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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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을 ‘선아’라고 부르던 중원제일 검의 모습을 통해 유협을 보필하던 환관들은 둘의 관계에 대해 넌지시 알게 되었다.
서로 연통(戀通)하는 관계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애틋한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무뚝뚝한 성정이지만 유능하고 잘생긴 이성휘를 향해 남몰래 연모의 마음을 품고 있던 궁녀들은 초선에게 슬쩍 질투를 보내면서도, 원래 선남선녀끼리 만나야 하는 법이라며 중원제일 검과 낙양제일미의 연애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축하해, 이제 정말 연인 사이가 된 거야?”
열병을 앓고 있던 초선에게 사과를 갈아서 준 동료 시녀가 두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중원제일 검과의 연애!
이 얼마나 꿈만 같은 일인가.
궁중을 급습했던 수십 명의 자객들을 참살하여 어린 황녀를 구한 중원제일 검은 궁녀들의 이상형과 다름없었다.
“부, 부끄럽사옵니다…. 그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사이일 뿐이옵니다….”
“그래도 잘된 일이잖아.”
사과를 먹은 것을 표현하려는 듯,
동료 시녀의 말에 초선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이성휘를 떠올리던 초선이 격렬한 첫날밤을 치렀을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살결과 육욕의 향연.
뜨거운 쾌락을 갈구하며 서로에게 매달렸다.
사랑을 교환하면서 애절하게 매달렸던 그때의 상황은 결코 뇌리에서 잊을 수 없는 애욕의 만족감을 보여 주었다.
‘소, 소녀가 대체 명공에게 무슨 짓을…! 분명 파렴치한 여자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옵니다! 결코 담아서는 안 될 음란한 말들을 쏟아 내고… 거, 거기에 경애하는 명공의 몸에 올라타는 기행까지…!!’
얼굴이 재차 달아올랐다.
백옥처럼 새하얀 얼굴이 불에 달군 철광석처럼 새빨개졌다.
찻주전자를 머리 위에 올리면 금세 끓어오르지 않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로 화력을 뿜어냈다.
“초선이 아프다고 들었다!”
“전하!”
소복 차림인 분홍 머리카락의 여성이 낯 뜨거운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둥글둥글한 귀여운 인상의 황녀가 궁인들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초선과 시녀가 유협에게 예를 취했다.
설마 유협이 다짜고짜 병문안을 올 줄은 몰랐는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저, 전하…!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사옵니까. 서둘러 의복을 갈아입겠사옵니다!”
“아니다, 그대로 있어라.”
손을 들어 인원들을 모두 물린 유협은 심려가 섞인 눈길로 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크게 수척해진 상태였다.
첫 경험에서 다소 무리를 한 탓인지 열병에 걸리고 말았고, 거기에 이성휘에게 요깃거리가 든 찬합을 전달하기 위해 몸을 혹사했다.
헝클어진 분홍 머리카락과 야윈 뺨. 게다가 두 눈이 미열로 인해 축 늘어진 상태였다.
“몸이 많이 아프다고 들었다. 그래서 만사를 젖혀두고 병문안을 왔다.”
“소,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몸에 좋은 탕약을 준비하도록 주문했다. 쭉 마시고 기운을 내거라.”
유협은 주변인들에게,
특히 궁인들에게 많은 온정을 베풀었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주변의 수많은 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온 유협은 심적 두려움으로 인한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갈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이 주변인들을 향한 관심과 집착을 만들었다.
“송구하옵니다…. 소녀가 항상 전하를 보필해야 하옵니다만…. 소녀가 불민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사옵니다. 불충을 용서하시옵소서, 전하….”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연 초선의 말에 금발을 늘어뜨린 작은 황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불민하다느니… 불충하다느니… 그런 말은 말아다오. 초선은 그 아비규환 속에서 나를 꼭 껴안으며 지켜 주지 않았더냐.”
유협은 초선을 친언니처럼 여기고 있었다.
항상 자신을 감싸주었으며,
공포와 두려움에 몸을 떨 때마다 항상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본인도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항상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초선의 모습에 유협은 큰 감명을 받았다. 언젠가 장성하게 되면 친언니 같은 초선을 꼭 지켜 주겠다는 다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죄송하옵니닷, 전하! 사, 사실 열병에 걸리게 이유는 명공과 첫날밤을 격하게 보내느라 그런 것이옵니다앗…!’
차마 어린아이에게 말할 수 없는,
다소 민망한 이유를 떠안고 있었던 초선은 무거운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 * *
조조는 아름다운 보석을 주변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공간에 안치하는 원소와는 달리, 항상 손아귀에 들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당연히 그 아름다운 보석이란,
중원제일 검 이성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내군에서 합류하게 된 병주군을 진류군 평구현에 주둔시키고 돌아온 이성휘를 향해 기쁨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귀관, 관저로 오는 길에 시가지에 장식된 연등들을 보았는가?”
“예, 보았습니다.”
“동탁 군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전을 기념하여 연주성은 물론, 연주 전역에 큰 축제를 열 예정이라네.”
“축제라…. 전쟁에 두려움을 느끼던 백성들의 근심을 덜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맹덕 님.”
“흐흣. 그런가?”
이성휘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치켜세우자 조조의 새하얀 얼굴에 붉은 기운이 서렸다.
연모하는 상대가 하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근사하고 잘생긴 남성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흑발의 여인에게 있어 이성휘는 무용과 지모는 물론, 용모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천하제일의 남자였다.
‘귀관은 본인에게 있어 천하제일의 남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다.
또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었다.
만약 내 손아귀에 있는 아름다운 보석을 감히 도둑질하는 존재가 있다면 구족(九族)은 물론,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도륙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보석을 되찾을 것이다.
“맹덕 님?”
자기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조조의 모습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그에 조조가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귀관은 나의 보석이다.
결단코 귀관을 놓아주지 않겠다.
원본초가 되었건,
아니면 다른 누가 되었건.
다시 한번 이성휘를 향해 광기 어린 집착을 불태운 조조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했다.
“귀관, 혹시….”
“말씀하십시오.”
그에 조조가 재차 입을 열었다.
“연등들을 모두 밝히는 내일 밤에… 함께 나들이를 하진 않겠나?”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용기를 내어 이성휘에게 대담한 제안을 건넨 조조의 가슴이 맹렬하게 박동 쳤다.
사수관에 가로막힌 채,
숭산을 넘은 이성휘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마음을 계속 애태웠기 때문인지 제법 용감한 제안을 건넸다.
걱정과 기다림이 중첩되면서.
심려와 안타까움이 계속 쌓이면서.
이성휘를 향한 마음을 애절하게 졸여 왔던 조조는 2년 동안의 망설임을 깨고 마침내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다.
“허나 군중들이 몰려 시가지가 무질서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맹덕 님을 안전히 호위할 수 없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잠행을 할걸세.”
“…예, 알겠습니다.”
시가지에 장식된 연등들을 일제히 밝히는 밤이 되면 어둑어둑하게 칠흑이 내려앉았을 터.
정체를 숨기고 잠행을 하겠다는 조조의 말에 이성휘는 우려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조조에게 당혹스러운 제안을 받게 된 이성휘는 얼떨떨한 심정을 뒤로한 채 관저로 돌아오게 되었다.
흑발의 여인과 함께 밤거리를 거닐며,
화려한 연등들이 조명처럼 어둠을 밝히는 시가지의 운치를 즐긴다.
지금까지 조조를 남몰래 연모해 오고 있었던 이성휘는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녀가 먼저 대담하게 제안 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게요?”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사뿐사뿐 다가온 금발의 여인이 두 손을 뻗으면서 이성휘의 눈을 가렸다.
커다란 가슴의 감촉이 등을 짓눌렀다.
상당한 높이를 자랑하는 산봉우리가 출렁출렁 흔들렸다. 조조에게서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본초 님께서 가볍게 발을 내디디시면서 몰래 다가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치이! 이럴 때는 알아도 모르는 척을 해주는 거라고요. 눈치가 많이 없으시네요.”
“죄송합니다.”
원소가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의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상대는 천하제일의 무인이다.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직감과 본능이 뛰어났다.
금발의 여인은 혹시라도 이성휘가 모르는 척을 해주진 않을까 잠시 기대했지만, 역시 무뚝뚝한 성정으로 유명한 중원제일 검답게 배려와 융통성은 밥 말아먹은 듯했다.
“맹덕과 같이 나가던데… 혹시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
연등들이 일제히 어둠을 밝히기 시작할 때 함께 밤나들이하기로 했다는 말을 원소에게 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성휘는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변명해야 될지는 잠시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곧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떤 완벽한 변명을 준비하건 간에 결국 날카로운 통찰력을 자랑하는 원소에게 간파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성휘, 혹시 괜찮다면….”
새하얀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원소가 당찬 목소리로 이성휘에게 말했다.
“내일 밤에 나들이를 나가지 않겠어요?”
조조와 똑같은 부탁을 해 오는 원소의 모습에 이성휘의 두 눈이 커지게 되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예상치 못한 경우에 당혹감이 물에 떨어트린 염료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다.
두 명의 여인들이 건넨 동일한 부탁. 그녀들의 사이에 놓이게 된 이성휘는 당연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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