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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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동주(吳越同舟)처럼 불편한 동행을 이어나가게 된 조조군과 병주군은 하내군(河內郡)에 도착한 이후에도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조 군은 관동을 시산혈해로 만들었던 병주군을 향해 적개심을 표출했으며, 병주군은 형양 전투에서 수많은 전우들을 살해한 조조 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적이라고 하기엔 밀접했고,
동맹이라고 하기엔 적대적인 관계.
동탁 군이라는 공동의 적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관계였다.
‘…결국 황제를 구하지 못했다.’
회현(懷縣)에 위치한 하내태수의 치소에 머물게 된 이성휘는 간발의 차로 유변을 구하지 못했음에 회한을 드러냈다.
황제를 구하지 못했으며,
또한 낙양을 구하지도 못했다.
기적적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달성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들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차라리 그때…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어야 했나.’
작은 황녀의 웃음을 보고 싶었기에.
황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걱정과 근심을 어떻게든 덜어 주고 싶었기에.
그래서 장담해선 안 될 약속했다.
나를 영웅처럼 바라봐주는 귀여운 아이에게 실망을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성휘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면서 근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청초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흑발의 여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장료였다.
병주의 비장을 섬기는 부관이며,
기민한 통솔력과 용맹한 무위를 자랑하는 여걸이었다.
군청색에 물든 흑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수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휘에게 물음을 보냈다.
“아니, 없다.”
“표정은 아닌데요?”
“원래 얼굴이 이렇다.”
“어머나.”
이성휘의 즉답에 장료가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상대를 놀리려는 듯이,
당신과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의 호의를 보냈다.
“불길 속에서 낙양 백성들을 구해 줘서 고맙다. 언젠가 반드시 빚을 갚지.”
“당연히 해야 될 일이죠.”
이성휘의 정중한 감사 인사에 장료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동탁 군을 위해 싸웠던 저희는 결코 책임을 피할 수 없겠죠. 불길 속에서 목숨 걸고 백성들을 구한 것은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죄책감을 씻기 위한 발악,
무거운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비열한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연 장료는 불길을 뚫어내면서 백성들을 구출했던 자기 행동을 위선(僞善)에 불과하다며 깎아내렸다.
“그 위선 덕분에 1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설령 위선이라 할지라도…, 나는 너희의 그 위선에 경의를 표한다.”
“후후, 중원제일 검께서 저희들을 위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흑발의 여인이 쑥스러움에 물든 미소를 지었다.
칭찬을 받아 기뻤는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너희들이 구한 백성들 중에는… 내 지인들도 있었다. 낙양에서 성문교위를 지냈을 때 알고 지낸 지인들이지.”
만약 그들이 모두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낙양에서 끔찍한 참변이 벌어지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처하지 않았던 스스로에게 혐오를 느꼈을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동탁이 제후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낙양에 불을 지르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대처조차 하지 않았지. 내 과태와 태만함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낙양 백성들을 죽음에 내몰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중 무사히 낙양을 탈출한 인원은 겨우 1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장안성으로 끌려가거나,
불바다가 된 낙양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었다.
낙양 전역에 치솟은 불바다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척후병에게 들은 이성휘는 미리 참변을 막지 못했던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게다가 유변을 구하지도 못했지.’
이성휘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자기 무능력함을 한탄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어림총사. 저희들 또한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지르리라는 것을 열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전에 막지 못했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가벼이 넘겨선 안 될 일이겠지만… 한 사람이 모든 죄책감을 떠안을 일 또한 아닐 거예요.”
장료의 따스한 위로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누나에게 자상한 위로를 받은 듯한,
그리고 따끔하게 훈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병주군과는 여전히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자신을 위로해온 장료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고맙다.”
“별말씀을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성휘가 장료를 향해 말했다.
“여포에게 전해라.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의지하라고.”
“네?”
“동탁의 명령으로 여남군과 영천군을 급습했던 너희들은 관동의 공적으로 낙인이 찍힌 상태다. 동탁을 놓쳐 버린 관동 지방관들은 대신 너희를 노리겠지.”
병주군은 황후 당씨를 구출했으며,
사도(司徒) 왕윤과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의 목숨을 구했다.
또한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불길 속에서 구해 내는 활약까지 세웠다.
한나라 황실과 조정을 구한 병주군은 군세를 일으킨 관동 지방관들의 활약을 능가하는 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관동의 지방관들이 저희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텐데요.”
“진류왕 전하를 설득하겠다. 진류왕 전하께서 교지를 내린다면 강경한 성정의 지방관들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
적극 돕겠다는 이성휘의 말에 장료가 물었다.
“어째서 저희에게…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죠?”
그 말에 이성휘가 답했다.
“목숨을 빚졌으니까.”
* * *
난공불락의 요새를 사수하던 서영이 마침내 불리함을 깨닫고 패주했다.
결국 관동 제후군을 지독하게 괴롭혀댔던 철옹성의 관문은 활짝 열리게 되었다.
“놈들의 물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소이다!”
“흐하핫! 물자들을 버려 둔 채 달아나다니…! 놈들이 크게 급했던 모양이오.”
칠전팔기 끝에 사수관을 점령하게 된 관동 지방관들은 오만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빨리 낙양으로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낙양으로 진격하여 제후군의 대장기를 꽂아야 한다고 재촉했다.
전횡과 폭정을 일삼았던 역적을 축출하고 한나라의 수도를 수복했다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에 고양감을 느낀 지방관들은 자만에 찬 모습을 보였다.
“정북장군, 선봉을 맡겨 주시오!”
“맹렬히 추격한다면 낙양으로 달아나고 있을 서영의 목을 취할 수도 있을 것 이외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사수관 공격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주제에 이제 와서 선봉을 맡겨달라는 지방관들의 뻔뻔한 요구에 금발의 여인은 혀를 내둘렀다.
빌어먹을 작자들 같으니.
허영심에 찬 샌님들답게 그 작태가 참으로 간사했다.
일군을 지휘하는지방관들이라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속물에 철면피 같은 뻔뻔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방관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나, 본초.”
“맹덕?”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 또한 맹주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만.”
공을 세울 생각에 혈안이 된 지방관들을 옹호하기 시작한 조조의 모습에 원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들의 더러운 속셈을 모르진 않을 터.
그런데도 저들을 긍정하는 조조의 모습에서 기이한 의심을 느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들을 옹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봉을 맡겨달라는 지방관들의 거센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원소는 결국 조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허락하게 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요, 맹덕.”
“별다른 속셈은 없다. 그저 지방관들의 건투를 기원할 뿐이지.”
“말해 줄 수 없단 뜻이군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조조의 모습에 원소는 무거운 근심을 느꼈다.
불안감을 느낀 원소는 다른 지방관들과 함께 출격하려는 종형(從兄) 원유를 만류했다. 필시 큰 화가 들이닥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 *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 제북상 포신을 위시한 지방관들이 군세를 이끌고 출격했다.
한시라도 빨리 낙양으로 가야 한다.
역적에게 빼앗겼던 낙양을 탈환하여 대의의 기치를 세웠다는 명성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인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낙양을 탈환하기 위함이었다. 드디어 그 숭고한 목적이 달성되려 하고 있었다.
“서둘러라! 더 서둘러라!”
“어림총사가 낙양에서 홀로 고전분투하고 있을 터! 우리가 가서 구해야 한다!”
야욕에 휩싸인 지방관들이 말을 끊임없이 재촉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계속해서 강행군을 몰아붙였다.
사수관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 걸음에 주파할 수 있는 단거리는 아니었다.
강행군을 이어 나갈수록 병력이 장사진처럼 길게 늘어지게 되었다.
‘보십시오, 숙부님! 제가 양국교씨(梁國橋氏) 가문의 명성을 세우겠습니다!’
‘낙양을 공격하고 있을 어림총사를 도와 전투를 승리로 끌어낸다면 전쟁의 주역이 될 수 있을 터! 전쟁의 일등 공신은 이 유공산이다!’
부대들 간의 거리가 늘어지고,
강행군에 지친 장졸들이 하나둘씩 전열을 이탈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공명심에 휩싸인 지방관들은 낙양에서 공훈을 세울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오만에 찬 그들을 심판하려는 듯,
지방관들의 병력들이 낙양으로 이어진 길목을 따라 산기슭을 통과하려 할 때 공세가 시작되었다.
“놈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쏴라! 모조리 죽여라! 역적들을 모두 참하라!”
날카로운 화살들이 장대비처럼 쏘아지면서 무방비하게 노출된 제후군을 공격했다.
산기슭을 반쯤 통과했던 제후군은 난데없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도독 서영이 이끄는 병력이었다.
사수관 전선에서 철수한 정예군단은 낙양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산기슭에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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