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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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이성휘는 가까운 곳에서 조홍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 평동장군(平東將軍)에 임명된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서일까, 조홍은 들뜬 기대감을 품으면서 이성휘에게 넌지시 눈길을 보냈다.
“맹덕 님에게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네?”
돌연 이성휘가 꺼낸 말에 조홍은 의문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고? 평생 시일을 끌면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질 것만 같았던 관계가 드디어 이뤄졌단 말인가.
흑발의 여인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언니는 뭐라고 했는데요…?”
알고 있다.
언니가 고백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경애하는 언니 또한 어림총사를 깊이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조홍은 숙연함이 깃든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성휘의 말을 기다렸다.
“맹덕 님은 고백받아들여주셨습니다.”
“…그런가요. 그렇겠죠. 언니께서 어림총사를 남몰래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어림총사는… 나만의 남자가 아니구나.
마치 오랫동안 행복을 만끽하게 해줬던 꿈이 일장춘몽으로 끝난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실로 행복한 꿈이었다.
천하제일의 남자와 언제까지나 사랑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덧없는 꿈. 그 꿈의 종막이 드리운 듯했다.
“그럼 이제 우리들 관계는 끝이네요.”
조홍이 말했다.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면서,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일 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조홍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슬픔에 젖어 있었다.
“자, 잘된 일이예요…. 언제까지 언니에게 비밀로 한 채 이어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언니에게 만약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저는 물론, 어림총사도 불화를 피할 순 없을 테니까….”
나는 도중에 끼어든 사람이 지나지 않았다.
언니가 그를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애욕과 정욕에 못 이겨 언니가 사랑하는 남자를 낚아채버렸다.
자기 어리석은 행동에 슬픔과 회한을 느낀 조홍은 경애하는 언니와 사랑하는 어림총사의 행복한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그를 향한 사랑 어린 집착을 접기로 했다.
“자렴 님.”
이제 그만 관계를 청산하자.
지금까지의 관계를 끝내도록 하자.
실연의 슬픔과 아픔을 억누르면서 모든 상처를 받아들이려는 조홍을 향해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맹덕 님을 사랑하듯, 자렴 님 또한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네?”
이성휘의 말에 조홍이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울음기 젖은 붉은 눈동자에 의문과 당혹이 톡 떨어졌다.
“저는 자렴 님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자렴 님께서 제게 단념(丹念)를 다해주셨듯, 저 또한 자렴 님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언니도,
나도 포기하지 않겠다니.
그 끝은 분명 무자비한 파국일 텐데. 이 욕심 많은 남자는 언니도… 그리고 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렴 님을 진심으로 연모합니다. 저는 자렴 님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성휘가 확고함에 찬 목소리로 울음기에 젖은 흑발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결연하게 빛나는 흑색 눈동자.
날카로운 칼날처럼 조홍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실로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음에도 조홍은 자기 마음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천하제일의 욕심쟁이가 꺼낸 탐욕스러운 말에 애절함이 깊어졌다.
“흐, 흥…!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이예요?! 그럼 이대로 계속 관계를 이어가자고요? 언니에게 발각당하면 아무리 어림총사라도 무사히 끝나진 않을 걸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언니에게 들키면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제가 어떻게든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자렴 님.”
불안과 서글픔에 떠는 자기 마음을 꼭 붙잡아주는 이성휘의 확고한 목소리에 조홍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도, 언니도….
둘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제멋대로 같은 말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자비한 파국조차도 받아들이겠다는 이성휘의 장담에 마음을 의지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끔찍한 파국조차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가요…. 이 욕심쟁이!’
순수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탐욕스러운 면이 존재했을 줄이야.
하지만 그의 장담이 몹시 기뻤다.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모습에 마음을 송두리 째로 빼앗겨 버렸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흥,
조홍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새침데기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이성휘에게 믿음을 걸어보고 싶었는지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보내면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에라도 맹덕 님에게 자렴 님과의 관계를 낱낱이 이실직고하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렴 님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모두 감당하겠습니다.”
“멈추라고! 누굴 죽이려고!! 이 바보 같은 사람! 언니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림총사의 목숨은 물론 내 목숨까지도 도매금으로 함께 넘어간다고!”
조홍은 떠올렸다.
가차 없이 숙청의 검을 휘두르는 언니의 모습을.
어림총사를 연주에서 추방한 뒤,
사촌 동생인 자신을 바위에 꽁꽁 묶은 뒤에 황하 밑바닥에 가라앉히는 끔찍한결과가 예상되었다.
언니가 천하를 향한 열망만큼이나 소유욕이 지독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조홍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당장에라도 언니에게 사실대로 이실직고를 할 것 같은 이성휘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 일단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요…! 언니에게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만이라도 비밀로 하자고요! 저도 최대한 주의할 테니까 어림총사도 언변에 주의하세요!”
언니에게 관계를 인정받을 방법,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조홍은 무식하게 정면 돌파를 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이성휘를 대신하여 책략을 내기로 했다.
‘하여간 바보 같다니까…! 무, 물론 그런 점도 충분히 사랑스럽지만요….’
조홍이 수줍은 듯 웃었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들을 감내하겠다는 이성휘의 말에 더욱 사랑이 깊어지게 되었다.
* * *
황문시랑(黃門侍郞) 순유는 낙양에 불을 지르는 등의 온갖 만행들을 범한 역신을 척살하기 위해 동탁 군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푸대접을 받고 있던 백파적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발각당하고 말았다.
거사를 두려워한 백파적의 장졸 중 한 명이 동중랑장 동월에게 그대로 밀고해 버린 것이었다.
관료들이 백파적과 결탁하여 자신을 도모하려 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탁은 길길이 날뛰면서 동중랑장 동월과 중군교위 동황에게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더러운 변절자들을 죽여라!”
“도적 떼를 끌어들인 주동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어르신의 명이시다!”
동월과 동황이 이끄는 근위대가 백파적 출신의 장수들을 습격했다.
병력을 동원하여 가택을 강습한 뒤,
반란에 가담했던 인물을 비롯하여 일가친척과 노복들까지 모조리 요절내버렸다.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도적 떼들이 어르신을 도모하려 했다는 사실에 동탁 군 병사들은 매우 가혹하게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커헉!”
“이, 이놈들! 어찌 알았단 말이냐!”
양봉의 휘하 장수였던 호재와 이락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근위대의 손에 비명횡사했다.
그들의 일가친척 도한 무사하지 못했다.
동월과 동황은 관료들과 모의하여 반란을 준비했던 배신자들을 황제를 시해하려 한 역적이나 다름없다고 규정하면서 구족을 멸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다 죽여라! 그리고 어서 관료들을 찾아내라! 반란을 주도한 주동자들인 의랑 정태와 장사 하옹, 황문시랑 순유를 반드시 잡아들여야 한다!!”
동탁 군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속전속결로 반란을 진압하려는 듯,
동월과 동황은 백파적 두령들을 일 거에 소탕해 버린 뒤에 주동자를 잡아들이려 했다.
무식하게 살인과 약탈을 반복할 뿐인 백파적 따위가 거사를 준비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들은 그저 관료들의 꾐에 넘어간 하수인일 뿐, 거사의 진짜 주동자는 백파적을 끌어들인 관료들이었다.
“설마 치밀하게 준비했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될 줄이야…!”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성이 양봉의 무리들과 함께 장안성의 성문을 빠져나갔다.
역시 비천한 도적들이라 그런지,
만고의 역적을 토벌하겠다는 거사가 거행되기도 전에 양봉 휘하의 장졸이 동탁에게 밀고해 버렸다.
‘역시 도적 떼를 믿어선 안 됐는데!’
정태, 하옹 등의 관료들과 함께 동탁 암살을 주도했던 황문시랑 순유는 거사가 발각되었음을 미리 간파하고 양봉과 함께 달아났다.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탁 군이 사나운 야차처럼 추적해 올 것이었기에 순유는 미련을 접고 홍농군(洪農郡)으로 달아나려 했다.
‘한순간에 도망자 신분이 되어 버렸으니까…, 고모님의 말대로 연주에 세력을 두고 있는 조조군을 의지해야겠네요.’
황문시랑 순유는 양봉의 휘하 장수인 서황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이 어린 고모로부터 조조 군에 임관하지 않겠느냐는 서한을 받았던 것을 떠올린 순유는 거사를 단념하고 연주에 의탁하기로 했다.
“하아…! 동탁 군에게 이대로 붙잡히게 된다면 저는 그대로 서량 병사들의 육변기가 되어 버리겠죠. 어쩌면 장안 백성들의 성 처리용 암퇘지로 전락해 버릴지도 몰라요.”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는 추격대를 바라보면서 순유가 중얼거렸다.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에 찬 교성에 담긴 중얼거림이었다.
날카로운 화살들이 장대비처럼 빗발치고 있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는 음탕함에 절어 버린 머리를 최대한 굴리면서 동탁 군에게 붙잡혔을 때 받게 될 치욕에 하복부를 바르르 떨었다.
“…미, 미친.”
갑옷을 두른 여성 장수가 순유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대경실색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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