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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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에 육박하는 군세를 이끌고 남양군에서 출진했던 기장(騎將) 기령이 대패를 하고 돌아왔다.
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여포와 장료로부터 집요한 추격을 받게 된 기령은 불과 5천도 안 되는 패잔병만을 이끌고 귀환했다.
실로 처참한 대패였다. 남양군으로 다시 돌아온 병력은 겨우 5천. 돌아오지 못한 나머지 병력들은 전장에서 낙오되거나 조조 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리라.
“이, 이 머저리 같은 놈들!!”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곱슬머리의 귀공자가 격노를 토해내면서 소리쳤다.
아까운 병력들을 죄다 잃고 돌아왔다.
원술은 지휘봉인 등책(籐策)을 휘두르면서 꼴사나운 모습을 한 채 겨우 살아서 돌아온 기령과 휘하 장수들을 크게 힐문했다.
무려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대업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할 장졸들이 단기결전에서 전멸을 당하게 된 것이다.
원술이 군세를 이끌고 출진했던 기령과 휘하 장수들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것은 당연했다.
“용맹한 장졸들을 죄다 말아먹고 돌아온 놈들이 감히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섰느냐!!”
등책을 휘두르면서 기령과 휘하 장수들의 등과 어깨를 가격했다.
마치 몽둥이처럼 등책을 휘두르며,
3만의 병력들을 죄다 잃고 돌아온 무능한 장수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 냈다.
아까운 병력들을 잃은 것은 물론, 여남원씨 가문의 영향력이 뿌리처럼 깊게 박혀 있는 예주의 패권마저도 잃고 말았다. 원술이 기령과 휘하 장수들을 노려보면서 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주, 죽여주십시오…!”
“죽여주시옵소서, 주군!”
원술에게 무릎을 꿇은 기령과 휘하 장수들이 차디찬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외쳤다.
대부분의 병력들을 잃었다.
출진했던 장수가 어찌 변명할 수 있겠는가.
기령은 지엄한 군율에 따라 자신을 일벌백계로 다스려달라고 읍소했다. 그에 원술은 여남원씨 가문의 보검을 뽑아 들어 패장들을 참하려 했으나, 좌우에 시립하고 있던 참모들의 만류로 끝내 살의를 거둬야 했다.
“조맹덕, 이 빌어먹을 환관 년…! 감히 환관의 핏줄 따위가 여남원씨 가문의 적손인 내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흑발의 여인을 떠올린 원술이 이를 빠득 갈았다.
내게 비웃음을 보내고 있으리라.
분명 그 빌어먹을 환관 년은 승전보를 듣고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시기와 증오가 치밀어올랐다.
환관 년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예주에서 3만의 병력을 모두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얼녀 년의 모습을 떠올리자 끔찍한 굴욕감이 밀려들었다.
“당장 손문대를 소환해라! 강동의 호랑이를 이끌고 환관 년을 쓸어 버리겠다!!”
현재 손견은 양양군(襄陽郡)에서 형주 호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형성하는 형주자사 유표를 대적하고 있었다.
원술은 손견군을 남양군으로 소환한 뒤,
직접 5만의 군세를 이끌고 여남군과 영천군을 탈환하겠다며 분노를 삭였다.
“안 됩니다, 주군!”
그때 주부(主簿) 염상이 나서며 반대했다.
한순간의 혈기와 치기를 이기지 못해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원술을 향해 염상은 단호한목소리로 반대표를 던졌다.
“주군께서는 예주보다 형주를 먼저 도모하셔야 합니다!”
형주 정벌에 나선 손견을 돌아오게 해선 안 된다.
양양군에 세력을 둔 유표는 힘이 약한 상태,
지금 유표와 그 무리들을 뿌리 뽑지 않으면 언젠가 큰 화근이 될 터였다.
유표가 양양군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게 된다면 형주를 얻을 기회는 요원해질 터. 형주 지역을 거점으로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유표 토벌에 최대한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
“그럼 예주를 포기하자는 말인가!”
원술이 손에 들고 있던 등책을 염상을 향해 겨누면서 위협하듯 말했다.
그에 염상은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남원씨 가문을 따르는 호족들은 결코 조조의 꾐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수십 년 동안, 무려 4대에 걸쳐 여남원씨 가문에 봉행해온 예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이 어찌 주군에게서 등을 돌리겠습니까!”
여남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대부와 호족들은 원술과 원소의 숙부인 원외를 충직하게 따르던 심복이다.
그들은 현혹에 넘어갈 위인들이 아니다.
염상은 설령 조조군이 여남군으로 군세를 보낼지라도 결코 그들은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냈다.
“형님, 제가 은밀하게 여남군으로 내려가 사대부와 호족들의 마음을 다잡겠습니다.”
원술의 종제(從弟) 원윤이 말했다.
양성 전투의 패배로 사대부와 호족들이 큰 혼란을 느끼고 있을 터.
원윤은 자신이 직접 여남군으로 내려가 그들을 다독이겠노라고 자청했다.
“크흠!”
예주보다 먼저 형주를 차지해야 한다.
주부 염상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원술은 헛기침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손견이 정벌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터.
머지 않아 강동의 호랑이는 황족 나부랭이의 수급을 가져올 것이었다.
그때까지 잠시 기다려도 늦지 않는다. 여남군의 사대부와 호족들은 결코 조조따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남군의 사대부와 호족들이 내부를, 그리고 내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외부를 공격한다면 환관 년에게 빼앗겼던 예주를 능히 탈환할 수 있을 터!’
예주를 빼앗긴 게 아니다.
잠시 조조 년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든 예주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원술은 실낱같은 자신감을 느끼는 한편, 군법에 따라 처결해 달라며 무릎을 꿇고 있던 기령과 휘하 장수들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이 쓸모없는 것들!!”
손에 쥐고 있던 등책을 바닥에 힘껏 내던진 원술은 씩씩대면서 패장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죽일 가치도 없는 놈들!
꼴사나운 패잔병의 모습을 한 장수들의 모습에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만약 염상과 원윤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겠지. 원술은 노기에 찬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군사회의를 끝내버렸다.
* * *
양성 전투에서 3만의 원술군을 크게 대파한 조조 군은 사기가 분기충천한 상태였다.
예주를 도모하려던 잔적들을 쫓아냈다.
절반이 넘는 병력을 무찌르고 다수의 포로들을 잡은 이성휘는 전투의 승리를 이용하여 예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조군이 양성에서 호쾌한 대승을 거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순유가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하기 더욱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수고 많았다.”
연주성의 조조에게 보낼 장계를 작성하던 이성휘가 여포와 장료에게 말했다.
그에 여포는 우쭐대는 모습을,
장료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동탁과 함께 천하의 패권을 두고 용쟁호투를 치렀던 병주군다운 활약이었다. 3만의 군세를 단번에 고꾸라뜨렸던 병주군의 용력과 용맹은 찬사를 몇 번이나 해도 부족할 정도로 대단했다.
“뭐, 당연히 그깟 녀석들이야 우리 병주 군세에 걸리면 곧바로 끝장이지! 너무 시시하게 끝나버려서 싸울 맛이 안 나던데.”
금발의 여인이 오만에 물든 미소와 함께 가슴을 내밀면서 힘껏 승자의 여유를 드러냈다.
출렁출렁 흔들리는 젖가슴,
승리의 기쁨에 빠진 여포가 몸을 흔들 때마다 거대한 폭유가 유혹하듯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당사자는 전혀 노린 바가 아닌 듯했지만 커다란 젖가슴은 음란하게 출렁이면서 남성들을 시련에 빠트리고 있었다.
“역시 봉선 님이세요. 저도 배워야겠는걸요?”
“흥흥, 뭘 그렇게까지야….”
승전을 보고하는 상황에서도 중원제일 검을 유혹하다니. 장료는 가슴을 음란하게 흔들어대는 여포를 향해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반면 여포는 장료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채지 못했는지 가슴을 내민 채 으스댈 뿐이었다.
“아군은 영천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여남군 또한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예주를 호시탐탐 노리는 무리가 생겨날 테고.”
이성휘가 조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에 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주와 경계를 마주하는 진국(陳國)과 노국(魯國)에서 도겸군의 척후들이 줄곧 목격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어림총사.”
도겸군이 예주 방면에 계속 척후들을 보내고 있다.
조인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이성휘는 예주를 삼키는 무리가 원술군만이 아니라는 것을 여포와 장료에게 전했다.
서쪽의 원술군과 동쪽의 도겸군.
그들로부터 동시에 노려지게 된다면 간신히 손아귀에 넣은 예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또한 원술은 흑산적과 남흉노와도 연합을 맺고 있었으므로 이성휘는 북쪽 방면까지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크게 대패를 당했으니 원술은 수개월 동안은 군세를 일으키지 못할 거다.”
서주의 도겸군이 새로운 경계대상이 되었다.
도겸은 야심이 많은 군웅,
필시 군세를 일으켜서 연주와 예주를 도모하려 들 것이었다.
또한 도겸의 휘하에는 뛰어난 용맹으로 수많은 공훈들을 세운 단양군(丹楊軍)이 있었으므로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도겸…. 도겸이라….’
도겸군의 척후들이 서주 지역과 인접하는 군현에서 계속 포착되었다는 조인의 보고를 들은 이후부터 이성휘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후 벌어지게 될 끔찍하고 처참한 ‘참변’을.
어찌 그를 모를 수 있겠는가. 삼국지를 단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중원 최대의 살육극이었으니까.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백성들의 시체로 산을 뒤덮고 강을 메우게 될 최악의 대참사.
이성휘는 비극의 날이 머지 않았음에,
자신이 직접 서주로 가서 그들을 구하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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