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조군으로 천하통일까지-180화 (180/616)

180화

============================

군사 순유의 활약으로 영천군과 여남군 일대의 사대부와 호족들을 다수 포섭할 수 있었다.

실로 큰 성과였다.

덕분에 조조 군은 토착세력의 반발을 최대한 억누를 수 있었다.

여전히 여남원씨 가문을 추종하는 세력이 남아 있었지만 순유의 설득과 양성 전투의 승패로 여남군의 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이 조조군으로 전향하게 되면서 예주 지역을 지배권에 넣을 수 있었다.

“수고 많았다.”

“별말씀을요. 이 정도는 간단해요.”

이성휘의 감사에 순유가 두 어깨를 으쓱이면서 발랄한 미소를 지었다.

“큭…! 대, 대체 저 여자는 어디서 불쑥 나타나서는 소첩의 원대한 꿈과 목표를 방해하는 것이옵니까…!!”

이성휘와 순유,

두 선남선녀가 단란하게 치소를 나서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분하다는 듯 침음을 삼키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연적의 등장을 본 여인처럼,

음란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물씬 품고 있던 미인은 감히 주군의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치면서 방긋 웃고 있는 여인을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보았다.

‘영예로우신 나의 주군을 배신과 모략을 일삼는 폭군으로 만들어 어지러운 난세를 통일하겠다는 소첩의 원대한 꿈이 무너지겠사옵니다!’

영천순씨 가문의 여식.

조조를 측근에서 섬기는 부군사 순욱의 조카.

변방 출신이라는 점과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결점이라고 생각하는가후였기에 예주에서 손꼽히는 사대부에서 태어난 황문시랑 순유가 더욱 밉게만 보였다.

내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예주 지역에서 호령하던 사대부와 호족들의 설득에 성공한 순유의 활약은 가후가 자기 입지에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이익!”

영예로우신 주군의 옆에 찰싹 들러붙어 수다를 재잘재잘 늘어놓는 순유의 모습에 가후는 손톱을 꾹 깨물면서 분함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저 옆은 오직 이 가문화의 것이거늘…!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멩이따위가 나를 제낀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가 군사로 발탁되자마자 큰 활약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중원제일 검의 참모장이라는 지위를 빼앗길 순 없었다.

“영예로우신 주군!”

몰래 지켜보면서 시기와 질투를 불태우던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디면서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푹 빠진 것만 같은 영예로우신 주군에게 다가섰다.

이대로 나의 주군을 빼앗길 순 없다.

2년 동안 지켜보기만 한 누구와는 달리,

가후는 과감하게 현장에 개입하는 것을 선택했다.

“소첩을 부르셨사옵니까!”

“……?”

돌연 모습을 드러내더니 자신을 호명했냐는 가후의 말에 이성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훼방을 놓으려는 것처럼 순유와 담소를 나누던 이성휘에게 다가온 가후는 영예로우신 주군의 옆을 단번에 낚아채버렸다.

“불현듯 떠오른 방책을 영예로우신 주군께 직접 말씀드리고자 왔사옵니다.”

방책을 모색했다는 가후의 호언에 관심이 생겼는지 이성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됐다.

영예로우신 주군의 관심과 흥미를 저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로부터 떨어트렸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이성휘에게 관심을 받아 낸 가후는 의기양양한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회심의 표정을 지었다.

“방책이라. 그래서 방책이 뭐지?”

“…….”

이성휘의 물음에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망부석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방책(方策).

방책이 있을 리 없었다.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를 제치기 위해 본능적으로 지껄였을 뿐, 가후는 무대포처럼 억지로 개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이 무도군의 가문화, 숨 쉬는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꾀와 모략을 짜낼 수 있는 여자이옵니다…!’

이성휘의 물음에 가후는 머리를 최대한으로 빠르게 굴리면서 꾀와 모략을 강구했다.

급조하였음에도 티가 나지 않고,

주군의 만족과 기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꾀와 모략이 필요했다.

중원제일 검의 꾀주머니를 자청하는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방긋 웃는 표정을 한 채 음험하고 교활한 술책들을 서책 넘기듯이 만들어냈다.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예주 경계를 넘었던 원술군을 크게 완파하였으니 더 이상 주변에 영예로우신 주군의 적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옵니다.”

먼저 운을 뗀 뒤,

가후가 말을 이어 나갔다.

“본군을 영천군과 여남군의 수비에, 병주 기병대와 보병군단을 진국(陳國)과 노국(魯國) 방면에 주둔하여 도겸군을 방비하옵시고 영예로우신 주군께서는 별동대를 직접 이끄시어 사예주를 떨어트리시옵소서.”

예주의 치안과 방비를 튼튼하게 한 뒤,

정예병으로 편성된 소수의 별동대로 형양(滎陽) 지역을 점령할 것을 진언했다.

조조군으로 전향한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으므로 군사행동에 자유로웠다. 또한 양성 전투의 패배로 원술군은 사실상 침묵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거침없이 군세를 움직일 수 있었다.

“좋은 방책이군.”

“후후, 당연하옵니다.”

영예로우신 주군의 칭찬에 가후는 금세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새침한 웃음과 함께 순유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들은 주군의 칭찬 따위,

나는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설마 공달과 같은 방책을 내놓을 줄이야.”

“…예?”

이성휘의 뒤이은 말에,

가후는 선 채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영예로우신 주군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서 한껏 들뜨게 된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순둥이 아가씨가 자신과 같은 방책을 꺼냈다는 사실에 가후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여, 영예로우신 주군…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공달 또한 형양을 취할 것을 진언했다.”

이성휘의 말에 도토리를 까먹는 다람쥐처럼 귀여운 인상을 가진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비록 낙양이 동탁에 의해 흔적도 없이 전소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어요.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낙양을 뒤로한 채 의지할 곳을 잃은 사예주 백성들을 거둔다면 필시 큰 힘이 될 거예요.”

사예주 백성들은 낙양을 불태우고 헌신짝처럼 관중을 버리고 떠난 동탁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형양을 점거한다면 하내군(河內郡), 하동군(河東郡), 홍농군(洪農郡)까지 연이어 귀순을 요청해 올 터. 동탁을 적대시하는 군현들을 단번에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사예주 군현들을 모두 취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결정이겠지만, 후일을 대비하여 미리 형양을 취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형양을 교두보로 사예주 일대에 조조 군의 영향력을 강하게 남기는 거죠. 게다가…, 동탁을 벌벌 떨게 하였던 중원제일 검의 용맹한 명성은 사예주에서 절대적이니까요.”

형양 점령은 후일을 위한 포석,

천하의 모든 제후들을 호령하게 될지배자가 사공 조조임을 알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동탁은 패자가 되어 몰락하고,

이제 조조가 천하를 거머쥐는 군웅이 될 것을 만천하에 알려야 했다.

“분명 연주에 계신 주군께서는 연주와 예주에서 세력을 규합한 뒤에 관서로 달아난 동탁을 도모하실 거예요. 이는 그것을 위한 포석입니다.”

동탁을 척결하여 힘의 균형을 완전히 끌어들이려는 조조의 속셈을 헤아린 것처럼 순유가 확고한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가후는,

속으로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신산귀모(神算鬼謀)가 제법이다. 과연 영예로우신 주군께서 직접 군사로 발탁한 인재다웠다.

‘허나 이 가문화는 절대로 패배를 시인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한 발자국을 물러선 것일 뿐, 중원제일 검의 참모에 가장 적합한 책략가는 소녀 밖에 없사옵니다!’

가후는 애써 분함을 참으면서 심중의 불쾌감을 내색하지 않았다.

분함을 씹고 또 곱씹으면서,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언젠가 자기 우수한 일가견을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둥이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아가씨에게 제대로 당한 가후가 이성휘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취하면서 물러났다.

그녀의 뒷모습과 음란하게 흔들리는 엉덩이를 바라보던 순유는 옆에 선 이성휘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아… 진짜 당장에라도 따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우신 분이네요.”

“…….”

명망 높은 사대부의 여식이 꺼낸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박했다.

성희롱이 일상인 중년 아저씨처럼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물러가는 가후의 뒷모습을 음심에 젖은 눈길로 지켜보는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

그녀의 모습에 이성휘는 그만할 말을 잃고 말았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