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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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화(大放火)를 일으키기까지 나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장 불을 놓아도 될 정도로 동탁 군은 낙양 도처에 방화 준비를 거의 완료한 상태였다.
기름이 든 항아리들.
마른 지푸라기와 비쩍 갈라진 장작들.
또한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를 수 있도록 시커먼 숯과 누런 유황까지 도처에 준비하기까지 했다.
“출발하라!”
“이놈들! 꾸물대지 마라!!”
말을 탄 무관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했다.
그에 봇짐을 짊어진 채 서쪽으로 이동하던 낙양 백성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숙였다.
조정에서 장안 천도가 결정되었다.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하겠다는 동탁의 주장에 양표와 황완 등의 조정대신들이 거세게 반대했으나, 동탁은 그들을 모두 면직시키며 천도를 강행했다.
“꾸물대는 놈들은 등가죽을 찢어발기겠다! 또한 반항하는 놈들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버릴 것이다!
동탁의 심복이었던 사례교위(司隸校尉) 선파가 날카로운 고함을 내지르며 악독한 폭력을 행사했다.
전횡과 폭정을 일삼는 역신의 부하답게,
사례교위 선파는 무력한 백성들을 탄압하고 갈취하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선파는 낙양 백성들의 장안 이주를 서둘러 완료하여 동탁의 총애를 받고 싶었는지, 마치 사육하는 짐승들을 훈련하듯이 채찍을 계속해서 휘두르며 백성들을 학대했다.
“커헉… 컥!”
“네놈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젊고 건장한 백성들을 추려 낸 뒤,
노인과 아이들은 구렁텅이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창을 내지르며 깊은 구렁텅이 안으로 노인과 아이들을 몰아넣은 동탁 군은 흙더미를 쏟아 부으면서 수많은 인원들을 생매장시켜 버렸다.
강제 이주는 이미 엿새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무차별 살육은 나흘 전에 시작되었다.
그 기간 동안 무려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그들의 주검은 모두 차디찬 흙바닥 아래에 파묻혔다.
“사, 살려주게! 내가 없으면 세상에 하나 남은 피붙이인 손자를 누가 돌본단 말인가!”
“네 손자도 곧 따라가게 될 게다.”
“이, 이놈!!”
허리가 굽은 백발의 노인이 노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으나 곧 무관의 검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늙은 노인의 주검 또한 다른 주검들과 마찬가지로 구렁텅이 아래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서 냄새 나는 늙은이들이나 도살하고 있다니. 쯧… 시가지에 투입된 놈들은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텐데.”
노인을 무자비하게 벤 무관의 말대로 시가지에 투입된 동탁 군은 살인과 약탈, 강간을 자행하면서 낙양을 생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어 죽이듯 말을 탄 무관들이 달아나던 백성들을 추격했다.
궁기병들이 활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궁술과 기마술에 능한 서량 출신답게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백성들을 매우 능숙하게 사냥했다.
“으아악!”
“도, 동탁 군이다!!”
불을 지르지만 않았을 뿐,
낙양은 이미 무간지옥이 된 상태였다.
무관이 휘두른 채찍에 맞아 죽을 정도로 강제 이주는 매우 혹독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대규모 학살이 실시되고 있는 북망산은 시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시산혈해가 되어 있었다.
“형님, 대업이 순조롭게 착수되고 있습니다!”
좌장군(左將軍) 동민이 들뜬 목소리로 동탁에게 장안 천도가 진척을 보이고 있음을 보고했다.
서량군이 중앙 정권을 점거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혁혁한 공을 세운 동민은 좌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막대한 봉토와 함께 호후(鄠侯)에 봉해졌다.
또한 동민은 장안 천도를 총지휘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제 출발했느냐? 너에게 황제를 맡기지 않았느냐.”
“계속 와병을 핑계 대면서 행궁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터라…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궁인들이 워낙 거세게 막아서는 통에…."
여전히 황제가 낙양에 있다는 동민의 대답에 동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단 말이냐! 어떻게든 어가에 태워서 보내라고 하지 않았느냐!”
노여움에 찬 동탁의 일갈에 동민이 예를 취하면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만방자하기 이를 때 없는 인사로 유명한 동민도 제 형 동탁의 불호령은 무서웠는지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오늘까지 어떻게든 황제를 어가에 태워 장안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동탁은 중군교위 동황에게 황제의 호위를 맡겼다.
장안 천도의 강행으로 인해 조정대신들이 크게 반발하는 상태였다.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황제가 도망쳐 버리면 우여곡절 끝에 거머쥐게 된 중앙 권력이 사분오열하여 무너지게 될 터였다.
그래서 동탁은 정예부대인 내군(內軍)을 지휘하는 동황에게 황제의 신병을 철저히 관리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가 낙양을 떠나면 나 또한 뒤이어 낙양을 떠날 것이다. 숙영, 너는 낙양의 일들을 모두 끝낸 다음에 오너라.”
“알겠습니다, 형님! 분골쇄신하여 대업을 수행하겠습니다!”
“헌데 봉선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
“봉선… 여포 말입니까?”
여포의 위치를 묻는 동탁의 말에 동민이 잠시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중원제일 검에게 패배한 이후,
병주의 비장은 전의가 꺾인 채 칩거에 빠졌다고 들었다.
뼈아픈 중상을 입은 탓일까.
중원제일 검과의 단기결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일까.
단기필마로 낙양 방어선을 무너뜨렸던 병주의 비장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말았다.
“낙양에서 조달한 물자들을 수송하는 임무에 투입되지 않았습니까, 형님. 낭중령이 병주군을 그쪽에 투입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그리했단 말인가.”
낭중령 이유가 물자 수송을 병주군에게 전담시켰다는 말에 동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장안성으로 가면 여봉선을 양녀로 들일 생긱이다.”
“예? 양녀… 말입니까? 형님께서 어찌 제 양부를 죽인 년을 양녀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병주의 비장을 양녀로 들이겠다는 동탁의 말에 동민이 아연실색한 반응을 보였다.
여포는 양부였던 정원의 목을 베고 투항해온 배신의 무장이 아닌가. 양부를 살해한 여포를 양녀로 들이겠다는 말이 얼토당토않게 들렸다.
“하오나 형님! 여포는 제 양부를 죽이고 투항해온 항장입니다! 양부를 죽인 자를 양녀로 삼으시겠다니요…! 형님께서 여포의 새 양부가 되겠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에 동탁이 클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대로 여봉선은 양부였던 정원을 살해하고 투항해온 항장이다. 양부를 죽였다는 이유로 평생 씻을 수 없는지탄과 원망을 받게 되었지. 그러므로 여봉선을 양녀로 삼으려는 게다.”
양부를 살해하여 지탄과 원망을 받게 된 여포가 다시 또 양부를 죽일 수 있을 리 없다.
동탁은 여포를 양녀로 삼은 뒤,
양부의 신분을 내세워서 병주의 비장을 묶어두려고 했다.
서량 제일의 맹장이었던 화웅을 잃은 동탁은 여포의 압도적인 무위를 크게 탐내고 있었다. 비록 중원제일 검에게 패배하였으나, 여포는 단기필마로 천하를 뒤흔들었던 맹장 중의 맹장이었기 때문이다.
* * *
방천화극을 든 금발의 여인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낙양 외곽,
사례교위 선파가 전염병에 걸린 가축들을 죽여 없애듯이 낙양 백성들을 처분하는 처형장이었다.
붉은 갑옷을 두른 여인은 구렁텅이로 떨어져 비명을 지르고 있는 노인과 밧줄에 묶인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들, 피범벅이 되어 죽어 있는 시체들을 목격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셨습니까, 중랑장.”
여포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사례교위 선파가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병주군은 물자 수송에 동원되어 있을 터.
게다가 분명 병주의 비장은 단기결전의 패배로 중상을 입은 채 폐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폐인이 된 것치고는… 멀쩡하군. 그저 헛소문에 불과했단 말인가?’
사나운 풍채와 위압감을 발산하는 여걸의 모습을 본 선파가 의문을 품었다.
뼈아픈 중상을 입은 뒤,
완전히 폐인이 된 채 술독에 빠졌다고 했다.
그러나 여포는 전쟁에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만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방천화극을 치켜든 여포의 모습을 본 선파는 대체 누가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냐며 혀를 찼다.
“혹여 소장에게 하명하실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선파가 입을 열어 여포에게 물었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목숨을 구걸하는 낙양 백성들을 차례대로 밟아죽이며 희열을 충족하는 도중에 여포가 끼어들었다.
그녀가 왜 외곽에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희열감에 찬 살육을 다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한시라도 빨리 용무를 끝내고 돌아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 병주군은 지금부터 천지신명의 명을 받들어 만고의 역적과 역당들을 모두 척살한 뒤에 역적의 전횡과 폭정으로 무너진 황실과 조정을 바로세울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포가 방천화극을 휘두르면서 선파의 목을 벴다.
사례교위 선파가 목숨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여포를 따르는 병주군 장수들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면서 동탁 군을 급습했다.
동탁 군에게 지금까지 당해온 괄대와 모멸을 갚아주겠다는 듯, 거병을 선언한 병주군은 망설임 없이 동탁 군을 참살해 버렸다.
“지금부터 우리는 궁궐을 급습하여 만고의 역적을 참살하고 곤궁에 처하신 황상 폐하를 구출할 것이다!”
하얀 갑옷을 두른 흑발의 여걸이 검을 치켜들면서 병주군 장졸들을 향해 소리쳤다.
병주군 장졸들이 호응하듯,
날카로운 창검을 높게 들어 올리며 격한 함성을 내질렀다.
“역적을 참살하자!”
“왕망과 다를 바 없는 그 역적 놈을 죽여라!!”
역신의 폭압에 짓눌려 시름하던 병주의 용맹무쌍한 강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처형장에 몰린 백성들을 해방한 뒤,
역적을 참살하여 난세를 안정시키겠다는 대의의 기치를 들었다.
병주군… 아니, 여포군의 거병은 몰살당할 위기에 놓인 낙양 백성들에게 있어 일말의 희망과도 같았다.
낙양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모두 학살하려는 동탁의 횡포에 맞서 배신의 무장이라는 악명으로 불리는 여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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