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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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별자리들이 지상으로 떨어진 것처럼 연주성이 주황빛 화광에 물들었다.
불야성(不夜城)을 자랑하듯,
조조 군의 승전에 취한 연주 백성들은 축제를 즐기면서 난세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추슬렀다.
환한 조명과 떠들썩한 군중. 유혈과 살육이 반복되고 있는 난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연주성은 태평스러운 평화를 번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어르신께서는 처소에 안 계시옵니다.”
조조와 술잔을 나누기 위해 그녀의 처소에 발걸음을 한 금발의 여인은 처소의 시녀로부터 현재 부재중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잠시 처소를 비운 상태다.
출타하신 곳은 우리도 알 수 없다.
조조를 밤낮으로 빈틈 없이 보필하는 시녀가 출타한 곳을 모른다는 대답에 원소가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히 이성휘와 관련된 일임을 넌지시 직감해 버렸기 때문이다.
“흠,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알겠어요.”
조조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여 애꿎은 시녀를 힐난할 수는 없었기에 원소는 순순히 대답을 받아들이면서 등을 돌렸다.
분한 마음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질투, 그리고 시기.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겼다는 악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조조만을 탓할 순 없었다. 조조를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이성휘의 판단이며, 또한 이성휘는 조조의 부관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하겠어요…. 성휘를 먼저 발견하지 못한 저의 어리석음 때문인 것을요.’
알아채는 것이 늦어 버렸고,
그때문에 조조가 먼저 낚아채갔다.
원소는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먼저 발견하지 못한 자기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한탄했다.
‘성휘, 맹덕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당신 또한 맹덕을 좋아한다고 했었죠. 그래서 함께 밤거리를 나선 것일 테고요.’
원소는 조조가 이성휘를 이성으로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성휘 또한 진심으로 조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번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내가 괜히 사이에 끼어들어,
귀여운 동생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닐까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으로 나가겠어요. 어서 준비해주세요.”
본인의 처소로 돌아온 원소는 대뜸 무관들에게 채비를 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시녀들을 불러 의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군집된 시가지에서 조조와 이성휘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날카로운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원소는 조조가 이성휘를 대동한 채 어디로 향했을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뇨,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저는 성휘를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진다! 그게 바로 이 원본초의 욕망이니까! 설령, 설령 천하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맹덕… 당신에게 빼앗긴 채로 주저앉지는 않겠어요.’
두 눈에 질투의 화염을 활활 불태우던 금발의 여인은 결연함에 젖은 표정을 지으면서 시녀와 무관들을 더욱 재촉했다.
* * *
내게 혹여… 할 말은 없는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입은 연 조조의 물음에 이성휘는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최대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이성휘는 ‘혹시 지금이 마음을 고백할 적기임을 알려주는 말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내가 괜한 말을 한 듯하네.”
입을 꾹 닫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성휘의 시선에 조조는 물음을 철회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혹시 화난 걸까.
멈췄던 걸음을 재차 움직이면서 앞을 향해 걷는 조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성휘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할 틈도 없이 두 발을 움직이면서 조조의 뒤를 바싹 쫓았다.
“귀관과 함께 가고 싶은 장소가 있네. 따라오게.”
“예.”
면사포처럼 하얀 너울로 얼굴을 가린 고아한 여인이 발걸음을 성큼성큼 움직였다.
고귀한 태생의 사대부 규수처럼 보이는 여인을 본 백성들은 좌우로 갈라지면서 길을 터주었다. 그 덕분에 조조는 작고 왜소한 체구였음에도 군중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연주 시가지를 한눈에 훤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우왕각(禹王閣)이라는 누각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우왕각은 하나라 우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인 우왕대(禹王臺)와 근접한 거리에 지어진 누각이다.
섬세하고 고풍스러운 양식이 특징이며,
또한 활력이 넘치는 연주성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절경에 위치한 것으로 유명했다.
갑자기 우왕각으로 향하겠다는 조조의 말에 이성휘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녀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나저나 꽤 멀군.”
우왕각을 목적지로 잡은 흑발의 여인은 몇 리를 가지 못하고 가쁜 한숨을 내쉬었다.
신고 있던 신발이 불편했으며,
또한 사륵사륵 끌리는 비단옷은 보행에 큰 불편함을 주었다.
그런데도 꼭 우왕각으로 가 연주성 시가지의 아름다운 정경을 두 눈에 담고 싶었는지, 지친 발걸음을 애써 움직이려고 했다.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업히십시오.”
“귀, 귀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체를 들키지 않을 겁니다.”
“…….”
이성휘의 말에 조조는 쑥스러움에 물든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꾸벅 끄덕였다.
외간 사내의 등에 업힌다.
시집 안 간 처녀에게 몹시 의미심장한 접촉이 아닐 수 없었다.
여전히 고백을 해 오지 않는 부관의 무뚝뚝함에 침울한 심정이었던 흑발의 여인은 등에 업히라는 과감한 제안에 마음이 쿵쿵 뛰게 되었다.
“우읏!”
폴짝 뛰면서 이성휘의 등에 업히게 된 흑발의 여인이 부끄러움에 젖은 한숨을 내쉬면서 두 팔로 사내의 목을 껴안았다.
두 다리를 받쳐주는 양손.
온몸을 받아들이고도 남는 널찍한 등.
그리고 옷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까지.
2년 동안 짝사랑해온 남성의 등에 업혔다. 마치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면서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이, 이게 바로 부관의 등…, 정말 넓군. 사내의 등은 원래 이렇게 넓은 것인가? 단 한 번도 사내의 등에 업힌 적이 없어 잘 모르겠군….’
어릴 적에 자신을 업어 주었던 아버지의 등이 이러했을까.
든든하고 따스했다.
세상의 모든 풍파들로부터 나를 지켜 줄 것처럼.
사랑에 빠진 여인이 팔불출 같은 사내의 등에 업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망측스럽다’라고 생각했건만, 직접 등에 업혀보니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
“아만 아가씨.”
이성휘가 말했다.
시가지를 벗어나게 되면서부터 점차 주변에 인적이 드물어졌음에도 이성휘는 조조를 계속 ‘아만’이라 불렀다.
“응, 무슨 일인가.”
조조의 대답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 독단들로 인해… 아만 아가씨에게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이미 용서해주지 않았는가….”
“허나 본분을 망각하고 독단을 벌인 일은 몇 번을 사죄해도 모자란 일이었습니다.”
자괴감이 느껴지는 이성휘의 목소리에 등에 업혀 있던 흑발의 여인이 두 손을 움찔 떨었다.
계속 그것을 고민해온 것일까.
넓고 포근한 등이 갑자기 위축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성휘의 사과에 조조는 마음이 숙연해졌는지 슬픔에 물든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귀관이… 성휘, 네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했을 거다. 어쩌면 적의 흉수에 쓰러졌을지도 모르지. 나는 단연컨대 너를 단 한 번도 미워한 적도, 단 한 번도 너를 믿지 못했던 적이 없었다.”
연모의 감정에 젖은 목소리로 이성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그 뒤,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 부디… 죄책감에 찬 그 마음을 거둬줬으면 좋겠다.”
조조는 혹시라도 연모하는 속마음을 들킬까 봐 일부러 딱딱한 말투를 써 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만약 그가 고백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대신 고백을 할 것처럼 말투가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목소리 또한 연모의 감정이 넘쳐흘렀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이성휘가 등에 업고 있는 조조의 표정을 보았다면 또다시 마음을 빼앗겨 버렸을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만 아가씨.”
“후후. 나는 좋은 주군이니.”
서로를 보듬어 주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걸음을 이어나간 끝에 어느덧 우왕각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리가 그렇게 멀진 않았다.
고개를 넘느라 다소 시간이 걸렸을 뿐.
등에 업혀 있던 흑발의 여인은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전혀 기뻐하는 모습이 없었다. 이제 이성휘의 등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토해냈다.
“흠, 일찍 도착했군…. 본초와 한 번 왔을 때는 제법 멀었던 것으로 기억하건만….”
아쉬움을 애써 끊어내면서 이성휘의 등에서 내려온 조조가 고개 위에 세워진 누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건물 같으니.
좀 더 먼 거리에 지어져 있으면 안 되나.
온갖 불만 섞인 말들을 툴툴대던 흑발의 여인이 두 발을 움직이면서 누각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성휘가 따랐다.
“어서 저 광경을 봐라, 성휘!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지 않느냐.”
조조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우왕각에서 보이는 연주성의 정경을 이성휘에게 보여 주었다.
환한 연불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등불들이 일제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 불야성(不夜城)의 도시는 조조 군의 업적을 의미하는 값진 결과였다.
“네가 나를 도와 준 덕분에 얻은 결과다.”
“…….”
“네가 전장에서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지금의 저 화려한 연주성이, 활력이 넘치는 백성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두 네가… 네가 나를 따라와 준 덕분이다…!”
조조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느껴졌다.
자신을 따라와주어 고맙다는,
감격과 감동에 벅찼는지 철혈의 패왕이 울음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조조의 모습을 본 이성휘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너에게 이 정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흑발의 여인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월궁항아의 아름다움을 품은 처녀의 웃음이었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그녀를 두 팔로 꼭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 과분한 말들을 해주어 고맙다고 귓가에 속삭인 뒤, 부드럽게 속삭이는 입술을 격렬하게 빼앗아버리고 싶었다.
“아만 아가씨.”
“응.”
“이제야 떠올랐습니다. 아만 아가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성휘는 결연함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흑발의 여인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새카만 눈동자로 조조를 바라보면서 부하로선 결코 품어선 안 될 마음을 고백했다.
“충성을 바친 주군을… 감히, 제가 감히 주군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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