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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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맹위를 떨치던 여포가 고개를 돌려 시커먼 연기를 바라보았다.
결국 화재가 시작되었다.
침략군처럼 시가지를 누비는 동탁 군 기병들이 횃불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면서 낙양을 불구덩이에 휩싸인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만들어 버렸다.
“쿨럭쿨럭!”
“부, 불이다! 낙양이 불타고 있다!”
낙양 성문을 뚫고 난입한 여포군은 물론,
그를 막아서던 동탁 군 또한 지옥의 유황불처럼 치솟기 시작한 불기둥을 보며 경악을 토해냈다.
불길이 삽시간에 번지고 있다.
기름과 마른 장작들을 집어삼킨 불길의 확산은 마치 바다의 파도를 보는 듯했다.
“큭! 빌어먹을….”
뜨거운 불씨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방천화극을 휘둘러 적병들을 여럿 쓰러트린 금발의 여인이 고개를 들어 불길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불타고 있다.
모든 것들이 불타고 있었다.
포만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귀처럼,
만고의 역적이 벌인 대방화는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한나라의 부귀와 영화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문원!”
“예, 봉선 님!”
검을 휘둘러 적장의 수급을 벤 흑발의 여인이 대답했다.
치열한 격전을 되풀이했는지,
하얀 갑옷을 피 칠갑으로 물들인 여걸은 거칠게 호흡을 토해내면서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어서 백성들을 구출해! 지금쯤이면 고순도 군세를 이끌고 오고 있겠지. 백성들을 하내군 방면으로 피신시키면 될 거야!”
“하지만 봉선 님은….”
“걱정 하지 마, 오히려 힘이 넘치니까! 이제 드디어 뭔가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아.”
여포는 어느 때보다도 쇠약해진 상태였다.
절망의 낭떠러지에 떨어진 이후,
폐인처럼 술에만 의존한 채 심신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용기백 배한 상태였다. 전횡과 폭정에 시름하는 천하 만인을 구하기 위해 만고의 역적에게 맞선다는 대의명분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명? 명예? 이제 그딴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
패륜을 범한 년이라고 욕하든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려고 양부를 살해한 년이라고 삿대질을 하든지.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병주의 비장이다.
무인의 기개와 용맹을 가슴속에 품은 채,
일신의 무위를 휘두르며 천하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여포의 굳건한 기세를 본 장료가 불안감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료는 송헌, 조성, 성렴 등의 장수들과 함께 군세를 이끌고 불길에 휩싸인 시가지로 향했다.
“누님… 드디어 철이 드셨군요.”
“뒤지고 싶어?”
“아, 아닙니다.”
날카로운 결연함이 느껴지는 여포의 모습을 본 위속이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처럼,
무명과 명예를 맹목적으로 좇을 뿐이었던 병주 비장은 더욱 성숙해졌다.
설령 끝까지 모멸과 멸시를 받을지라도 천하를 위해 무수히 많은 적수들을 베었던 중원제일 검 같은 무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이었다면 당연히 백성들을 살폈겠지? 무뚝뚝한 얼음 같은 녀석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을 걸야!’
이성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된 여포가 부끄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방천화극을 날카롭게 내질렀다.
무거운 참격을 맞은 동탁 군 무관은 몸이 양단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중랑장, 황실 종친들과 조정대신들의 신병을 먼저 확보하세요. 동탁 군보다 먼저 확보해야 해요.”
나무에 꼭 달라붙은 매미처럼 여포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가후가 입을 열었다.
그에 여포가 말했다.
“당연히 궁궐이 먼저 아냐? 동탁, 그 빌어먹을 역적의 수급을 먼저 베야 할 것 같은데.”
“아뇨, 이미 도망쳤을 거예요. 역적의 꾀주머니 역할을 하는 메기수염이 대국을 읽는 재주는 없지만 일 처리만큼은 더럽게 꼼꼼하거든요.”
가후는 낭중령 이유가 동탁과 함께 낙양을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쳤겠지.
아마 이유는 자신이 병주군에 가세하여 반란을 획책했음을 간파하자마자 피신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럼 놈들이 지날 것 같은 길목에 매복을 미리 배치했어야지!”
“제가 무슨 점쟁이인 줄 아세요…?”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여포의 압박에 가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아니고서야,
전(前) 수도로 이어지는 가로들 중에서 딱 한 곳을 집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동탁이 기병들을 대동한 채 장안으로 도망칠 것을 계산하여 퇴로가 될 곳을 추측한다면 확률이 조금 올라갈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장안으로 빠지는 길목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게다가 매복을 따로 둘 정도로 병력에 여유가 있던 것도 아니잖아요.”
“알았어, 알았다고.”
여포는 멍청한 자신이 교활한 암여우를 상대로 말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교활하고 음험하지만 머리만큼은 잘 돌아가는 암여우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봉선 님!”
새카만 그을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후성이 태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처참한 몰골이 된 백발의 노신을 데려왔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였다.
조정대신들을 장안성까지 강제로 압송하려던 동탁 군으로부터 무사히 구출했다. 사손서와 그의 가솔들이 구출되어 여포군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쿨럭쿨럭! 대,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낙양에… 대체 낙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겐가!”
머리를 정돈하는 상투관을 잃고 산발이 된 사손서가 다급한목소리로 여포에게 물었다.
그에 가후가 대답했다.
“상서복야 어르신, 서량에서 온 역적이 결국 낙양에 대방화를 일으켰사옵니다.”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질렀단 말인가!”
한나라의 수도에 견벽청야(堅壁淸野)을 행한 뒤, 장안으로 천도하려 했던 동탁의 사악한 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동탁이 조정회의에서 장안 천도를 강행했었던 것을 떠올린 사손서는 결국 동탁 군이 낙양에 불을 질렀음을 알게 되었다.
“허, 헌데 자네들은….”
동탁을 따르는 주구들이 아닌가.
사손서는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의구심에 찬 눈빛으로 두려움에 질린 사손서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군세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는 여포.
양아버지를 살해하고 동탁에게 복종한 변절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신용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희들이 만고의 역적에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복종했던 것은 사실이나, 동탁에게 진심으로 복종한 것은 아닙니다! 황실과 조정의 국은을 입어온 저희들이 어찌 낙양에 대방화를 일으킨 역적과 의기투합할 수 있겠습니까!”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두 팔을 높이 뻗으면서 사손서를 설득했다.
어쩔 수 없이 동탁에게 복종했을 뿐,
한의 신하라는 것을 결코 망각한 적이 없다.
가후는 장터에서 가짜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라도 된 것처럼 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숯검정이 되어 버린 사손서에게 온갖 궤변과 속임수를 써대면서 명분을 확보하려 했다.
“동탁의 만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결국 거병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황실과 조정을 기만하고 죄 없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만고의 역적을 처단하기 위함입니다! 왕망보다 더한 역적을 참하기 위해 어르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가후는 동탁 군의 만행에 맞서 거병한 병주군을 충의지사로 포장하면서 상서복야 사손서에게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그에 사손서는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비록 여포가 불의와 불충을 범한 무장이라고는 하나… 불길 속에 놓인 황실과 조정을 구원하기 위해선 여포를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분면 사도 어르신께서는 그리 생각하셨을 테지.’
불의하며 불충한 무리와 타협하는 것은 결코 유자로서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나라의 4백 년 사직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어떻게든 사직을 지켜내야 한다.
수백 년의 영광을 간직한 한나라의 수도를 불태우는 만행을 범한 동탁 군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황실과 조정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병주군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였다.
“중랑장, 황실과 조정을 구해주게!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중랑장 밖에 없네!”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인 사손서의 부탁에 여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탁 군의 손아귀에 있는 황제와 황후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궁궐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사도 왕윤과 함께 청류파를 주도하는 영수였던 상서복야 사손서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게 된 병주군은 거센 맹수가 질주하듯 궁궐로 향하는 공로를 뚫기 시작했다.
* * *
불바다가 된 낙양.
동탁 군과 여포군의 치열한 시가전.
한나라의 운명은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
낙양을 불태우며 덩치를 불리고 있는 불바다는 죄와 과보를 범한 악인들을 불태우는 지옥의 유황불을 연상시켰다.
“어서 백성들을 구하라! 아군이 뚫은 활로를 통해서 대피시켜라!”
여포에게 명령받은 장료가 휘하 병력과 함께 불바다에 갇힌 백성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길을 무리하게 뚫으며,
그을음 실린 공기를 마시면서 천천히 죽어 가고 있던 백성들을 위기에서 구해 냈다.
창검을 든 병력을 보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지르던 낙양 백성들이었지만,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도움의 손길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교위, 놈들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대피할 때까지 막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낙양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중앙군이 여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집결하기 시작했다.
중앙군이 낙양을 포위하고 있다.
반란을 일으킨 병주군을 그대로 낙양의 불바닷속에 처넣을 요량인 듯했다.
좌장군 동민이 이끄는 낙양 병력과 시가전을 치르면서 불길에 갇힌 백성들을 구출하는 상황이었기에, 병주군은 낙양을 포위하기 시작한 이각과 곽사의 중앙군을 견제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고순 교위의 병력은 지금쯤….”
손을 뻗으면서 시체처럼 축 늘어진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장료가 고개를 들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체감상으로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고순이 이끄는 하내군 병력이 사수(汜水)를 무사히 도하했을 터.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한다면 분명 고순의 병력이 낙양을 포위하는 중앙군의 배후를 공격할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백성들의 구호를 계속 우선시해주세요. 불길에 갇힌 백성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회색 잿개비를 뒤집어쓴 흑발의 여인이 부하의 다급한 외침을 미소로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괜찮았다.
지금은 괜찮아야만 했으니까.
매번 억지와 만용을 부리는 상관을 오랫동안 보필했기 때문일까. 장료 또한 여포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쇠고집 같은 완고함을 자랑했다.
“교위! 교위!!”
장료와 휘하 병력이 백성들의 구명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온몸에 그을음을 뒤집어쓴 무관이 달려왔다.
“이각과 곽사의 중앙군이 배후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고순 교위가 도착한 거군요.”
하내군에서 출발한 고순의 병력이 벌써 낙양에 도달했을 리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장료였지만 이각과 곽사의 중앙군을 배후에서 공격할 인물은 고순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내군 병력이 낙양에 도달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 아닙니다…! 어림총사 이성휘가 이끄는 병력입니다.”
중원제일 검이 군세를 이끌고 낙양을 급습했다.
그에 장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면서 가시 돋친 경악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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