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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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빛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연등들.
흑발의 여인은 주황빛 화광으로 물든 정경을 등진 채 새하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흑발.
붉은 눈동자가 패옥(佩玉) 같은 고풍스러운 기품이 느껴졌다.
앵두 같은 입술과 오밀조밀한 얼굴.
귀여운 이목구비와 암사슴처럼 우아하게 뻗은 목덜미.
아담한 가슴과 늘씬한 몸매,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작고 왜소한 체격은 보호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다.
“서, 성휘…?”
갑작스러운 고백에,
조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움에 찬 감정을 내비쳤다.
“아만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이성휘가 재차 용기를 내어 연모해온 여인에게 자기 마음을 바쳤다.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듯,
결연함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어 고백했다.
진심을 호소하는 이성휘의 모습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본연의 마음을 품은 이성휘의 두 눈은 그 어떤 때보다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지, 지금 성휘가 무슨 말을…! 나, 나를 좋아한다니… 그 말은 곧, 나를 연모하고 있다는 말인가…?’
충성스러운 부관으로부터 진심 어린 고백을 듣게 된 흑발의 여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달콤한 사랑으로 채워졌던 뇌리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성휘가 고백을 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가정’일 뿐이었다. 진짜로 이성휘가 자신에게 고백할 줄은 몰랐는지 도톰한 입술을 쭉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성휘가… 부관이 나를, 부관이 나에게… 고백을 해 오다니…!’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혹시 내가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괜한 기대감에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싶어, 격렬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고백을 입에 담은 이성휘의 모습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맹덕 님.”
이성휘가 불렀다.
그제야 조조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귀, 귀관…. 답을 하기 전에… 혹여 나를 연모하게 된 이유를 들을 수 있겠는가?”
나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나를 연모하게 된 이유를 듣고 싶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것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고백받은 것 역시 처음이었기에 흑발의 여인은 자신을 향한 마음을 확인받고 싶었는지 이성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누구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야심과 이상을 품고 계셨던 맹덕 님에게 이끌렸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결코 야심과 이상을 포기하는 않았다.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야심.
아득하게 빛나는 찬연한 이상.
필부 따위들은 감히 언감생심도 하지 못할 대망을 품고 있는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야심과 이상을 입에 담으면서, 반드시 이루겠노라는 확신과 의욕을 드러내던 그녀의 모습을 쫓게 되었다.
“야심과 이상을 품고 계셨던 맹덕 님의 모습은 두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빛났고, 두 눈을 앗아갈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후부터… 진심으로 맹덕 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반하게 된 이유.
조조 군에 합류하게 된 이유.
이성휘는 지금까지 숨겨 온 본심들을 모두 조조에게 밝혔다.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고백을 꺼낸 이후,
물길을 막던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억눌러 온 본심들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아… 흐음….”
항상 메마르고 무뚝뚝한 모습들만을 보여 온 이성휘가 진심 어린 고백을 연이어 꺼내자 조조는 당혹스러움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성휘는 어느 때보다도 감정에 휩쓸린 상태였다.
무뚝뚝하던 모습도 좋았지만 지금처럼 감정에 휩쓸린 채 뜨거운 격정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도 사랑스럽게만 보이었다.
그에 조조는 자신 또한 이성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귀, 귀관의 마음은 잘 알겠네….”
흑발의 여인이 옷소매로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폭 가린 채 중얼거렸다.
한없이 부끄러웠는지,
차마 보이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랑에 물든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을 향해 격렬한 고백을 해온 남성의 발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연모해주어 고맙네.”
그렇게 입을 연 조조는 말이 끝나자마자 깊은 자괴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뭐지.
이 얼빵한 대답은?
연모해주어 고맙다니. 고백을 거절할 때 주로 내뱉는 대사가 아닌가. 혹여라도 부관이 고백에서 차였다고 생각해서 깊은 실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대,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 게냐! 고백받은 건 처음이라서… 무슨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다! 공대! 문약! 누구라도 좋으니 이 글러 먹은 군주를 당장 좀 도와다오!’
이 속마음을 진궁과 순욱이 들었다면,
안타까움에 찬 한숨을 폭 내쉬었을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부관인 제가 감히…, 결코 품어선 안 될 마음을 가지고 말았습니다.”
이성휘가 사과했다.
그 말에 푹 숙인 채 당혹스러워하던 조조가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맹덕 님께서는 언젠가 천하를 거머쥐실 분이십니다. 빛나는 이상과 대망을 품으신 분입니다. 그런 맹덕 님을 어찌 저따위가 감히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성휘의 말에 조조는 애처로운 마음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간 이성휘가 마음을 숨겨 온 이유를,
입을 꾹 닫고 침묵한 채 자기 곁을 지켜왔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애타는 마음이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갔다. 그의 본심을 듣게 된 조조는 홀로 고뇌와 번민을 반복해왔을 부관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 따위는…! 귀천이 결정된 혈통 따위는…! 나와 귀관 사이에 그까짓 신분과 혈통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네!”
그가 용기를 내어 본심을 전했듯이,
나 또한 용기를 내어 본심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조는 지금까지 자기 본심을 억눌러왔던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모두 집어던지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성을 향해 손을 뻗어 주었다.
“그러니…, 그러니까…! 나를 계속, 계속 연모해주게…!”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이성휘의 마음을 긍정했다.
“나는… 귀관의 진심이 몹시 기쁘니….”
그 긍정은,
이성휘의 마음을 향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또한 고백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긍정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자기 모든 것들을 긍정해준 것만 같은 흑발의 여인에게 진심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무뚝뚝함은 온데간데없는,
연주성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는 등불 보다도 밝은 미소였다.
활짝 미소를 지은 이성휘의 모습에 조조는 놀라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관이 그런 표정을 지울 줄도 알았다니…. 이, 이건 반칙이지 않나…! 귀관은 대체, 내 마음을 어디까지 흔들어놓을 생각이란 말인가.’
쿵쾅쿵쾅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심장.
당장에라도 펑 터질 것처럼 심장이 지치질 않고 뜀박질했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에게 모든 마음을.
찰나의 미소에 이 조맹덕의 마음이 송두리 째로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러니 부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게….”
조조가 주문했다.
그에 이성휘는 두 팔을 벌리면서,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입은 흑발의 여인을 상냥하게 꼭 끌어안았다.
작고 부드러운 여성의 온몸이 품에 들어왔다. 예쁘게 꾸민 인형처럼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으면서 사랑이 와락 채워지는 만족감을 느꼈다.
“하으으…!”
사내의 단단한 품에 꼭 안기게 된 조조가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 갑작스럽게 포옹해올 줄은 몰랐는지 토끼처럼 두 눈이 커지게 되었다.
“귀관의 품은… 항상 따스하군. 듬직하고 단단하고, 항상 믿음직스럽다.”
이성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조조가 애절한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항상 지켜 주었던 품이다.
모든 적들을 참살하고 나에게 승리의 영광을 가져다주었던 사내의 품이었다.
이 사내의 품을 영원토록 독차지하고 싶었다. 나에게 안식과 평온을 주는 따스한 포옹을 이 조맹덕만의 것으로 선언하고 싶었다.
“맹덕 님.”
“성휘, 맹덕이 아니라… 아만이지 않은가.”
조조는 이성휘가 다시 자신을 ‘아만 아가씨’라고 불러 주기를 바랐다.
주종 간의 금지된 연애처럼 느껴졌기에,
사대부 규수와 호위무사의 은밀한 관계처럼 보였기에 다시 아만 아가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만.”
“…흐윽?!”
조조가 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이성휘의 품에 안긴 채,
온몸을 격렬하게 떨어댔다.
설마 이성휘가 ‘아가씨’라는 호칭을 생략한 채, 자신을 ‘아만’이라고만 부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무심코 허를 찔린 것처럼 온몸으로 당혹감을 발산했다.
“혹시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겁니까.”
“아니, 아닐세. 지금은 우리 둘 다 신분을 숨긴 채 밤나들이에 나선 상태가 아닌가. 괜찮네, 오늘 밤만큼은… 나를 아만이라고 불러도 좋네.”
품에 꼭 안긴 채 온몸을 밀착하고 있던 조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이성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름다운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 입을 맞춰달라는 듯이 애처롭게.
“아만.”
“…응.”
붉은 봉선화에 물든 손톱처럼 조조의 새하얀 얼굴이 사랑스러운 홍조에 폭 젖었다.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만.”
나를 긍정해준 여인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숙이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메마른 입술이 촉촉하게 젖은 여인의 입술을 단번에 빼앗았다.
“…흐으읏!”
입술 사이로 달콤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이성휘는,
조조의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도장을 찍듯 입맞춤했다.
사내와의… 연모하는 상대와의 입맞춤에 조조는 긴장했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성휘의 혀가 성문을 두드리듯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건들자 무혈입성처럼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습니다.”
“나, 나 또한… 귀관을….”
잠시 입술을 떼어낸 뒤,
서로를 향해 사랑을 속삭이던 두 남녀는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상대와 다시 입맞춤했다.
아찔하게 빛나는 등불처럼 아름답고 격렬한 사랑을 이어 나갔다. 연주성을 물들인 등불이 아름다운 화광을 퍼트리듯, 조조와 이성휘의 마음에도 연모의 감정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진심 어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금발의 여인은 숨죽인 채,
입술을 꾹 다물면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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