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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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여포와 병주군을 평구현(平丘縣)에 주둔시킨 것은 장차 예주(豫州)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연주는 하남(河南)의 핵심지역이며,
또한 천하에 명성과 명망을 떨친 명사들이 두루 살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여러 물밑 작업들을 해온 조조에게 있어 예주는 반드시 점령해야 될 목표였다.
게다가 조조는 이성휘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다고는 하나, 여포와 병주군을 여전히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해 볼 겸 평구현에 주둔시킨 것이었다.
“어르신, 이번에 선발한 인재들의 명단입니다. 어르신께서 한 번 검토하여 주십시오.”
옅은 상아색을 띄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둔부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부군사에 임명된 순욱이었다.
중원제일 검의 추천을 받아 조조 군에 임관하자마자 부군사의 자리에 오른 순욱은 그 은혜를 갚겠다는 일념하에 불철주야로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인재 선발에 크게 몰두했다.
낭중 진궁이 내정을, 호위장군 조홍이 군사를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기에 순욱은 인재의 추천과 선발에 집중했다.
“연주와 예주의 사대부 자제들을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하였습니다.”
“다들 들어 본 이름이군.”
순욱의 말에 명단을 찬찬히 살피면서 이름들을 확인하던 조조가 대답했다.
전(前) 현리(縣吏)였던 모개.
영천군 출신의 선비인 희지재.
진국(陳國)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사대부인 양습.
그리고 또한 두기, 임준, 조지 등의 유능한 선비들까지 추천하면서 내정의 역량으로 삼게 했다.
“부관이 추천한 그대가 직접 선발한 인재들이니 믿고 맡기도록 하지, 부군사.”
“감읍하신 말씀입니다.”
추천한 인재들을 모두 등용하겠다는 조조의 대답에 순욱이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의 연주는 텅 빈 곳간과도 같았다.
여러 난적들을 모두 격파하면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내정은 여전히 궁핍하기만 했다.
진궁이 연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하여 군량미를 마련하고 연주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장졸들을 모두 먹여 살리기엔 터무니없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순욱은 선발된 인재들로 하여금 내정을 풍요롭고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안을 착안하여 조조에게 올렸다.
“둔전(屯田)을 시행하겠다는 말인가, 부군사. 둔전을 시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만.”
“한시라도 빨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어르신. 현재 연주의 형편으로는 장졸들을 모두 먹일 수 없습니다.”
순욱이 인재 선발에 적극적인 투자를 한 이유는 두 번째 계획인 둔전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녀가 선발한 인재들은 모두 농전(農田)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임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대가 군을 위해 분골쇄신하여 조력해주니 기쁘군.”
“소녀를 추천해주신 어림총사께 은혜를 갚기 위함입니다.”
새하얀 뺨을 은은하게 붉히는 순욱의 모습에 조조가 죽간을 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에라도 죽간을 뜯을 것처럼,
손아귀에 억센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어르신과 어림총사께서는 서로를 연모하는 정인관계가 아니시옵니까. 어림총사를 위한 길이 곧 주군을 위한 길이며, 주군을 위한 일이 어림총사를 위한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주군께 견마지로를 다하려 합니다.”
자신과 이성휘를 정인관계라고 정의한 순욱의 말에 조조는 화가 단숨에 풀렸는지 죽간을 책상 위에 살포시 내렸다.
순욱이 착안하여 올린 계획안을 모두 허락한 것은 물론, 그녀가 추천하여 올린 인재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능률을 올렸다.
“정말 나와 부관이… 정인관계처럼 보이는가?”
조조가 물었다.
그에 순욱이 방긋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과 어림총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소녀는 두 분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처세술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진궁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손뼉을 치면서 순욱에게 처세술에 대한 찬사를 보냈으리라.
물론 순욱은 처세술과는 관계없이,
그녀는 조조와 이성휘를 정인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연의 마음을 밝힌 것에 불과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한 것 또한 진심이었다.
“어르신,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어르신께 따로 추천하고 싶은 인재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
“영천군 출신이며 예주 제일의 천재라 불리는 곽봉효, 비록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으나… 영천순씨 가문의 영재인 순공달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곽가. 순유.
순욱이 두 천재들을 추천했다.
현재 순유는 그 행방을 알 수 없었으므로 등용하기 어려웠지만 곽가는 현재 고향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등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에 조조는 사람을 보내어 즉시 곽가라는 인물을 동군 연주성으로 불러들이도록 명령했다.
* * *
나흘 동안 평구현에 주둔하고 있던 병주군과 시간을 보낸 이성휘는 진류왕 유협과 함께 진류군으로 향했다.
왕윤과 식솔들이 말을 탄 채 뒤따랐으며,
분위장군 여포와 중랑장 장료가 병주 기병대를 지휘하면서 진류왕의 호위를 도맡았다.
진류군은 유협의 임지이며, 또한 거처하는 가택이 진류군에 위치하였으므로 이성휘는 연주성에 돌아가기 전에 먼저 평구현까지 온 유협을 진류군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계신 동안에 이 객실에서 기거하여 주시옵소서.”
진류군에 도착한 이후,
이성휘는 진류왕이 기거하는 궁궐로 승격된 가택에서 머물게 되었다.
내실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객실로 들어오게 된 이성휘는 낙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부끄러움에 몸을 떠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읏…!”
서로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시녀가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대체 무슨 연유 때문인지… 초선은 이성휘를 피하는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이성휘는 혹시 이 아름다운 낙양제일미에게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범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명공, 쉬시옵소서…!”
초선이 급히 몸을 돌렸다.
최대한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었는지,
항상 우아하고 품위가 넘치던 시녀의 자태에서 흐트러짐을 엿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빠른 걸음으로 이성휘에게서 벗어난 초선은 힘겹게 호흡을 내쉬면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쿵쾅쿵쾅 떨리는 심장 박동.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혹시라도 명공을 객실까지 안내하는 동안 시끄럽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들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할 정도로 사랑에 빠진 숫처녀의 마음은 격하게 박동치고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했으니… 명공에게 들키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아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많이.
이성휘는 모든 일이든지 어려움 없이 척척해내는 만능 시녀가 실수투성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명공께 지금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은혜들을 입어왔는데, 대체 이 은혜들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머무는 방에 도착한 초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명공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박동쳤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은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분명히 이 마음은 이성을 향한 연모일 것이며, 연모가 향하는 대상은 분명히 명공일 것이었다.
“명공은 제가 감히… 저따위가 감히 연모할 수 있는 분이 아니옵니다…! 혹여라도 연모의 감정을 고백했다가 명공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지….”
초선은 예전부터 이성휘를 이성으로 깊이 연모해 오고 있었다.
그 연모의 마음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한 애정으로 발전했다.
연모하는 남성과 서로 살을 맞댄 채 애정을 확인받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고, 연모하는 남성의 아내가 되어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솟아났다.
“하룻밤이라도…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명공께서 소녀를 품어 주시온다면….”
짐짓 상스러운 생각 마저 하고 말았다.
하룻밤만이라도,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그에게 안긴 채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는 애욕을 품고 말았다.
정처의 지위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망이다. 초선은 정처까지는 원치 않았다. 자신은 첩으로 충분했다. 평생 명공을 옆에서 섬길 수만 있다면 육욕을 탐할 뿐인 첩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전할 기회는 오늘뿐이옵니다….”
이성휘는 오늘만 진류군에 머문 뒤,
내일 일찍 진류왕을 호위했던 병주군과 함께 연주성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오늘 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정동장군의 제장들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이성휘였기 때문에 내일 떠나면 족히 한 달 이상은 진류군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었다.
한 달.
이성휘를 보지 못 하는 한 달이라는 시각은 초선에게 있어 몹시 두려운 영원과도 같았다.
‘소녀는 명공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소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은혜들을 베풀어 주신 명공께 보답할 수 있는 것이 그 무엇도….’
두려웠다.
이대로 명공에게 잊혀질까.
그의 옆에 있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뇌리에서 자신이라는 존재가 잊힐지도 모른다는 망상은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이었다.
‘수중에 그 어떤 재산도, 재물도 없는 소녀가 명공에게 한 가지 보답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옷깃을 꾹 움켜쥐었다.
긴장감에 찬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바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옷고름을 잡았다.
내가 명공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 백분지 일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았다.
‘명공이라면, 명공을 위해서라면… 명공께서 잠시나마 기뻐해주신다면… 소녀가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해온 순결을… 바치겠사옵니다.’
가문을 구해 준 은인에게 자기 순결로 그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를 서책에서 본 적이 있다.
공이(公夷)라는 저자가 쓴 서책이었다.
사내들은 여인의 순결을 좋아하고 했다. 여린 여인에게 있어 순결은 목숨과도 같은 정절이기에, 사내들은 더욱 순결에 목을 맨다고 들었다.
명공께 순결을,
오랫동안 간직해온 처녀를 바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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