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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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군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 끝에 살아남은 조정대신들은 침음을 삼키면서 현재의 국면에 대해 의논했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이 늙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으나 작금의 사태가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소.”
사도(司徒) 왕윤의 말에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를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낙양을 한순간에 잃고 말았다.
동탁의 무리가 일으킨 불길에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부귀와 영화가 한 줌의 잿더미가 되었다.
한나라 4백 년 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조정대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들, 다들 끌려가고 말았소이다….”
양표가 고개를 숙이면서 동탁 군에게 끌려간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걱정했다.
자신은 장안 천도에 앞장서서 반대했다가 동탁에게 면직된 덕분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관료들이 동탁에게 붙잡혀 장안성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 생사를 알 수 없는 황제와 관료들을 심려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중영, 이 금수 같은 놈!”
“광무황제(光武皇帝)께서 천 명을 받아 세우신 도읍을 불태우다니!”
넝마가 된 의복을 입고 있던 조정대신들이 동탁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반평생을 몸담았던 조정을 한순간에 잃게 된 고관대작들은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위세를 잃었음을 증명하듯, 천하의 질서와 규율을 호령했던 조정대신들은 비좁은 골방에서 머리를 맞댄 채 의논하고 있었다.
“자칫 참변을 겪으실 뻔한 황후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만… 오만불손한 동탁이 황상을 업신여기면서 위해를 가하진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폐하께서 무사하셔야 할 터인데…!”
동탁은 천하에 다시없을 역적이다.
낙양을 불태우는 악행을 저지른 만큼,
황제에게 포악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았다.
조정대신들은 유약한 성품의 황제를 걱정하면서 근심에 찬 시름을 토해냈다.
“사도 어르신.”
조정회의가 이어지고 있는 골방의 장지문이 열리면서 이성휘가 왕윤을 불렀다.
그에 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성휘와 함께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어르신께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권세를 잃고 추락하게 된 이 늙은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돕겠네.”
왕윤의 관대한 대답에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취한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중랑장 여포와 병주군을 사면해주십시오.”
“그 말은… 조정의 이름으로 병주군에게 면죄를 내리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성휘의 확고한 대답에 왕윤은 당혹감에 서린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여포는 양부를 살해한 배신자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게 불의(不義)와 불충(不忠)을 저지른 것은 물론, 심지어 불효(不孝)까지 범하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게다가 병주군은 동탁의 명을 받고 여남군(汝南郡)과 영천군(穎川郡)을 습격하였으며, 예주자사 공주와 영천태수 이민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대죄를 범한 적이 있었다.
온갖 악명들을 쌓은 병주군을 조정의 이름으로 모두 사면해 달라는 이성휘의 부탁에 왕윤은 침음을 삼키면서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병주군이 가세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참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활약은 지금까지 지은 죄들을 덮고도 남습니다.”
“물론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만….”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왕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성휘의 의견에 동조했다.
“중랑장이 동탁 군에게 쫓기던 나와 내 일문을 모두 구해주었네. 내 어찌 그들의 활약을 모르겠나. 하지만 섣불리 사면을 내렸다간 관동의 지방관들이 크게 반발할걸세.”
“제가 진류왕 전하와 정동장군, 그리고 정북장군을 모두 설득하겠습니다.”
“음.”
진류왕 유협은 관동의 정당한 궐기를 상징하는 명분이며, 또한 정북장군 원소와 정동장군 조조는 관동 제후군을 이끄는 맹주와 부맹주였다.
그리고 또한,
동탁에게 강한 원한을 가진 사대부와 호족들이 크게 반대하겠지만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1만 명에 달하는 낙양 백성들을 불길 속에서 구한 활약들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성난 여론을 천천히 잠재울 수 있을 것이었다.
“사도 어르신,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병주군의 사면을 위해 고개를 숙일 정도로 깊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성휘의 모습에 왕윤은 결국 부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찌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왕윤은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해 준 중원제일 검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조정대신들과 상의하여 여포와 병주군에게 사면령을 내릴 것을 검토하겠네만…, 병주의 무법자들을 길들이는 것은 자네의 역할 일세.”
“예, 알겠습니다.”
왕윤은 이성휘의 부탁을 들어 주기 위해 자기 정치생명을 담보로 걸었다.
여포와 병주군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불의와 불충, 불효를 범했지만 영웅호걸다운 용맹과 의협을 보여 준 것 또한 사실이다.
사력을 다해 불길 속에 갇힌 백성들을 구출하는 병주군의 모습을 본 왕윤은 이성휘의 부탁을 받아들여 그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 * *
하내군에 도착한 이후,
여포는 몇 번이고 이성휘를 만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매번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딱히 숨을 이유도,
딱히 피할 이유도 없을 텐데….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을 폭 붉힌 채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으으으으, 으아아아아!!”
연무장에서 방천화극을 휘두르던 금발의 여인이 돌연 비명을 내질렀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전장에서 힘껏 내지르는 사자후보다도 큰 성량이었다.
‘제, 젠장! 젠장, 젠장!! 뭐가 부끄럽다고 번번이 그 녀석을 피하는 건데!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잖아?!’
뜨거운 열기가 담긴 호흡을 씩씩 토해냈다.
궁궐에서 동탁 군 놈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번조라는 놈을 단숨에 베어 버리고 자신을 구해줬을 때부터 알 수 없는 ‘간질간질함’이 마음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때로는 짜증이 나고,
때로는 웃음이 그려졌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텐데… 검을 휘두르면서 싸움에 난입하여 대뜸 “구하러 왔다.”라고 말했던 이성휘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나를 구하러 왔다고 했었지…. 개미떼처럼 모인 동탁 군 놈들을 뚫으면서까지…!’
왜지.
어째서 나를….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구해 준 걸까?
형양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였고, 결투 끝에 쓰러트린 상대가 아닌가.
분명 나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나를 그 사지(死地)에서 구해 준 걸까.
‘서, 설마… 나를 좋아하나?’
곰곰이 그 이유에 대해서 추측하던 여포는 중원제일 검이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해서 구해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온몸에 도는 피가 머리에 몰린 것처럼,
그러한 추측을 한 여포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붉은 갈기를 가진 적토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여포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머리 위에 물을 가득 넣은 찻주전자를 올리면 금방 끓을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좋아하는 여자를 단숨에 베어 버리는 남자가 세상에 있겠냐고?!”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다.
망상…
그래, 이건 망상이다!
중원제일 검이 나를 이성으로 연모하여 적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구해줬다, 라는 추측은 이치에 맞지 않는 헛된 생각에 불과했다.
‘아직도 상처가 욱신거린다고! 그리고 몇 번이나 봉합했던 상처가 터졌단 말이야! 지, 진심으로 날 죽이려고 했어!’
하지만 여포는 자신을 철저히 무인으로서 대우해준 이성휘에게 경의를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여자라는 이유로 적당히 봐줬더라면 진심으로 그를 증오했을 것이다.
잠시 투덜거린 것은 중원제일 검의 내심을 모르겠다는 의미의 짜증일 뿐, 자신을 존중하여 단기결전에서 전력을 다한 이성휘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래도 나와 부하들을 그 사지에서 구해줬으니까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여포는 투박하고 사나운 성정을 자랑하는 여인이었지만 타인에게 받은 은혜를 등한시할 정도로 막돼먹은 성정은 결코 아니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목숨을 구명 받은 은혜는 목숨에 준하는 은혜로 보은해야 마땅하다.
장료와 고순이 이끄는 정예부대가 동탁 군에게 사방으로 포위된 이성휘와 조조군을 구원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봉선 님.”
금발의 여인이 방천화극을 쥔 채 달콤한 번민에 빠져 있을 때, 둔영을 방비하던 송헌이 다가왔다.
“어림총사가 봉선 님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뭐, 뭐?”
송헌의 말에 여포가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두 눈을 맹렬히 부릅뜨며,
중원제일 검이 직접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던 송헌을 대뜸 노려보았다.
“그 녀석이 왜! 왜 나를 보려고 하는데?”
“아,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잘….”
여포의 거친 반응에 송헌은 당혹감에 찬 반응을 보이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림총사를 돌려보낼까요?”
중원제일 검의 만남을 꺼려하시는 게 분명하다, 라고 판단한 송헌은 이성휘를 물리려 했다.
과연 우둔하게 보일 정도로 투박한 성정을 자랑하는 병주 출신다운 생각이었다.
“아냐! 안으로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중원제일 검은 생명의 은인이다.
그런 은인에게 축객령을 내릴 순 없었다.
빠르게 심호흡하면서 뜨겁게 용솟음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여포는 붉게 달아오른 두 눈을 끔뻑이면서 심기일 전에 들어갔다.
“여포.”
곧이어 이성휘가 송헌의 안내를 받으면서 연무장에 있던 여포에게 다가왔다.
이성휘의 모습을 본 순간,
호랑이처럼 용맹하기로 유명한 비장의 심장이 맹렬하게 박동쳤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
부끄러움에 떠는 내심이 들킬까,
여포는 애써 무뚝뚝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성휘에게 물었다.
그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차대한 일이다.”
“주… 중차대한 일?!”
물론 그 무뚝뚝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연 이성휘의 말에 여포는 금방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대체,
중차대한 일이라는 게 뭘까.
‘설마… 고백?’
고백.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금발의 여인은 어깨를 움찔 떨면서 기대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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