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연주성에서 거행될 축제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함이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만고의 역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세운 아군의 명성과 전공들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역신이 서쪽으로 물러 갔으니… 명실상부 정동장군 어르신께서 천하의 패권에 근접하셨군.”
부군사 순욱의 추천을 받고 조조 군의 시중종사(侍中從事)에 임명된 모개가 구름처럼 모인 연주 백성들을 보며 말했다.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수가 무려 수만 명이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 하였소이다. 이는 곧 조공에게 민심이 있음을 의미하오.”
모개와 마찬가지로 순욱의 추천을 받고 조조 군에 임관한 수장현(壽張縣) 현령(縣令) 정욱이 모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연주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그 말은 곧 수십만 명에 달하는 연주 백성들이 정동장군 조조를 크게 신뢰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사나운 오랑캐와 흉포한 도적 떼들이 활개 치고 지금 같은 난세에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군집시킬 정도로 확고한 민심과 영향력을 장악한 것이다.
난세를 틈타 수많은 군벌들이 거병하였지만 그중에서도 조조는 천하의 패권에 근접한 필두였다.
“어르신의 휘하에는 충직한 친족들을 비롯하여, 천하제일의 무인이라 명성을 떨치는 중원제일 검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소.”
“중원제일 검…. 같은 주인을 모시게 되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그를 만나 보고 싶소이다.”
조조 군에 갓 임관한 모개와 정욱이 중원제일 검이라 불리는 사내에게 관심을 보였다.
역신을 토벌하고 황실과 조정을 구한 영웅.
중년 사내들의 메마른 마음에 정열을 불태울 정도로 낭만적인 인물이었다.
한나라 백성들 중에 중원제일 검을 모르는 이는 결코 없으리라. 모개와 정욱은 임관하자마자 중원제일 검과 면식을 쌓고 싶어 했다.
“여기 계셨습니까.”
관복을 입은 모개와 정욱이 축제 준비가 한창인 시가지를 구경하고 있을 때, 상아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고상한 미녀가 다가왔다.
부군사 순욱이었다.
순욱이 방긋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자 모개와 정욱이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오시었소, 부군사.”
“연주성에 열릴 연등회에 흥미가 많아 구경하고 있었소.”
모개와 정욱의 처지에서 보면 순욱은 딸뻘에 해당하는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군사 진궁과 함께 정동장군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부군사였으므로 매우 깍듯하게 대했다.
그리고 순욱 또한,
중년 관료들에게 공손하게 예의를 갖췄다.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노고와 근심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본 순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디 태평성대가 다시 찾아오기를.
하루라도 빨리 전란의 시대가 끝나기를 기도했다.
“부군사의 말씀이 맞소.”
“전란에 지친 백성들이 쾌유를 되찾았으면 하오.”
영천순씨 가문의 고아한 여인이 자애로움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또한 한나라 황실과 조정을 숭상하는 여인이었다.
난세를 평정하고 고난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여줄 군웅. 순욱은 조조야말로 황실과 조정을 수호하며, 백성들을 난세로부터 지켜 줄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소를 섬기기를 권유한 오라비의 뜻을 저버리고 연주에 온 것이었다.
“두 분께서 해주셔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시중종사께서는 둔전의 초석을, 현령께서는 군사를 도와 전사(戰事)를 맡아주세요.”
순욱의 부탁에 모개와 정욱이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 * *
내일 밤에 함께 밤나들이에 나선다.
흑발의 여인은 들뜬 반응을 보이면서 꽃병에 담긴 노란 국화를 바라보았다.
낙양의 꽃집 처녀가…
아니, 부관이 처음으로 선물해준 꽃이다.
사촌 동생과는 달리 재물에 그다지 욕심이 없는 그녀가 유일하게 목숨보다 끔찍이 여기는 보물이었다.
“흥흥, 흥흥흥….”
정성스럽게 꽃병의 물을 갈아주던 조조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어깨를 흔들었다.
새하얀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붉은 눈동자 또한 마음을 들뜨게 하는 연모의 감정에 취해 있었다.
‘만약 내일… 부관이 내게 고백을 해 온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조조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정작 당사자는 호위에 신경을 쓰고 있건만, 사랑에 빠진 여인은 이성휘가 지금쯤 고백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망상 회로를 열심히 돌렸다.
‘고백을 받게 되면 일단 한 번은 거절해 줘야 한다고 들었다. 남성을 애태우게 만들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지식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문외한이 마치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만약 이 모습을 친척들이 보았다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리라.
‘하, 하지만…. 부관이 만약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고백을 해 온다면… 거,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큭, 하지만 부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기 위해선 거절해야 할 터…!’
만약 손등이 아니라,
입술을 겹치면서 고백을 해 온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남성이 사랑을 속삭이면서 매달려오는 모습을 상상한 조조는 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전력 질주를 계속 한 것처럼,
망상만으로도 쿵쾅쿵쾅 요동칠 정도로 분별력 없는 심장은 이성휘를 향한 애달픈 마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흐흣, 흐흐흣….”
슬며시 열린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백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부관으로부터 고백을 받게 되겠지.
행복한 망상 때문에 “부관은 분명 아름다운 연등들로 둘러싸인 시가지에서 내게 고백을 해 올 게 분명하다!”라며 확실시하듯 말했다.
“맹덕!”
조조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붉은 머리의 여걸이 문을 활짝 열면서 등장했다.
기별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 행복한 망상을 방해한 원흉을 아니꼽다는 듯 노려본 흑발의 여인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원양.”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
그러니 당장 내실에서 나가라.
조조는 애써 부정적인 마음을 억누르면서 하후돈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부관하고 무슨 일 있어?”
“무, 무슨 일… 없다.”
하후돈의 예리한 물음에 조조가 목소리를 떨었다.
설마 독심술을 익혔단 말인가!
머리까지 근육들로 둘러싸인 것 같은 사촌이 이 조맹덕의 뇌리를 꿰뚫다니.
그토록 신묘한 독심술을 익혔다면 점쟁이를 할 것이지 어째서 무장을 하는 것이냐며, 조조는 하후돈의 예리한 물음에 진심으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집무실에 박혀 있을 시간인데 내실에 있잖아. 그것도 사랑하는 부관이 선물한 노란 국화를 빤히 쳐다 보면서 콧노래나 흥얼거리고 말이야.”
“…큭!”
조조가 침음을 삼켰다.
싸움 밖에 모르는 바보 주제에,
예리한 직감을 자랑하는 감찰관처럼 속마음을 조목조목 밝혀내기는!
지금까지 친자매처럼 지낸 사촌 동생에게 속마음이 그대로 까발려지게 된 조조는 연이은 추궁과 심문 끝에 결국 부관과의 일에 대해 밝히게 되었다.
“밤나들이를 권유했다고? 2년 동안 제대로 말도 걸어본 적 없을 정도로 연애말뼈다귀 네가?!”
“시, 시끄럽다…! 그리고 목소리가 너무 크다!”
“오올~! 우리 맹덕도 발전이라는 것을 하는 모양이네. 옛날 같았으면 사랑하는 부관의 그림자도 제대로 못 쳐다봤을 텐데.”
농담이 아니다.
2년 동안 조조는 그림자조차도 보기를 부끄러워했다.
그런 연애말뼈다귀가 연모하는 부관에게 밤나들이를 제안한 것에 대해 하후돈은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미용이나 미장부터 준비해야지.”
“미용? 미장? 일반 백성처럼 보이도록 변복을 하기로 했다.”
하후돈의 말에 조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하후돈이 한숨을 내쉬었다.
“짝사랑하는 부관과 함께하는 첫 밤나들이인데 진짜 아무 옷을 입고 나가겠다고?”
“…….”
조조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하후돈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력이 불과 61 밖에 되지 않는 하후돈이 지력 92인 조조와의 설전에서 승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연애와 관련된 일에 대해선 절망스러울 정도로 문외한인 조조는 여기저기 들은 게 많은 하후돈의 말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조조가 물었다.
그에 하후돈이 대답했다.
“당연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지. 어중간하게 준비했다간 도리어 분위기만 망칠걸? 이 하후원양에게 맡겨두셔. 연애말뼈다귀 사촌을 위해 본심을 다 할 테니까!”
명군사에 빙의된 것인지,
머리까지 근육으로 된 패국의 여걸이 지혜로운 모습을 보였다.
“서주 출신의 유명한 가희(歌姬)가 지금 연주성에 있는데, 그쪽한테 도움을 받는 건 어때? 가희라면 당연히 사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테고. 여기저기서 들은 것밖에 없는 나 따위보단 당연히 많이 알고 있겠지.”
“가희…? 천박한 가기(歌妓) 따위에게 도움을 받으란 말이냐.”
천한 출신의 가희 따위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하후돈의 제안에 조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낱 가희에게 도움을 구한다니.
한나라의 개국공신 사대부인 패국조씨 가문의 장녀로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듣기로는 미용과 미장에 특출한 재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아름답게 꾸미고 나간다면 분명 짝사랑하는 부관에게 정열적인 고백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하후돈의 말에 조조가 답했다.
“당장 만나 보도록 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