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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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을 정리한 조정대신들이 교서를 발표하여 병주군에게 조정군의 벼슬을 하사했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까.
금발의 여인은 들뜬 한숨을 내쉬면서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자연스레 붉어지는 사내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방법을 고민했다.
“돈? 재물? 어떻게든 재물을 모아야 하나? 아냐…, 한눈에 보기에도 그 녀석은 재물을 밝히는 성정은 아니었어. 그럼 대체 어떤 방법으로 빚을 갚지?”
배은망덕한 배반의 무장이라 불리는 악명과는 달리 여포는 타인에게 받은 은혜를 중시하는 성정이었다.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갚아야 했다.
다시 무명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중원제일 검의 은(恩)을 등한시한다면 자신이 배반의 무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은혜를 갚냐고.”
방에 누운 여포가 늘씬한 두 다리를 뻗으면서 장롱에 원을 그리듯 발을 움직였다.
오랜 칩거에서 얻은,
방구석개 백수의 버릇이었다.
장료가 이를 보았다면 “품행을 정돈하여 주십시오, 봉선 님.”이라며 즉각 행동거지를 바로 고칠 것을 주문했을 것이다.
“그 녀석은… 대체 왜 우리를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여포가 중얼거렸다.
중원제일 검은 목숨을 빚진 것에 대한 답례라고 말했다.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면…
나, 나한테 반했기 때문이라든지.
그렇지 않고서야 형양에서 사투를 벌였던 적들에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챙겨줄 리가 없었다.
“진짜… 나한테 반한 걸지도. 하지만 나 같은 선머슴을 대체 왜…! 물론 내가 진짜 선머슴처럼 생겨 먹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포는 일반 여자들처럼 용모와 미용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중원제일 검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런 추측하면서부터 난생처음으로 용모와 미용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내들은 모두 귀엽고 아름다운 용모의 여자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 녀석도 사내이니 당연히 귀엽고 아름다운 용모의 여자를 좋아할 터.
“문원한테 말해서… 화장하는 방법이나 좀 배워볼까…. 물론 나는 그 녀석을 숙적 겸 은인으로 생각할 뿐이지만…! 그 녀석이 나를 좋아하니까… 선심을 써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몸을 돌려서 바닥에 엎드린 여포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이성휘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에 젖은 웃음을 흘렸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무심코 실웃음을 흘릴 정도로 기쁨이 몰려들었다.
특히 중원제일 검이 나한테 홀딱 반해서 목숨을 빚진 은혜를 갚겠다는 명목으로 성심성의껏 돕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쿡쿡 흘러나왔다.
“으히히! 하여간 예쁜 건 알아가지고…!”
잘 익은 살구처럼 뺨을 붉힌 금발의 여인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두 발을 동동 굴렀다.
“중원제일 검, 이 응큼한 놈! 대체 내 어떤 점에 반했지? 용맹하게 싸우던 내 모습에 반했으려나…! 늠름하고 아름다운 나를 봤다면 당연히 반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여포는 ‘나한테 반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중얼거리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하기도 전에 암탉의 머릿수를 헤아리듯, 금발의 여인은 머지 않아 중원제일 검이 자신에게 청혼을 해 올 것이라는 매우 위험한 어림짐작했다.
“봉선 님!”
문 너머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방바닥에 누워 행복에 젖은 실웃음을 흘리던 금발의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무심코 흘린 침을 닦으면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급히 정돈했다.
“문원, 무슨 일인데?”
“정동장군 조조가 군세를 이끌고 하내군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해요!”
“조조? 그 상꼬맹이?”
“예!”
정동장군 조조.
그녀가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내군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급보를 듣게 된 여포는 우려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 * *
낙양을 급습했던 이성휘가 하내군까지 병주군과 동행하였다는 결코 믿지 못할 정보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휘가 하내군에 있는 것은 분명했으므로 조조는 급히 북쪽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부관. 내가 갈 터이니!’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적을 세운 일등 공신은 당연히 이성휘였다.
불과 2천 밖에 안 되는 소규모 병력으로 1만이 훨씬 넘는 동탁 군을 격파하고 총대장 화웅을 참수했음은 물론,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구하기 위해 낙양을 급습하여 사투를 치렀다.
그는 관동 제후군의 영웅이다.
어느 지방관들도 해내지 못한 공적들을 기록한 이성휘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속도를 높여라.”
“전군은 속도를 높여라!!”
조조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허저가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면서 전군에 정동장군의 명령을 하달했다.
그렇게 전속력으로 달려,
조조가 이끄는 기병대가 마침내 하내군에 도달하였다.
하내군에 도달하자마자 흑발의 여인은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내와 재회하게 되었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그는 장수들과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맹덕 님.”
“부관!”
무뚝뚝 하고 진지한 얼굴이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재회인데 저런 무뚜뚝한 얼굴이라니. 짐짓 매정하게 보였다.
하지만 조조의 눈에는 이성휘의 그 무뚝뚝한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조금만 용기가 있었다면 뺨에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맞춤 세례를 퍼부었을 것이었다.
“다친 곳은 없는가?”
“예, 저는 괜찮습니다.”
“전령들이 보내온 소식들을 통해 귀관이 큰 승전보를 거뒀다는 것은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많았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귀관이 내게 죄송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진지하게 사과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차분한 안도감이 들었는지 조조가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여전했다.
항상 무뚝뚝 하고 성실하고… 변한 점이 없었다.
무거운 태산처럼 변함없는 모습의 이성휘를 본 조조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기뻐했다.
그 변함없는 모습에 지금까지 심중을 괴롭혀온 모든 근심들이 잠깐 내린 눈처럼 사르륵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여어, 맹덕. 네가 무뚝뚝한 부관을 끔찍이 아낀다는 것은 알지만 사촌들도 좀 봐달라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언니.”
이성휘를 향해 찬연하게 빛나는 기쁨과 환열을 발산하고 있던 조조에게 하후돈과 조인이 다가왔다.
하후돈은 짓궂은 웃음을,
조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원양. 자효. 무사해서 다행이군.”
“뭐야, 그 밍숭맹숭한 반응은? 부관에게 했던 반응과는 완전 정반대네. 이렇게 차별해도 되는 거야?”
“큭! 시끄럽다!”
하후돈의 이죽거림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흑발의 여인이 소리쳤다.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 사촌들과 재회의 회포를 풀고 있는 조조에게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맹덕 님. 긴히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귀관?”
“현재 하내군에 머무는 아군은 동탁 군에 맞서 거병했던 병주군과 함께 주둔하고 있습니다.”
“병주군…, 여포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군이 현재 병주군과 함께 하내군에 주둔하고 있다는 이성휘의 말을 듣게 된 조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포가 누구던가.
양부를 살해하고 동탁에게 빌붙었던 배반의 무장이다.
대체 무슨 연유 때문에 결코 상종해선 안 될 역신과 함께 하내군까지 동행하게 된 것인지, 조조는 이성휘에게 찬찬히 지금까지의 경과들을 듣기로 했다.
* * *
이성휘를 대동한 채 하내군(河內郡) 회현(懷縣)으로 입성하게 된 조조는 구사일생 끝에 살아남은 황후 당씨와 조정대신들을 알현했다.
조조가 휘하 제장들을 이끌고 하내태수 치소로 입성하자,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본 조정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다.
정동장군(征東將軍) 조조.
연주를 제패한 패자에게 의탁한다면 무너졌던 조정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푸른색의 갑옷을 걸친 흑발의 여인이 공손하게 예를 취하면서 황후 당씨에게 인사했다.
그에 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용무쌍한 관동의 지방관들이 도탄에 빠진 황실과 조정을 구원하고자 달려와 준 충성을 결코 잊지 않겠네.”
“감읍한 말씀이십니다.”
“허나 황망하게도 황제 폐하께서는 역신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끌려가셨네. 이 자리에 없는 고관들 또한 오만불손한 역도들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지.”
황제 유변이 장안으로 끌려갔으며,
조정대신들 또한 반절이 넘는 숫자 또한 장안성으로 압송되었다.
이성휘와 여포의 도움으로 여러 곡절들 끝에 살아남은 인원들은 반쪽짜리, 구색조차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인원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역신에 의해 궁궐까지 모두 불타버렸네, 정동장군. 미안 하네만 서둘러 황후 폐하를 모실 곳을 찾아봐주게.”
상서복야 사손서의 말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급히 찾아보겠다고 대답했다.
하늘 높은 권위와 권세를 자랑하던 황실과 조정이 몸을 의탁할 곳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철저히 몰락하고 말았다.
명망 높은 고관대작이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부탁하는 모습에 조조는 속으로 비웃음을 보냈다.
“연주(兗州)…, 아니면 예주(豫州)에 거처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주는 거병의 중심지.
그곳에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둘 순 없었다.
그래서 조조는 연주와 이웃하고 있으며, 사예주와도 인접하는 예주를 거론했다.
마침 예주에 새 중심지로 눈여기고 있는 군현이 있었으므로 황후와 조정대신들은 그곳에 안치하고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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