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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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유는 영천군의 영천순씨 가문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성휘를 먼저 만나려고 했다.
천하를 요동치게 만든 중원제일 검.
웅장한 명성과 위대한 무명을 떨쳤던 중원제일 검이 과연 어떻게 생긴 사내인지를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핍박하고 낙양을 불태웠던 만고의 역신이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용장. 13주를 대표하는 용장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싶었다.
‘흠…, 우악스럽게 생긴 남정네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 잘생긴 얼굴이네요…. 분명 지금까지 수많은 처녀들을 침대로 유혹한 다음에 순결한 자궁에 첫 도장을 찍었을 거예요.’
흉신악살처럼 온몸에 피칠갑한 이성휘의 모습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순유는 흥미 가득한 눈길로 이성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기 관점으로 이성휘를 평가하며,
그를 ‘지금까지 여러 처녀들을 따먹었을 게 분명한 인기남.’이라고 지칭했다.
“황문시랑 순유… 순공달이 맞나?”
“네, 감읍하게도 고모님께서 제 이야기를 중원제일 검에게 해준 모양이네요.”
순유의 말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유.
어찌 그녀를 모를 수 있겠는가.
수많은 전장에서 조조를 항상 보필하면서 여러 군공을 쌓은 참모가 아닌가. 절세의 군략과 병법을 겸비한 순유는 결코 놓쳐선 안 될 인재였다.
그래서 이성휘는 어떻게든 순유를 포섭하려 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분명 장안성에 있을 줄 알았는데.”
“거사를 꾀하다가 쫓기는 몸이 되었거든요.”
이성휘의 물음에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쓴웃음을 머금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거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함께 의기상투했던 동지들이 붙잡히고 말았다.
동탁을 척살하고 동탁 군의 주구들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백파적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는 순유의 말에 이성휘는 침음을 흘렸다.
‘꽤 괄괄한 성정이군. 대담하게 백파적과 결탁하여 동탁 암살을 주도할 줄이야.’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곱고 아름다운 용모와는 달리 순유는 매우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비록 거사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가슴속에 품은 정의로운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동탁 군의 추격대를 따돌리고 예주까지 온 순유에게 감탄을 느꼈다.
“황문시랑 순유, 군사로 임관해주지 않겠나?”
동탁 암살을 모의했던 충의지사에게 이성휘는 거두절미하고 군사로 들어올 것을 부탁했다.
황문시랑 순유,
예주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영천순씨 가문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순유는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예주의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들을 받았기에 사대부와 호족들 또한 그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들어 줄 터였다.
“저를… 군사로요…?”
돌발스럽게 꺼낸 이성휘의 요청에 순유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코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명 높은 중원제일 검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휘하에 들어오라는 요청을 받게 되리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 곧바로 군사(軍師)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받게 될 줄은 몰랐기에 순유는 얼떨떨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등을 돌린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순유, 네 도움이 필요하다.”
“음…. 그렇게 된 일이군요.”
순유는 조조군이 당면하게 된 어려움을 단번에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예주 사대부와 호족들은 완고하기로 유명하다.
관료 출신들이 많았으며,
또한 재야에 은 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학인들도 많았다.
선비와 유자들은 창검만으로는 결코 설득할 수 없다.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문의 이익과 가문의 안위가 아닌, 치국안민(治國安民)을 위한 대의와 올바름이었다.
‘고모님께서 계셨다면 능히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고모님께선 현재 연주에 계신 것 같네요.’
순유가 빙긋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중원제일 검에게 반가운 제의를 받았다.
천하에 무명을 떨친 인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자신에게 군사를 제의해준 고마운 은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높게 평가해준 점은 감읍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사에 실패하고 수많은 동지들을 잃은 주제에 뻔뻔하게 몸을 부지하는 몸이예요. 과연 저따위가 중원제일 검의 기대를 만족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네요.”
물론 ‘다른 쪽’으로는 중원제일 검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음탕한 농담을 애써 삼키면서,
순유는 군사 제의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한 번 실패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
이성휘의 말에 순유는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직 살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다.
자포자기하며 무너지기엔 이르다. 고향 영천군에서 다시 책모를 기르고 지략을 모으면서 하늘이 다시 기회를 내려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동탁에게 살해당한 수많은 동지들과,
또한 동탁의 폭정과 전횡에 죽어 간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끝내 대의를 포기하겠다면 내 제의를 거절해도 좋다.”
“죄송해요, 잠시 마음이 약해졌었나 보네요.”
무거운 결연함이 담긴 이성휘의 말에 순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끔찍하게 살해당한 동지들.
날카로운 병장기를 든 추격대가 사나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은 고결한 대의를 더럽힐 정도로 무자비하고 끔찍했다. 장안성에서 구사일생 끝에 도망쳐 온 순유는 중원제일 검 앞에서 감히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 자기 실책에 인상을 찡그렸다.
“좋아요, 군사로서 도움이 되어드릴게요.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녹색 문사복을 입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황문시랑의 직위를 잠시 내려놓은 뒤,
조조 군에 합류하여 군사로서 모든 지모를 바치겠음을 맹세했다.
연주 지역을 제패한 조조군이 예주 지역까지 장악하게 된다면 중원 최강의 세력이 될 터. 연주와 예주를 기반으로 부국강병을 수년 동안 이어 나간다면 동탁 군에 맞설 수 있을 것이었다.
순유는 고모 순욱이 그러하였듯,
천하를 제패하여 난세를 평정할 수 있는 세력은 조조군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잘 부탁할게요, 중원제일 검.”
“어림총사다. 그 별칭은 너무 부담스러워.”
“후후, 그런가요?”
그럼 중원제일 검이라고 불러야겠다,
순유는 귀엽게 혀를 내밀면서 소 악마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아앗…!”
순유의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부자연스러운 발걸음과 함께,
발목을 접질린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발걸음을 휘청거리면서 움직이다가 탁상 위에 걸터앉게 된 순유의 모습을 본 이성휘는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었는지 군막 안에 보관하고 있던 작은 단지를 꺼냈다.
“발을 다친 모양이다. 여린 두 발로 강행군을 계속했으니 발이 다치는 건 당연하지.”
금창약(金瘡藥) 중에서도 성약(聖藥)이라 불리는 옥령산(玉靈散)이 작은 단지 안에 들어 있었다.
초선이 선물해준 약으로,
낙양 황궁에서 쓰던 금창약이라고 했다.
옥령산을 탁상 위에 올린 이성휘는 두 팔을 뻗으면서 순유의 다리를 만졌다. 외간 남자에게 다리를 만져지는 게 부끄러웠는지 순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집도 안 간 처자의 발을 스스럼없이 만지시다니요. 이러면 중원제일 검에게 시집을 갈 수밖에 없겠는데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자기 다리를 만지고 있는 이성휘를 바라보던 순유는 긴장감을 애써 숨기려고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그에 이성휘는 작게 중얼거리며,
순유의 신발을 벗긴 뒤에 발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각하군.”
아니나 다를까,
순유의 두 발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상태였다.
물집이 군데군데 생긴 것은 물론, 피딱지까지 발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을 새하얀 발이 흉측하게 망가진 것을 보게 되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리 상처를 치료했어야지.”
“빈털터리라서 약방에도 갈 수 없었는걸요.”
그녀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이성휘는 흉터투성이의 발에 옥령산을 듬뿍 바르기 시작했다.
고약이 상당히 차가웠는지,
차갑게 달라붙는 촉감이 발을 감싸자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다리를 움찔 떨었다.
그런데도 이성휘는 다리를 단단히 움켜잡은 채 옥령산을 바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처와 흉터들로 가득한 발을 옥령산으로 뒤덮은 뒤, 그 위에 붕대를 단단히 감으면서 치료를 끝냈다.
“능숙하시네요?”
“상처를 입을 때마다 의원이 옆에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내 스스로 상처를 치료해야 할 때가 많았지.”
“저는 처녀의 발목을 짐승처럼 낚아채시는 중원제일 검의 손길을 말한 건데요?”
“…….”
말싸움을 해봤자,
불리해지는 것은 내가 되겠지.
이성휘는 고양이처럼 짓궂은 눈웃음을 짓는 순유의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순유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지나칠 정도로 무뚝뚝 하고 정직한 이성휘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진 듯했다.
“끈적끈적한 진액을 시집도 안 간 처녀의 몸에 바르시다니요, 이 사실에 알려지면 전 시집을 못 가게 될지도 몰라요….”
“내 알 바 아니다.”
순유의 연이은 장난에 이성휘는 무뚝뚝한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매우 꼼꼼하게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두 발을 붕대로 감싼 뒤,
그녀가 쉴 수 있도록 번쩍 안아 들어 의자에 옮겨 주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외간 사내에게 안기게 된 순유는 의아함에 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온몸이 탄탄한 근육질인 이성휘의 몸을 두 팔로 생생하게 경험했다.
“여기서 잠시 쉬어라. 나는 나갈 테니. 최대한 발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치료를 끝낸 이성휘가 등을 돌렸다.
그때,
등을 보인 이성휘를 향해 순유가 물음을 보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그래.”
사내의 품에 안긴 다음에 의자에 앉게 된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대체 무엇을 물어보려는 걸까.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를 보건대 정성스럽게 치료해준 감사함을 전하려는 듯했다.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면서 부끄러움에 젖은 모습을 보이던 순유는 용기를 내기로 했는지 이성휘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혹시 자지 커요?”
“…씨발.”
삼국지 세계관에 떨어지고 2년하고도 10개월째.
이성휘는 처음으로 상스러운 욕설을 입에 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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