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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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아준 어머니도,
길러준 조모도,
유일한 의지처였던 아버지도,
비극의 연쇄처럼 소중한 혈육들을 하나둘씩 잃어온 유협에게 있어 이복오빠 유변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인 피붙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신의 손에 붙잡힌 이복오빠마저 잃게 될 것만 같았던 유협은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는 사람에게, 부탁을 맡길 수 있는 사람에게 호소했다.
‘제발, 제발 폐하를… 내 오라비를 구해다오…! 하잘것없는 이복누이를 위해 낙양에 홀로 남은… 미련할 정도로 착한 오라비를 구해다오…!’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통곡을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한 명 남은 혈육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의지할 가족을 모두 잃고 천애 고아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기에.
유협은 비를 맞은 강아지처럼 온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이성휘에게 매달렸다.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애원하듯,
두 손으로 사내의 옷깃을 붙잡으면서 제발 오라비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림총사 이성휘, 진류왕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에 이성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던 황녀를 부축하며 대답했다.
‘만고의 역적을 참살한 뒤…, 낙양에 계신 황제 폐하를 구출하겠습니다.’
날 선 칼날처럼 결연한 모습으로 명을 받들었던 이성휘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던 유협은 불안감을 애써 떨쳐 내면서 근심에 찬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었으니까.
작고 가녀린 두 손을 모으면서 간절한 염원을 기도한 유협은 눈물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면서 숙연한 마음을 씻어냈다.
“괜찮을 것이옵니다, 전하…! 명공이 숭산에서 대승을 거두지 않았사옵니까?”
이슬을 머금은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다가와 유협을 살포시 안았다.
황녀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성휘와 이복오빠를 걱정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유협은 혹시라도 궁인들에게 심려를 끼칠까, 홀로 마차 안에서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퉁퉁 부은 두 눈을 감출 순 없었기에 초선과 궁인들은 유협이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이복오빠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괜찮을 것이옵니다. 분명 괜찮을 것이옵니다….”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악몽을 꾼 아이를 보살피듯.
유협을 꼭 끌어안은 초선은 작고 가녀린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면서 작은 황녀의 심중을 어지럽히고 있는 근심과 슬픔을 덜어 주었다.
“너무, 너무 무섭다…. 내 욕심이, 오라비를 구하고 싶다는 내 욕심이… 어림총사를 위험으로 내몬 게 아닐까… 자꾸 무서운 생각들만 든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또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진 않을까… 또 나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죽진 않을까 무섭다…!”
지금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자객의 습격으로 수많은 궁인들이 죽었고,
또한 낙양을 벗어날 때도 동탁 군의 급습을 받아 수많은 궁인들이 죽었다.
나 때문에,
나를 지키려다가….
수많은 사람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무거운 죄책감은 불행 섞인 저주처럼 유협의 마음을 천천히 좀 먹어갔다.
“그런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나, 나는 항상 불행들만 겪어왔다…. 매번 빌고 또 빌었지만 매번… 매번 많은 사람을 잃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항상 내 곁을 떠나갔다….”
“소녀는 명공을 믿고 있사옵니다. 황제 폐하는 물론, 소녀의 양부 또한 어림총사께서 무사히 구해주시리라 간곡히… 간곡히 믿사옵니다.”
“우으으! 으으으…! 흐윽!”
상냥하디 상냥한,
아이를 잠에 이끄는 상냥한 자장자처럼.
편안 하고 조용한… 상냥한 모성애가 흐르는 초선의 속삭임에 유협은 따스한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트렸다.
“…분명 괜찮을 것이옵니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울음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고 끅끅 울음을 삼켰다.
입술을 꾹 깨물면서 슬픔의 응어리를 흘리는 유협의 모습에 초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
비탄에 빠진 황녀와 시녀가 서로를 끌어안으며 슬픔을 나누고 있을 때,
진류왕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군막으로 들어서려던 흑발의 여인은 걸음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진류왕과 시녀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황제와 사도 왕윤의 구명을 이성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조는 우두커니 선 채 군막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군, 제가 고하겠습니다.”
정동장군이 알현을 청한다는 요청을 전하고자 허저가 우렁차게 말하려 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
심중에 큰 변화가 일게 되었는지,
진류왕이 거처하는 군막에 찾아온 조조는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
입술을 깨물면서 발걸음을 돌린 흑발의 여인.
곁을 호위하던 허저는 주군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붉은 눈동자가 짙게 내려앉았다.
전쟁터의 선혈처럼 섬뜩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허저는 수천 명에 달하는 적들을 상대로 용전을 벌일 정도로 담대하고 용맹한 용장이었으나, 격노를 발산하는 조조의 살의를 본 허저는 본능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만약…, 부관이 낙양에서 황제와 사도를 구하려다가 큰 부상을 입거나, 혹여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내 천하를 포기할지라도 저년들을 죽여 버릴 것이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조조가 오랫동안 품어온 염원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품어온 염원도 이성휘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조조에게 있어 이성휘는 삶의 모든 것이며, 난세의 간웅을 움직이게 하는 중심이자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 * *
성고현(成睪縣)에 주둔하고 있던 이각과 곽사가 중앙군 병력을 이끌고 낙양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여포와 병주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급보를 접하게 된 이각과 곽사는 전쟁에 능한 숙장들답게 재가를 받지 않고 곧바로 군대를 움직였다.
창검을 늘어뜨린 수만 명의 군세가 낙양의 성문들을 모두 봉쇄하면서 포위를 펼쳤다. 배은망덕하게 반기를 일으킨 병주 지역의 촌놈들을 모두 불길에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어르신께서 벼슬까지 내려 줬더니…!”
“더러운 병주 놈들을 모조리 불구덩이에 속에 처넣어라!”
말을 탄 채 창검을 치켜든 이각과 곽사가 크게 소리치면서 병력을 총동원했다.
낙양을 급히 탈출한 아군을 보호하고,
불길을 피해 성문밖으로 달음박질쳐 올 병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기 위해서였다.
서량의 쌍두마차라 불리는 맹장들은 기필코 병주군을 전멸시켜 숭산 전투에서 당한 오욕을 씻겠노라며 의욕에 차 있었다.
“진압에 큰 공적을 세운다면 자비로우신 어르신께서 포로로 잡은 여포와 장료를 우리에게 주실 걸세!”
“하핫! 그거 군침이 도는군. 여포, 그 표독한 년을 길들이는 재미가 있을 걸세! 힘줄을 끊어낸 뒤에 창부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 개 같은 성격도 고분고분하게 변할 테지.”
대군을 동원하여 모든 길목들을 봉쇄했다.
낙양 안에는 사나운 불바다가,
낙양 바깥에는 창검으로 무장한 철의 장벽이 수도를 크게 둘러싸고 있었다.
불바다에 갇혀 우왕좌왕하고 있을 병주군이 철통처럼 포위망을 펼치는 중앙군을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아무리 여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교위! 적의 군세가 출현했습니다!”
무관이 달려와 보고했다.
그에 이각이 입기를 일그러뜨리면서 비웃음을 지었다.
“맹렬한 불바다를 피해 도망쳐 온 병주 촌놈들이겠군. 절대로 놈들을 살려 보내지 마라! 병주군의 공격이 시작된 곳에 예비대를 증원하여 응전할 것이다!”
여포와 장료를 사로잡아 더러운 육욕을 채울 생각에 욕망을 불태우던 이각이었지만, 결코 방심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매우 철저하게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예비대를 증원하여 적의 활로를 막는다.
활로를 단단히 틀어막은 뒤에 궁지에 몰린 적들을 몰살할 생각이었다.
“아닙니다! 적들이 출몰한 방면은 후방…! 정체불명의 군세가 아군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후, 후방…! 후미를 공격하고 있단 말이냐!”
무관의 이어진 보고에 이각이 경악을 토해내며 말고삐를 급히 당겼다.
낙양 인근에 주둔하는 군진들 중 일부가 아군을 배신하고 병주군에게 투항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사예주 출신이 많은 낙양 군단이 어르신의 결단에 번번이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부를 죽인 년에게 가세했을 리 없다.’
기댈 곳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나 다름없는 병주군을 누가 돕는단 말인가.
하내군에 투입된 병주군 병력이라면 모를까, 수도 방위에 투입된 병력이 병주군에 가세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군…. 병주 놈들이 하내군에서 급히 출진했다고 하더라도, 벌써 낙양에 당도할 리가 없을 텐데.’
이각의 심중에 드리운 의문은 뒤이어 달려온 무관에 의해서 풀리게 되었다.
“의양에 주둔하고 있던 어림총사 이성휘의 병력이 아군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벼, 병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무려 1만에 달하는 병력이 낙양을 철통처럼 포위하는 중앙군의 후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림총사 이성휘. 장사태수 손견.
숭산에서 겪은 지독한 악몽이 떠올랐는지,
이각과 곽사의 득의양양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이 더러운 반란군 놈들이…! 낙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게로군!”
시산혈해를 만들었던 귀신이 1만의 군세를 이끌고서 낙양에 당도했다.
우리를 죽이려고 왔다.
숭산에서 놓친 우리를 끝내 죽이려고 온 게 분명했다.
화웅을 일 거에 썰어 버렸던 이성휘의 무위를 떠올린 이각과 곽사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말머리를 급히 돌렸다.
“비, 빌어먹을 놈!”
“물귀신 같으니라고! 우, 우리를 죽이려고… 낙양까지 왔단 말인가!”
낙양의 중앙군을 이끄는 서량의 쌍두마차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을 때,
이성휘와 유비가 이끄는 병력이 낙양 성문을 봉쇄하고 있던 중앙군을 추풍낙엽처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 * *
시뻘건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흩날렸다.
등잔 위에 흔들리는 불씨처럼,
거센 돌풍이 일 때마다 집채보다 큰 불길이 시가지를 집어삼켰다.
동탁 군이 낙양 도처에 잔뜩 쌓아둔 숯과 유황에 의해 삽시간에 커진 불바다는 수천 채에 달하는가옥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성들까지 덮쳐 버렸다.
“아아악!”
“지, 지붕이 무너진다! 어서 피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에 잠긴 가옥이 폭삭 주저앉았다.
사방으로 확산되는 불길,
붕괴된 가옥 주변에 있던 피난민들이 불길이 실린 후폭풍에 휩쓸렸다.
온몸에 불이 붙은 남성이 비명을 질렀다.
화재 중심의 현장에 선 여인은 아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으며, 부모를 잃고 덩그러니 남게 된 어린아이는 급히 도망치던 피난민들의 발길에 짓밟혀 뼈가 으스러지고 말았다.
“어서 피난민들을 낙양 밖으로 옮기세요!”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유도하던 장료가 곁을 보필하던 무관들에게 말했다.
그에 무관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중앙군이 모든 성문들을 봉쇄했습니다…! 우리는 물론, 낙양 백성들까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낙양 백성들까지 말인가요!”
전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백성들까지 참화에 몰아넣고 있는 동탁 군의 악행에 흑발의 여인이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백성들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불바다를 피해 도망치는 백성들까지 막아선단 말인가.
권력을 향한 야욕에 빠져 무관계한 백성들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불길로 집어넣는 동탁 군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제가 직접 성문을 뚫겠습니다…!”
“아, 안 됩니다! 분명 중앙군은 아군이 불길 속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봉쇄된 성문을 돌파하겠다는 장료의 무모한결단에 무관이 손사래를 치면서 만류했다.
중앙군 놈들은 고양이다.
쥐가 구멍 속에서 나오길 기다리는 포식자.
불길에 놀란 쥐가 제 스스로 구멍 속에서 기어나오면 날카로운 발톱으로 온몸을 난자할 게 분명했다.
“무모한 특공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비록 원치 않았던 일이라고는 하나, 동탁에게 협조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장료가 검을 뽑아 들었다.
피로 점철된 갑옷을 입은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중앙군이 점거한 성문을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문원 교위를 따르겠습니다!”
“병주의 준걸인 소장들이 어찌 문원 교위를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도천까지 따라갈 겁니다!”
무인으로서의 결연함이 느껴지는 장료의 모습에 시커먼 그을음을 덮어쓴 장졸들이 병장기를 들어 올리면서 함성을 내질렀다.
우리는 병주군,
천하를 휩쓴 북방의 호걸들이다.
목숨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불바다에 휩싸인 낙양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겠지.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피난민을 구할 수 있도록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기로 결의하였다.
“대체 어디서 온 군세들이냐!”
“적의 공격이다! 바깥에서… 낙양 바깥에서 적들이 공격해 오고 있다!!”
결사의 각오를 품은 장료와 병주의 결사대가 중앙군이 봉쇄하고 있던 성문에 도달했을 때,
이미 성문은 초토화된 상태였다.
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들고양이처럼 활과 창검을 들어 올린 채 대기하고 있던 중앙군은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커헉…!!”
낙양 군단의 장수가 핏물이 왈칵 쏟아지는 제 목덜미를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로 쓰러졌다.
정체불명의 군세가 들이닥쳤다.
단숨에 낙양 성문을 제압한 군세는 낙양 군단의 장수를 일 거에 참해 버린 무인을 중심으로 진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주, 중원제일 검?”
격앙된 표정을 지으면서 칼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장료가 의아함에 찬 목소리로 군세를 이끄는 무인을 바라보았다.
어림총사 이성휘,
중앙군이 봉쇄한 낙양 성문을 돌파한 인물은 이성휘가 분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에 장료는 물론,
뒤따르던 병주군 또한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동탁의 주구들이다. 모두 몰살 시켜라.”
허공에 검을 내지르면서 칼날 위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낸 이성휘는 장료와 병주군을 보고는 유비군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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