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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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장 허저에게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보필할 것을 명령한 조조는 휘하 제장들과 거느린 채 하내태수 치소를 성큼성큼 나섰다.
“권위와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황후와 조정대신들이 모두 거지꼴이 되었군.”
흑발의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 코웃음에 담긴 감정은 명백한 조소였다.
역신에게 휘둘려 모든 것을 잃은 자들,
무능과 무력의 상징과도 같은 황실과 조정의 일원들을 비웃으면서 혐오감을 내비쳤다.
“낙양 궁궐이 불길에 집어삼켜져 잿더미로 전소된 것을 보았다. 낙양은 더 이상 도읍으로 기능할 수 없겠지.”
많은 숫자의 백성들이 장안성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으며, 궁궐과 시가지는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낙양을 재건해야 한다는 여론들이 나오게 되겠지만 관동 지방관들 중 어느 누구도 낙양을 재건하기 위해 소요될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력을 감당하려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었다.
“언니,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권위와 권세를 모두 잃은 자들이다. 저들을 거둔다면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할 수 있을 터.”
지아비가 역적에게 끌려가는 것을 눈물 흘리며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황후.
구사일생 끝에 불길에서 구출된 조정대신들.
황후와 조정대신들은 천하의 명성과 재야의 명사들을 끌어낼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다.
그래서 조조는 갈 곳 없는 떠돌이가 되어 버린 그들을 품에 안으려 했다.
“맹덕.”
조조의 옆을 지키던 붉은 머리카락의 여걸이 팔을 뻗으면서 발걸음을 제지했다.
여포와 휘하 장수들이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가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알현한 뒤에 치소를 나서기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여봉선.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흥.”
흑발의 여인과 금발의 여인이 매서운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압도적인 무위와 용맹을 떨친 여포.
백만에 이르는 황건적 군세를 격파하고 연주를 제패한 조조.
천하를 요동치게 만든 두 여걸들이 창검을 무장하는 장졸들을 좌우에 둔 채 대치하게 되었다.
“낙양 이후 처음인가.”
“그래, 아마도 그럴 거야. 형양에서 지독하게 싸웠지만 얼굴을 보진 못했으니.”
동탁 군에게 사방이 포위된 채,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조조군을 구한 것은 분명 장료가 이끄는 병주군이었다.
사지에 놓였던 이성휘와 종제들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 조조는 팔을 들어 올리면서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장졸들을 뒤로 물렸다.
“이제 우리가 황후 폐하와 조정대신들을 호위할 터이니 너희들은 병주로 물러나라. 내 부관과 종제들을, 그리고 장졸들을 구해줬으니 뒤를 쫓지는 않겠다. 조맹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조조는 여포를 향해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너희의 터전인 병주로 얌전히 물러나라.
순순히 물러난다면 결코 그 뒤를 쫓지는 않겠다.
부탁이 아닌 요구,
그리고 요구보다는 최후통첩에 가까운 경고였다.
“누구 마음대로 물러나? 우리는 조정으로부터 관직까지 받은 조정군인데.”
“조정군이라…. 얼마 전까지 동탁을 따랐던 무리가 황실과 조정에 충성하는 조정군이 되었다는 말인가. 낯짝 한 번 두껍군.”
포악함에 찬 눈빛과 표독스러운 눈빛이 뜨거운 불길처럼 첨예하게 대립했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두 여걸들 사이에 흉흉한 기세가 몰아쳤다.
여포가 조조에게 꺼림칙함을 느끼듯, 조조 또한 여포에게 혐오와 비슷한 악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본능에 따른 감정이라고 할까. 여포와 조조는 결코 친분을 쌓을 수 없는 최악의 궁합이었다.
“맹덕 님.”
들불에 번지는 불길처럼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열되기 시작한 것을 느낀 이성휘가 도중에 개입했다.
“무슨 일인가, 귀관.”
“여포와 병주군은 이미 조정대신들의 교서를 받고 조정군의 벼슬을 받은 몸입니다. 교서를 부정하며 병주군을 내친다면 황실과 조정의 신망을 잃게 될 겁니다. 그러니 우선 병주군에게 황후 폐하와 조정대신들의 호위를 맡기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들을 조정군으로 인정하란 말인가.”
마치 병주군을 변호하는 듯한 이성휘의 행동에 조조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여포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암캐 같으니라고.
궁지에서 구해 준 것을 빌미로 내 부관을 그 음탕한 몸으로 꼬신 게 틀림없었다.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유방과 풍만한 엉덩이를 자랑하는 쭉쭉 빵빵한 몸매의 미녀를 노려보았다. 그 음탕한 몸만큼이나 천박한 미인계를 써서 부관을 꼬드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황실과 조정에 인연이 깊은 부관이 미리 손을 써 준 게 분명하군. 여포, 저 멧돼지나 다름없는 년이 머리를 굴릴 줄 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병주군을 옹호하는 그의 모습을 본 조조는 황실과 조정의 중론을 모은 인물이 이성휘라는 것을 단번에 간파했다.
이성휘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성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포와 병주군을 구명하기 위해 황실과 조정을 움직인 이성휘의 행동에 조조는 분한 듯 입술을 꾹 깨물면서 야속하다는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설마…, 저 무식하게 커다란 젖통에 넘어간 건 아닐 테지? 만약 천박한 미인계에 넘어간 것이라면 귀관을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
붉은 눈동자에 시기와 질투의 감정에서 비롯된 불길이 삽시간에 치솟았다.
낙양을 불태웠던 불바다보다 맹렬한,
일이월에 폭염을 떨치게 만들 정도의 질투가 맴돌았다.
“숭산 전투의 참패로 승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동탁을 배신한 것일 터. 동전 뒤집듯이 주군을 바꾸고, 전쟁에서 패할 것 같아 비굴하게 머리를 숙여대는… 참으로 꼴사나운 년이로군.”
“뭐가 어쩌고 어째!!”
모멸감에 찬 조조의 힐난에 여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격노를 토해냈다.
면전에서 모욕당했다.
그것도 얼굴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미는 꼬맹이 년에게.
당장에라도 조조를 덮칠 것처럼 여포가 이를 빠득 갈자 긴장된 표정을 지은 하후돈이 칼자루를 쥐었다.
“…젠장.”
그러나 그 예상과는 달리,
여포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를 호위하고 있던 이성휘의 눈치를 보더니 격앙된 기세를 거둔 채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슴없이 주인을 무는 번견답지 않게 인내할 줄은 아는군.”
기세에 눌린 여포의 모습을 노려보던 흑발의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화를 간신히 억누른 여포의 옆을 지나쳤다.
조조가 발걸음을 움직이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병주군 장졸들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길을 냈다.
여포에게 폭언을 연이어 퍼부었던 조조에게 앙심을 품은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누구도 조조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했다.
“…….”
조조와 여포,
만나자마자 첨예한 신경전을 벌어대는 두 여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성휘는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 * *
처소로 마련된 가택에 도착한 조조는 노여움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와 독대했다.
자신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여포와 병주군을 조정군으로 끌어들인 이유와 그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이성휘를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부하로서 총애하고 있었지만 아군을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는 독단에 대한 죄는 반드시 물어야 했다.
게다가 이성휘는 지금까지 조조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수차례 독단을 범한 바가 있었다.
“대체 왜 그랬나. 대체 무엇을 위해… 여포를 끌어들였지? 그년이 주군을 여러 번 갈아치운 배반의 무장이라는 것을 귀관 또한 알고 있을 터.”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서릿바람차람 싸늘한 조조의 물음에 이성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포는 수백 명에 불과한결사대를 이끌고 동탁 군의 방어선을 격파한 맹장입니다. 또한 그녀의 휘하들은 백전의 강병들입니다. 맹덕 님께서 병주의 번견들을 길들이신다면 필시 천하를 제패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여포가 무맹도위 정원과 태위 동탁을 배신했던 것은 그들이 무능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정원은 부하들을 사지에 던진 채 도망치려 했으며, 동탁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거주하는 낙양에 방화를 일으킴으로서 병주군의 신망을 잃었다.
하지만 조조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여포와 병주군을 길들일 수 있는 압도적인 권위와 절대적인 능력이 있었다.
이성휘는 조조가 여포와 병주군을 모두 품을 수 있는 군주임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나더러 병주의 번견들을 길들이라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귀관은 항상 나에게 어려운 숙제들을 매번 던지는군. 진류왕을 떠안게 만든 것 역시 귀관이 나에게 건넨 숙제가 아니었는가.”
“진류왕에 대해선… 맹덕 님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연한 표정을 짓는 이성휘의 모습에 흑발의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귀관이 나를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지금까지 수많은 혈전과 접전들을 반복해 오지 않았는가. 여포와 병주군을 길들이라는 것 또한 충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터.”
이성휘를 바라보는 조조의 시선에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 남자를 계속 손아귀에 쥐고 싶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오로지 나만의 남자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너무도 강렬한 광채를 가진 남자였기 때문이다.
빛은 만물을 비추기 때문에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만약 암막에 가둬둔 채 꽁꽁 묶어둔다면 그 빛은 금세 가치를 잃고 추락해 버릴 것이었다.
“만약 여포와 병주군을 거둔다면… 귀관은 어찌하겠는가.”
“제가 직접 병주군을 이끌고 맹덕 님에게 잘게 분열된 천하를 바치겠습니다.”
조조의 물음에 이성휘는 결연함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날카로운 칼끝처럼 올곧은 그 모습에,
조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흠… 흐흠…! 의기양양한목소리로 호언장담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귀관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내게 충성심을 증명할 텐가.”
그에 이성휘는 조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사리처럼 고운 손길을 맞잡으며,
새하얀 손등에 충성을 뜻하는 입맞춤했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듯.
부드럽고 강렬한 입맞춤을 비단처럼 부드러운 조조의 손등에 새기면서 결코 딴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전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 절대로 맹덕 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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