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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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류태수 장막의 증원군이 숭산을 넘어 의양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휘와 손견의 군세에 합류했다.
열흘하고도 하루가 넘은 시간.
낙양을 불태우려는 동탁 군의 천도 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였다.
진류태수 장막이 증원군을 이끌고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유비 세 자매들이 장막의 부장 신분으로 가세할 줄은 미처 몰랐다.
길쭉한 토끼 귀 장식을 머리에 쓰고 있는 백발의 여인을 본 이성휘는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숭산에서 거둔 승전보를 들었어요! 역시 대단하세요,! 무려 나흘 밤낮으로 격전을 치른 끝에 승리를 거두시다니… 과연 어림총사는 모든 무인들의 우상이예요!”
방정맞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소리치는 여인.
그 모습이 영락없이 흰 토끼 같았다.
격앙된 마음을 표현하듯 길게 뻗은 토끼 귀가 연신 쫑긋쫑긋 움직였다.
모든 무인들의 우상이라고 치켜세운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듯, 감격에 찬 표정을 지으며 섬섬옥수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이성휘의 손을 덥석 잡기까지 했다.
“언니, 너무 과격하십니다.”
흑단처럼 아름다운 흑발을 둔부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곤혹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언월도.
무려 82근에 달하는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병장기가 푸르스름한 인광을 빛내고 있었다.
뛰어난 무맹을 자랑하는 맹장이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풍채와 위압감만으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화웅의 목을 벤 게 사실인가요? 이번에도 말과 함께 일 거에 서량 제일의 맹장을 참했다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사예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있을 거예요. 중원제일 검은 한나라의 희망이니까요.”
나흘 밤낮으로 싸워 승리를 거둔 숭산 전투.
그에 열광하는 것은 무인들뿐이 아니었다.
동탁의 전횡과 폭정에 시름하는 백성들 또한 중원제일 검의 전공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 역신의 폭정이 끝나고 태평성대가 곧 도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심어 주었다. 숭산의 승전보를 들은 사예주의 백성들은 두 손 모아 중원제일 검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했다.
“과찬이십니다, 현덕 님.”
“현덕… 님이요?”
“현덕 님께서는 중산정왕의 후예이시며, 또한 유씨 황실의 종친이십니다. 제가 비록 어림총사의 직에 있으나 현덕 님께 존의를 표해야 마땅합니다.”
예를 취하며 입을 연 이성휘의 말에 유비는 물론, 의자매를 옆에서 호위하고 있던 흑발의 여인 또한 놀란 눈치로 이성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매번 중산정왕의 후예 따위가 무슨 황족이냐며 온갖 무시와 괄대를 받아온 터라 정중하게 존의를 표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토끼처럼 귀여운 백발의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발그랗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얹었다.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는지,
뺨에 연지곤지를 찍은 것처럼 홍조가 서렸다.
쑥스러움을 타면서 고개를 푹 숙인 토끼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만약 조조가 보았다면 즉시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아냈을 것이었다.
“제 의자매인 관우라고 해요. 자는 운장. 무수히 많은 전쟁터를 종군한 무관이죠.”
“우, 운… 운장…. 관운장이라고… 합니다….”
굳세고 자부심이 강한, 올곧은 대나무처럼 드센 성정을 자랑하는 흑발의 여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말을 더듬었다.
중원제일 검.
황실과 조정을 수호한 한나라의 검.
병주의 비장마저 단기결전에서 꺾으며 만부부당을 증명해낸 무인.
침착한 냉정함을 갖춘 여장부라도 중원 제일의 무인을 향한 경애를 억누를 수 없었는지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힌 채 망부석처럼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
“현덕 님, 저는 여세를 몰아 낙양을 공격하여 역신의 손아귀에 잡혀계신 황제 폐하와 조정대신들을 구출할 생각입니다.”
“나, 낙양을… 낙양을 공격한다고요?!”
부끄러움에 몸을 떠는 관우를 슬며시 쳐다본 이성휘는 다시 유비에게 시선을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여세를 몰아 대적(大賊)을 친다.
낙양의 동탁 군을 공격하여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구출하겠다는 이성휘의 주장에 유비와 관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류태수 장막과 의병장 유비가 이끌고 온 증원군과 이성휘, 손견의 병력을 모두 합쳐 1만.
겨우 1만의 병력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으로 구성된 중앙군이 있는 낙양을 공격하겠다는 주장은 만용(蠻勇)을 넘어 무리(無理)에 가까웠다.
“물론 그대의 주장을 응당 따르도록 하지! 한의 신하로서 어찌 목숨을 아까워하겠나! 내 옥쇄를 각오하고서라도 황실과 조정을 구원할 것일세!”
의병대를 이끄는 유비와 관우, 뒤이어 증원군의 총사였던 진류태수 장막에게 고했다.
그에 장막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협심이 넘치는 유자답게 위태로운 전투가 될 것이 분명하였음에도 망설임 없이 나섰다.
“감사합니다, 진류태수.”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고마워해야 할걸세. 그대가 장사태수와 함께 큰 승리를 거두어 승기의 바람을 불게 하지 않았는가?”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장졸들의 사기,
아군이 반드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 주는 것이었다.
사수관에 꺾여 진흙탕에 떨어진 사기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숭산 전투의 승전.
승기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모든 지방관들이 불가(不可)와 불리(不利)를 외쳤던 숭산 전투를 감행하여 승리를 거둔 이성휘였다.
“이 손문대가 만승천자를 구원하기 위한결전에 임하게 될 줄이야…! 실로 가슴이 두근대는군!”
손견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적들이 들끓는 낙양에서 만승천자를 무사히 구원한다면 일등 공신에 책봉되리라.
설령 만승천자의 구원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황실과 조정을 위해 옥쇄의 각오를 행했던 만고의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오군손씨 가문의 입신양명을 위해 전쟁에 참전하게 된 손견에게 있어 만승천자를 구원하기 위한결전은 극력을 다해 임해야 할 가시밭길이었다.
“위기를 느낀 동탁은 황제 폐하와 조정대신들을 한나라의 전(前) 수도인 장안으로 옮기려 할 겁니다.”
이성휘가 좌상에 선 장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 *
열흘하고도 하루.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대방화(大放火)를 앞둔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닌가. 가히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성휘가 증원군을 끌고 숭산을 넘은 진류태수 장막의 부대와 합류했을 때, 낙양에서는 생지옥과도 같은 격변들이 수차례씩 벌어지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라!”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한다!”
동탁 군 장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황제를 장안으로 보낸 뒤,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차례대로 장안에 압송할 예정이었다.
또한 낙양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큰 불을 일으키기 위해 수만 명에 이르는 동탁 군 병력이 투입된 상태였다. 일 거에 불을 질러 낙양에 있는 모든 가옥들을 잿더미로 만들려 했다.
“…봉선 님.”
“나는 괜찮아. 기분도 썩 괜찮고. 이런 걸 두고 뭐라고 말하더라…. 아! 준비 만전이야!”
“그러니 더 불안한데요.”
장료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금발의 여인이 방천화극을 든 채 발걸음을 움직였다.
병주군 무관들이 기다리고 있다.
태위 동탁으로부터 낙양에서 갈취한 재물들을 수송하라는 명령받은 병주군은 수레에 창검을 숨긴 채 거병을 준비했다.
토로교위 가후가 동탁의 꾀주머니였던 낭중령 이유를 설득한 덕분이었다.
낙양의 물자들을 서쪽에 위치한 장안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맡게 된 병주군은 열흘하고도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동탁 군의 경계에서 벗어나 거병을 은밀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문원.”
“네, 봉선 님.”
“그러니까… 그….”
장료와 함께 무관들이 모인 집결지로 향하던 여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등을 돌렸다.
흑발의 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끄러움을 참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여포의 모습에 장료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표를 그렸다.
어색함이 감도는 공기가 몇 초 정도 흘렀을까. 이윽고 금발의 여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미안, 했어…. 그, 문원한테… 내가 해선 안 될 말들을 많이 했었잖아. 미, 미안 해. 그때는 내가 좀 많이 화가 난 상태라서… 해선 안 될 말들까지 문원에게 화풀이하듯해버렸어.”
마치 겨울잠에서 깬 곰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처럼 실로 어색한 모습이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우물쭈물 망설이면서 진심 어린 사과했다.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하였던 병주의 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소중한 사람이 떠나갈까,
화살들이 장대비처럼 빗발치는 전장 속에서도 결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바 없었던 맹장이 어깨를 떨면서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봉선 님. 저는 한평생 봉선 님을 따르기로 한 몸이기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봉선 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전우를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저희 병주인들의 긍지잖습니까.”
흑발의 여인이 충성을 맹세하면서 청초한 눈웃음을 지었다.
결코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
상냥한 애정과 투철한 충성심이 담긴 모습이었다.
충성스러운 부관으로부터 당찬 포부를 듣게 된 여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천화극을 들어 올렸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고강도의 단련을 계속했는지 앙상했던 팔에서 완고한 활력이 느껴졌다.
“문원, 내 뒤를 따라와.”
“예!”
“바로 오늘…. 만고의 역적을 내 손으로 참할 테니까.”
결연함에 찬 눈빛을 지은 금발의 여인이 재차 발걸음을 움직였다.
붉은 갑옷을 걸친 병주의 비장.
그녀는 오늘 밤에 낙양에서 거병하려 했다.
낙양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려는 동탁의 전횡에 맞서 수십만 호에 달하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나는 병주의 비장 여포…. 전우를 위해,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방천화극을 휘두른다. 내가 향하고자 하는 길이 옳은 길이라면,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어.'
빼앗기 위해서가 아닌지키기 위해서.
죄 없는 낙양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당의 무리들을 향해 칼날을 휘두른다.
떨림이 멎었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가슴이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었던 심장에 뜨거운 혈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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