 덜덜 떨면서 서한을 작성하려던 흑발의 여인이 돌연 괴성을 내질렀다.
몹시 부끄러웠는지,
마음에 둔 정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리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버지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아버지에게 입을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주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에서 들린 비명 소리에 놀란 허저가 문 너머로 조조에게 물었다.
그에 조조가 대답했다.
“아, 아무 일도 없다…!”
“그렇습니까.”
부끄러움에 빠진 조조가 비명 소리를 내지르는 것에 익숙했는지 허저가 무덤덤하게 대답하면서 물러났다.
허저 뿐만 아니라,
다른 호위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치기 소년처럼 호위병들을 기만하듯이 소리를 빽빽 내지르는 조조의 행동이 위태로울 따름이었다. 만약 자객들이 들이닥쳤을 때 비명을 질러도 호위병들이 무덤덤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서로 입맞춤하고 고백까지 나눴으니 이제는 완전히 연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부관이 아무에게나 고백하고 사랑을 속삭일 정도로 가벼운 성품은 결코 아니니까! 그, 그렇다는 말은 즉… 이 조맹덕이 바로 중원제일 검의 연인이라는…!!’
중원제일 검의 연인.
흑발의 여인이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지르면서 방구석을 뒹굴었다.
망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히죽히죽 웃으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낭야국으로 보낼 서한을 적다말고 남자 생각에 꺅꺅 비명을 내지르는 딸의 모습을 조숭이 직접 본다면 ‘이래서 딸 키워 봤자 아무 소용없다더니….’라고 중얼거리면서 한탄을 토해낼 것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허저가 물러난 뒤,
부군사 순욱이 조조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조조가 출입을 허락하자,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상아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리따운 여인이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께서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는가?”
순욱의 말에 조조는 큼큼 헛기침하면서 얼굴에 만연했던 미소를 지웠다.
사촌도 아닌 부하에게,
실실 웃음이나 짓는 헤픈 모습을 보일 순 없었으니까.
가까스로 들뜬 기분을 정리한 흑발의 여인은 순욱에게 용무를 물었다. 그에 순욱이 대답했다.
“예주 전선에서 도착한 소식입니다. 서주와 경계를 마주하는 진국(陳國)과 노국(魯國)에서 도겸군의 군사행동이 감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도겸…. 서주자사 도겸을 말하는 것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꽤 성가신 적이지.”
조조는 서주자사 도겸을 매우 성가신 적수로 분류하고 있었다.
서주는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가 많았다.
또한 용맹한 장졸들을 휘하에 두고 있으며,
서주의 사대부와 호족들로부터 굳건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조조로서도 도겸군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적수였다.
“낭야국에 계신 부친을 최대한 빨리 연주성으로 모실 생각이다.”
훗날 도겸군과는 적대관계가 될 터.
아직은 충돌과 대립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세력권을 계속 확대하다 보면 언젠가 부딪치게 되겠지.
아버지께서 인질로 잡힐 위험이 있다.
그래서 조조는 낭야국으로 피신했던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을 모두 연주로 불러들이려 했다. 이미 그 준비가 착수되고 있었다.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도겸은 사납고 광포한 성정이며, 또한 그 휘하의 무리들 또한 예를 모르는 족속이라고 들었습니다. 최대한 서두르십시오.”
“알겠네. 부군사의 말에 따르지.”
부군사 순욱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조조는 예상했던 시일보다 빨리 아버지와 일기친척들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순욱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런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도겸이 사나운 성정이라도 평양정후(平陽靜侯)의 후손인 패국조씨 가문을 섣불리 건들지는 못할 터. 게다가 아버지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의 벼슬을 관장했던 고관대작 출신이다. 제 인망과 명예에 집착하는 도겸이라면 아버지를 후하게 대접했으면 했지, 결코 위해를 가할 리는 없겠지.’
서주의 효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도겸이 조정에서 은퇴한 늙은이를 인질로 잡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직감이 좋지 않았던 조조는 부군사 순욱의 진언에 따라 낭야국에 계신 아버지를 서둘러 데려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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