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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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중앙군을 분멸하고 낙양 성문을 돌파한 이성휘가 흑발의 여인을 향해 날카로운 칼끝을 겨눴다.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병주군은 동탁 군 휘하의 병력이었으므로 필시 그들과 함께 낙양에 불을 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모두 몰살 시키라는 이성휘의 명령에 의병들을 이끌던 관우와 장비가 격앙된 표정을 지으면서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동탁의 명을 받고 낙양에 불을 지른 건가….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거주하는 낙양 시가지에 망설임 없이 불을 지를 줄이야.’
성문교위에 부임되어 2년 동안 낙양의 성문들을 감독해온 이성휘였기에, 낙양에 불을 지른 동탁 군의 만행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병주군 또한 대방화에 관련이 있을 터.
이성휘의 분노는 동탁의 만행에 협조했음이 분명한 병주군을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동탁 군이 아니다!”
“낙양에 불을 지르려는 동탁의 만행에 맞서 거병하여…, 불길에 갇힌 백성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장료를 보필하던 무관들이 성문을 등진 채 막고 있던 이성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이성휘는 귀를 닫은 듯,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큭!”
“거, 검을 들어라!”
화광에 반사되어 빛나는 검을 늘어뜨린 채 걸어오는 검귀(劍鬼)의 모습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날.
낙양의 불바다를 담아낸 듯 불그스름하게 물든 검신.
용력과 맹위의 상징이었던 여포를 쓰러트린 중원제일 검을 대적하게 된 병주군 무관들은 침음을 토해내면서 두려움의 감정을 내비쳤다.
“성문이다!”
“사, 살았다! 드디어 성문이 보인다!”
검을 늘어뜨린 이성휘와 장료를 호위하는 무관들이 서로 충돌하려 할 때,
병주군의 도움으로 불바다에서 빠져나온 낙양 백성들이 밀물처럼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수많은 백성들을 목격하게 된 이성휘가 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멈춰라. 낙양 백성들이다.”
혹시 병주군이 준비한 함정이 아닐까,
그렇게 잠시 생각했던 이성휘였지만 처참한 몰골을 한 군중들은 진짜 민간인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불길을 뚫고 성문에 도달하게 된 백성들이 교전을 벌이기 직전이었던 일촉즉발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관동에서 온 군대다!”
“우리를 구하러 온 게 분명해!”
재와 그을음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거지꼴이나 다름없던 백성들이 환희에 찬 함성을 토해냈다.
백성들이 싸움에 휘말리게 둘 수 없었던 조조군과 유비군은 경직된 표정을 지은 채 병주군을 향하던 창검을 서서히 거두게 되었다.
“성문교위님!”
불길을 피해 성문까지 도망쳐 온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인원들 중 일부가 이성휘에게 다가왔다.
이성휘가 아는 얼굴이었다.
성문교위에 부임되었을 때,
이성휘가 치안을 감독하는 담당지에 거주하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낙양의 성문교위였던 이성휘와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을 천재일우라고 느꼈는지,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을 붙잡듯 이성휘에게 매달렸다.
“도, 동탁 군 놈들이 불을 질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병주 장졸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성문교위님을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낙양 백성들의 안도와 울분 섞인 외침들을 듣게 된 이성휘가 장료에게 시선을 향했다.
저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동탁 군에 맞서 거병한 것은 물론,
참화에 휩싸인 시가지에서 백성들을 구출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말이다.
“서, 성문교위님…!”
이성휘는 무수히 많은 군중들 속에 섞여 있던 또 다른 지인을 만나게 되었다.
순찰을 돌던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던,
항상 살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해주던 꽃집 처녀였다.
자신과 함께 주변을 돌던 전군교위 조조에게 꽃다발을 선물해준 적이 있었던 묘령의 여성과 다시 재회하게 된 이성휘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성문교위님이라면, 성문교위님이라면 반드시 오실 거라고 믿었다고요…!”
그녀의 말에 이성휘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탁 군이 벌인 낙양 대방화.
군중 속에서 오랜 인연을 만나게 된 이성휘는 뻔히 미래에 벌어질 참화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방치하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궜다.
“현덕 님.”
“예.”
“구출된 백성들이 안전한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피난을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무거운 표정을 한 이성휘의 부탁에 새하얀 백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조정대신들의 구출을 우선순위로 둬야 하겠으나, 천신만고 끝에 참화를 빠져나온 백성들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유비가 관동에서 온 의병임을 밝히자, 불안과 공포에 떨던 백성들은 미심쩍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하나둘씩 유비군에게 모여 들게 되었다.
“어서 가. 낙양 일은 맡기고.”
“…네, 부디 몸조심하세요.”
최악의 참사 속에서 오랜 인연을 만나게 된 이성휘는 씁쓸함에 젖은 얼굴로 그녀를 떠나보냈다.
유비군에게 백성들의 피난을 맡긴 뒤,
병주군이 경계하지 않도록 손에 쥔 칼자루를 검집에 납검하고서 흑발의 여인에게 다가섰다.
“낙양 시가지를 계속 돌면서 백성들의 구출에 집중했지만… 조족지혈에 불과해요. 여전히 많은 백성들이 불길에 갇혀 있겠죠.”
참화에서 구출한 백성들 덕분에 전화위복처럼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중원제일 검의 칼끝을 가까스로 회피하게 된 장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이성휘에게 낙양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여포가 없군.”
“정예부대를 이끌고 궁궐로 향하셨습니다.”
“궁궐…?”
병주의 비장이 한 발 앞서 궁궐로 향했다는 장료의 말에 이성휘가 고개를 들었다.
“동탁은 한나라의 수도에 망설임 없이 참화를 일으켰을 정도로 절박한 궁지에 몰린 상황이예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죠. 한시라도 빨리 간적들에게 잡혀계신 황제 폐하를 구출해야 해요.”
숙적이나 다름없는 병주군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낙양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킨 화염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으며, 시가지에서 시작된 불바다는 마침내 궁궐에 도달하려 하고 있었다.
동탁 군은 낙양에 불을 지르기 전에 당연히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먼저 빼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궁궐에 억류된 상황이라면?
동탁 군의 호송대가 낙양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는 들은 바가 없었고, 설령 호송대가 낙양을 빠져나갔을지라도 혼란스러운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참화에 갇힌 백성들을 구조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적이었던 너희를 덥석 믿을 수는 없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이성휘의 모습에 흑발의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받아들였다.
숙적을 어찌 곧바로 믿을 수 있을까.
의심과 경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성휘의 행동은 지극히 옳았다.
중원제일 검의 검을 검집에 납검시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이성휘가 검을 집어넣음과 동시에 적의를 거두자 병주군의 무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문대.”
“이야기는 듣고 있었네. 이제 어찌할 텐가?”
이성휘의 부름에 휘하 장수들과 함께 낙양의 피난민들을 바라보고 있던 손견이 입을 열었다.
그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이성휘의 지시를 기다렸다.
“백성들의 피난 유도는 유비군에게 일임하고 네 군세들은 성문을 사수해라. 동탁 군이 성문을 탈환하려고 군세를 보낼지도 모르고… 혹시라도 만약의 경우가 벌어질지도 모르니.”
“흠, 무슨 뜻인지 알겠네. 그리하도록 하지.”
동탁 군으로부터,
그리고 배신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는 병주군으로부터 성문을 사수하라는 의미였다.
그 뜻을 알아들은 손견은 철통처럼 낙양 성문을 지키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럼 자네는 어찌할 텐가?”
손견이 물었다.
그에 이성휘가 대답했다.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가겠다.”
1만에 달하는 군세의 지휘권을 유비와 손견에게 양도한 이성휘는 1천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궁궐로 진격하려 했다.
* * *
낙양 시가지에서 시작된 참화가 어느덧 궁궐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화려함을 뽐내던 전각들이,
웅대함을 자랑하던 궁전과 누각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강풍에 실려 날아들게 된 불씨가 옮겨붙게 된 것인지 궁궐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후한(後漢)의 궁궐이 화마의 아가리 속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방천화극을 내지르던 금발의 여인이 신경질적인 외침을 토해냈다.
동탁 군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궁궐까지 침범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좌장군 동민의 병력들이 잇따라 여포의 앞을 막아섰다.
“배신자 여포가 나타났다!”
“어르신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년!”
이미 동탁과 황제는 궁궐을 탈출한 뒤였음에도 여전히 많은 병력들이 남아 있었다.
사나운 범을 둘러싼 이리떼처럼,
창검을 든 수많은 병사들이 여포와 병주군을 몇 겹으로 포위했다.
불길이 치솟고 매캐한 연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병주와 서량의 무인들은 불길 속에서도 치열한 접전을 계속 이어 나갔다.
“누님!”
위속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궁궐 내부를 정찰하고서 돌아왔다.
“불길을 피해 도망치던 궁녀의 말에 따르면… 황후께서 아직 남궁(南宮)에 계신다고 합니다!”
“뭐, 황후가? 동탁이 황제를 데리고 도망쳤다며! 그럼 당연히 황후도 같이 데리고 도망쳤어야지!”
친척 동생의 보고를 믿을 수 없었는지 여포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위속이 재차 입을 열었다.
“동탁, 그 역적 놈이 제 손녀딸을 새 황후로 책봉할 속셈으로… 황후를 남궁의 작은 전각에 유폐시킨 것 같습니다!”
동탁은 황제와 함께 궁궐을 떠나기 전에 황후 당씨를 불길이 빠르게 번지고 있는 남궁에 가둬버렸다.
제 손녀딸을 새 황후로 책봉하고자,
황제 유변의 정비인 황후 당씨를 유폐시킨 것이다.
“이런 금수만도 못한 새끼가…!! 부귀영화가 아무리 달콤해도 그렇지… 한나라의 황후를 불길 속에 처박아 두고 도망쳤다고?”
동탁의 더러운 음모를 알게 된 여포는 어금니를 빠득 갈면서 만고의 역적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주 잠시나마 이런 역적 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기 자신에게 혐오가 올라왔다.
“어서 남궁으로 안내해!”
“예? 남궁이 어디 있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래서 촌놈은 안 된다니까….”
위속의 외침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여포는 그 답을 동탁 군의 무관들에게 듣기로 했다.
눈앞의 적들은 궁궐을 수비하는 숙직병이다. 당연히 궁궐 지리에 능통할 터였다.
“큭!”
방천화극을 두 손으로 움켜쥔 금발의 여인이 돌연 침음을 내뱉었다.
뱀처럼 파고드는 격통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끔찍한 아픔이 발작하듯 온몸에 가해졌기 때문이다.
옷소매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새하얀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몇 번이고 꿰매고 터지기를 반복했던 상처가 다시 찢어지고 만 것이었다.
부릅뜬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될 정도의 참혹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여포를 죽여라! 어서 저 더러운 배신자 년을 죽이란 말이다!!”
중랑장 번조가 아름답게 장식된 보검을 붕붕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여포는 상처투성이의 범과 같았다.
당장은 저력을 낼 수 있을지 모르나,
소모전이 계속 흐를수록 저항과 발악이 서서히 무뎌지게 될 터였다.
반란의 수괴인 여포의 수급을 베어 자기 전공으로 삼을 셈이었는지 번조는 야욕에 찬 눈빛을 번뜩이면서 궁궐 병력들을 계속하여 앞에 내보냈다.
“흐하핫! 이 번조가 천하의 여봉선을 잡는구나!!”
번조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궁노부대가 도착할 터.
제아무리 뛰어난 맹장이라도 결국 궁노부대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쭐대며 병주군을 조롱하던 번조는 포악하고 사납지만 미색만큼은 빼어난 여포를 첩으로 삼을까 고심했지만 양부를 죽인 년을 곁에 두는 것은 매우 껄끄러운 일이었기에 욕심을 깨끗하게 접었다.
“…궁노부대!”
방천화극을 힘겹게 들어 올리면서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던 여포의 모습을 관망하던 번조가 조급함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궁노부대는 왜 오질 않는 게냐!”
지금쯤이면 당연히,
당연히 궁노부대가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연락이 없단 말인가. 오는 도중에 무슨 변고가 있지 않고서야….
“궁노부대는 무슨! 네놈들 저승사자다!”
번조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궐문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이 월도를 늘어뜨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조조 군의 맹장, 하후돈이었다.
하후돈을 위시한 조조군 병력이 궐문을 통해 노도처럼 밀려들면서 궁궐 병력을 급습했다.
“번조.”
남성이 번조를 향해 다가왔다.
불길의 뜨거운 아지랑이를 머금은 듯,
남성이 늘어뜨린 검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번조를 호위하던 무관들이 기합을 내지르면서 달려들었으나 누구도 남성을 막지 못한 채 핏물을 쏟아 내면서 흙바닥에 쓰러졌다.
“너…! 너! 네가 어떻게…!”
위속에게 부축을 받고 있던 금발의 여인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구하러 왔다.”
이성휘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황제 폐하'라는 목적어를 생략한 채 여포의 물음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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