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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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전술(淸野戰術), 혹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청야수성(淸野守城) 등이라 불리는 전술은 적에게 역으로 이용당할지 모르는 유용한 거점을 파괴하는 방법이었다.
적에게 거점이 이용당할지 모른다.
도시의 물자들이 반란군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기 전에 낙양을 모두 불태움으로서 숭산 전투의 참패로 인해 적에게 빼앗긴 승세를 되찾으려 했다.
“어서 능묘를 모조리 파헤쳐라!”
“능묘에 묻힌 금은보화들은 물론,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모두 쓸어담도록 하라!”
중랑장 장제, 그리고 장제의 조카였던 장수가 휘하 장졸들을 동원하여 낙양에 위치한 역대 황제들의 능묘를 도굴했다.
황제들의 능묘는 물론,
황후와 후비들… 심지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의 벼슬에 오른 고관대작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악랄함을 보였다.
낙양 땅에 묻힌 모든 보물들을 싹쓸이하겠다는 것처럼 동탁 군은 미처 파헤치지 못했던 능묘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뭣들 하느냐, 속히 움직여라!”
중랑장 번조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부호들의 가택을 습격하여 약탈에 항거하던 인원들을 다 죽이고 재산을 갈취했다.
낙양에서 부를 쌓은 사대부와 호족들.
여러 대에 걸쳐 명성과 명망을 떨쳤던 사예주의 귀족들이 모두 멸족되었다.
동탁 군이 많은 장졸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약탈을 자행하자, 낙양 백성들은 동탁이 낙양을 버리고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근 군현들을 모두 돌면서 기름과 장작들을 모조리 징발해라! 백성들의 가옥을 무너뜨려서라도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동중랑장.”
동중랑장 동월의 명령에 장수 고석이 예를 취하면서 대답했다.
낙양 시가지를 불태우기 위한 준비.
동탁 군은 수십만 호(戶)가 거주하는 낙양에 화계를 펼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월은 화계에 필요한 기름과 장작들을 징발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맹렬한 불길이 한나라의 수도를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도록.
“관동의 반란군들에게 떨어질 전리품은 까맣게 타버린 잿더미가 전부일 것이다! 모조리 불태워주마!!”
동월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낙양을 보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일 관동 반란군들의 반응을 예상했다.
“헌데 병주군은 왜 철수준비에 동원되지 않는 것인가? 하내군 전선으로 떠난 병력을 제외하고도… 족히 2만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터인데!”
사수관 전선을 비롯하여 여러 전선들에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여전히 낙양에는 8만이 넘는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청야전술에 동원된 병력은 4만.
무려 주둔 병력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청야전술에 동원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대에 걸쳐 부와 권력을 쌓아온 한나라의 수도를 모두 불태우는 것은 매우 벅찬 일이었다.
일손이 부족하여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건만, 비장 여포를 따르는 병주군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허나 동중랑장, 병주군의 지휘권이 여포에게 있는 터라… 태위 어르신의 명령 없이는 병주군 놈들을 동원할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목숨을 살려 준 것은 물론, 벼슬과 봉토까지 내려주셨건만! 이 빌어먹을 병주 놈들은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르는군!!”
동중랑장 동월은 “양부를 죽이고 벼슬을 차지한 여포라는 년을 닮아서 그 부하들도 은혜를 모르는 것들이군!”이라며 온갖 모욕을 쏟아 냈다.
제 주군을 죽이고 투항해온 항장들.
동탁 군의 장수들 중 대다수가 동월처럼 병주 출신의 항장들을 몹시 경멸하고 있었다.
보은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모습을 보여 줘도 모자랄 판국에 의욕이 결여된 모습만 보이는 병주군의 행태에 불만을 쏟아 냈다.
“서둘러라! 보름이 지날 때까지 모든 준비들을 끝내야 한다!!”
이를 빠득 갈던 동월이 이내 장졸들을 향해 고함치며 작업을 서두를 것을 명령했다.
보름.
보름 뒤에 낙양이 불바다에 잠길 것이다.
주춧돌처럼 한나라의 역사를 떠받쳤던 낙양이 시뻘건 홍염 속에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
* * *
저 빌어먹을 놈들이 낙양을 불태우려 한다.
능묘들을 파헤치고,
죄 없는 백성들을 수탈한 것으로 모자라,
이번에는 수십만 호 이상이 거주하는 삶의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려고 했다.
낭중령 이유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가후는 동탁 군이 낙양에서 벌이려는 청야전술의 상세한 부분들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거대한 화계를 펼치려는 거죠. 열흘이 흘러도 결코 꺼지지 않을 불길로… 낙양을 모조리 불태울 거예요. 그게 바로 청야전술이니까요.”
청야전술은 사람이 벌일 수 있는 수많은 전술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부류에 속하는 방법이다.
터전을 완전히 말살하는 책략으로,
청야전술이 발동되면 낙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룩한 농업기반과 상업기반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청야전술이 발동된다면 낙양은 사람이 결코 살 수 없는 기아와 굶주림의 땅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역사를 이어온 낙양을 시커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실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어떻게 한의 신하라는 자가 수도 낙양에 화계를 벌일 수 있단 말인가.
흑발의 여인이 크게 분노하여 소리쳤다.
“어림총사 이성휘와 장사태수 손견의 활약이 그만큼 동탁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거죠.”
동탁이 계속 염두에 두던 장안 천도를 강행하게 된 원인이 바로 숭산 전투의 참패였다.
도독 화웅이 죽었다.
총애하던 오른팔을 잃은 동탁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중앙 권력을 장악한 뒤 뿔뿔이 흩어졌던 천하를 다시 통일하겠노라며 포부를 밝혔던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빠진 동탁이 결국 천하통일의 포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건가요, 중랑장? 중랑장께서 결단을 내리신다면 이 천재군사가 책략을 마련하여 올리겠습니다만…. 결정은 중랑장께서 내리실 일이죠.”
잿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암여우처럼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었다.
실의에 빠져 버린 여걸을 향해,
삶의 의욕과 싸울 의지마저 상실한 비장을 향해 결단을 요구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게 격변하는 난세는 결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동탁 군이 낙양에 화계를 벌이는 것은 보름 뒤였지만, 당장 지금부터 동탁 군을 막기 위한 준비에 돌입해야 했다.
“봉선 님을 몰아세우지 마세요.”
장료가 가후를 질책하듯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그에 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한가하시네요. 중랑장과 함께하시더니 무력함이 옮기라도 한 건가요?”
“토로교위, 봉선 님을 향한 무례는 이 장문원이 결코 용서치 않겠습니다.”
충의의 무장과 음험한 책략가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적의를 뻗었다.
그때 여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방법은? 방책이 있어?”
금발의 여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포의 물음에 가후가 미소를 머금었다.
“우문이군요, 중랑장. 이 가문화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삼라만상의 꾀와 지모가 들어 있답니다.”
동탁 군 장수들로부터 무위군의 암여우라 불리는 여인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여유에 찬 미소였다.
동탁 군 따위는 제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
교활한 음험함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은 가후의 모습에 오히려 신뢰를 느꼈는지, 금발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봉선 님?!”
폐인처럼 의욕과 의지를 상실한 채 장기간 칩거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인 걸까.
몸을 일으키려던 금발의 여인이 두 다리를 절뚝거렸다.
그에 장료가 경악에 찬 외침을 내지르며 여포를 부축하려 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난 괜찮아.”
도움의 손길을 조용히 뿌리친 뒤,
여포는 몇 번의 힘겨운 시도 끝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제 팔뚝을 바라보던 여포가 벽에 걸린 방천화극을 집어 들었다.
중원제일 검에 의해 절단된 뒤, 낙양의 뛰어난 명공에게 주문하여 방천화극을 다시 복구했다.
온전한 모습을 다시 되찾게 된 방천화극을 한 손으로 든 여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침음을 내뱉었다.
‘젠장, 대체 얼마나 약골이 된 거야? 방천화극을 들어 올린 것만으로도 팔이 비명을 지르다니….’
방천화극의 무게는 무려 100근.
힘센 장정들이 여럿 달라붙어야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였지만 지금까지 여포는 방천화극을 수족처럼 휘둘러왔다.
그러나 초인적인 괴력을 자랑하는 여걸이라도 장시간의 칩거는 매우 치명적이었는지, 괴력난신(怪力亂神)과도 같았던 힘과 체력이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가후의 물음에 여포가 방천화극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답했다.
“재활은 나흘, 아니… 사흘이면 돼. 그러니까 일단 동탁을 막을 방법에 대해서나 말해.”
자기 약함을 억누르며,
악착같은 저력을 보이는 여포의 모습에 가후가 후후 웃음을 터트렸다.
“병력을 이끌고 하내군 전선에 파견된 고순 교위에게 이미 연통을 넣어 뒀어요. 중랑장께서 군세를 이끌고 거병하신다면, 고순 교위가 하내군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내려와 동탁 군을 안팎으로 협공할 거예요.”
총대장 여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독단으로 고순에게 명령을 이미 하달한 뒤였다.
지독한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군사의 신분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총대장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군대를 움직인단 말인가.
여포가 결국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견한 듯 가후는 이미 물밑에서 거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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