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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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량에서 온 역신이 낙양을 점거한 이후부터 유변은 항상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천하에 내 편 되어 줄 이 없다는 두려움.
유일하게 의지가 되어 주던 황후 당씨마저 잃은 위기에 놓인 유변은 기어코 저 역신이 한나라의 황후마저 갈아치우려 든다며 모멸감에 떨어야 했다.
‘지, 짐은 한나라의 처, 천자이건만…. 어찌 황후조차 지키지 못한단 말인가…!!’
황제를 호위하던 친위대가 모두 동탁을 따르는 무관들로 교체되었으며, 궁궐을 수비하는 병력 또한 동탁과 동향인 서량 출신들로 채워졌다.
또한 조정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동탁은 전시를 명분으로 조정대신들의 가택에 경계병을 두는 등의 무력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황제는 한낱 겉장식에 불과했으며,
조정대신들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알 수 없는 파리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힘을 내시옵소서, 폐하!”
“이제 곧 중용무쌍한 관동의 군대들이 역신을 척결하고 낙양을 구해낼 것이옵니다!”
황제를 보필하던 환관들이 유변을 다독였다.
악몽이 끝날 때가 머지 않았노라고,
관동의 충의지사들이 황실과 조정을 구할 것이라며 일말의 희망을 입에 담았다.
환관들의 위로에 유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한 역적들이 일으켰던 참변에 모후(母后)께서 작고하신 이후… 단 하룻밤도 편안히 두 눈을 감았던 적이 없었다. 짐이 못난 황제이기에…, 신하와 백성들을 저 역신의 무리들로부터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계속 뇌리를 찔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가덕전(嘉德殿)에 불을 지른 뒤에 궁녀들과 함께 자진을 했을 때도.
동탁이 온갖 폭정과 악행들을 벌였을 때도.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천하의 주인인 천자였음에도,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구슬픈 통곡만을 쏟아 냈을 뿐이었다.
“폐, 폐하…!”
“부디 힘을 내셔야 합니다!”
황제의 자괴감 섞인 한탄을 듣게 된 환관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쏟아 냈다.
고개를 조아린 채 슬픔을 토하고 있을 때,
바깥사정을 염탐하러 떠난 환관이 급한 발걸음으로 광덕전(廣德殿)의 침전에 들어왔다.
반가운 낭보라도 들고 온 것인지 침전 안으로 들어온 환관의 얼굴에 짙은 화색이 돌고 있었다.
“폐하!”
앳된 얼굴의 젊은 환관이 후다닥 뛰어와 유변의 앞에 엎드렸다.
머리에 쓴 관모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에 환관은 바닥에 떨군 관모를 서둘러 머리에 눌러쓰면서 바깥소식을 유변에게 전했다.
“수, 숭산에서 어림총사 이성휘와 장사태수 손견이 대승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어, 어림총사가… 드디어 짐을 구하기 위해…!!”
중원제일 검의 이름을 듣게 된 유변은 그제야 근심을 씻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숭산은 낙양의 지척에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대승을 거뒀다면 낙양을 도모하기 충분할 터.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군세를 총지휘했던 도독 화웅이 중원제일 검의 검에 목숨을 잃었사옵고, 황실과 조정을 배신하고 역신에게 빌붙었던 금군(禁軍) 또한 역습을 받아 궤멸되었다고 하옵니다!”
일말의 희망을 넘어 눈부신 광명이 보이는 듯한 승전보였다.
숭산의 승전보를 들은 유변과 환관들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크게 기뻐했다. 전횡을 일삼았던 역신의 위세가 끝날 때가 머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림총사야말로 만고의 충신이옵니다!”
“분명 황상폐하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환관들이 입을 모아 이성휘의 무략과 용맹을 찬양했다.
동탁의 오른팔이었던 화웅이 죽었다.
또한 황실과 조정을 배신했던 금군의 무리 또한 인과응보를 맞이하였다.
사특한 역적들이 농간을 벌일 때에도 항상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던 황후를 잃게 될까 두려움에 떨던 유변에게 있어 숭산에서의 승전보는 시커먼 암운을 뚫고 지상에 드리우게 된 광휘와 같았다.
“어림총사와 관동의 지방관들이 서량의 역신을 척결하고 낙양을 구원한다면… 짐은 역신과 난세를 막지 못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했다.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의 난.
한나라에 난세를 불러들인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선황의 실정과 무능에 의해 시작된 난세라고는 하나 자신에게도 마땅히 책임이 있었다.
선황의 혈육으로서, 옥좌에 앉은 만승천자로서 수십 년 동안 한나라 황실과 조정이 범해온 잘못과 실정에 대한 업보를 받아들이려 했다.
“과거의 한(恨)과 업보는 모두 짐이 짊어지도록 하겠다. 짐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진류왕은 부디 미래의 광명을 향해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초석이 되기를.
연꽃을 꽃피우기 위한 진흙이 되기를.
유약하고 소심한 성정의 황제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그에 환관들은 놀란 눈으로 유변을 바라보았다.
“황상, 계시옵니까!”
유변과 환관들이 모인 광덕전의 침전에 갑주를 두른 남성이 허리에 검을 찬 채로 들어섰다.
황제가 윤허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비대한 몸집을 가진 남성이 마치 제 안방에 들어오듯 휘하 무관들과 함께 황제의 침전에 들어왔다.
동탁의 조카인 동황이었다.
시중(侍中) 겸 중군교위(中軍校尉)였던 그는 궁궐을 수비하는 내군(內軍)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이, 이런 무엄한! 감히 황제 폐하의 침전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허리에 검을 찬 채 무관들을 이끌고 황제의 침전에 들어온 중군교위 동황의 대역무도한 행위에 광덕전의 환관들이 아연실색한 채 소리쳤다.
그에 동황은 거들먹대는 표정을 지으면서 만승천자에게 예를 취했다.
“태위께서 황상을 안전하게 모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동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따라온 무관들이 유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장안 천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에 앞서 만승천자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황제가 장안으로 향하면 조정대신들 또한 뒤를 따르게 될 터. 동탁은 낙양에 불을 지르기 전에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장안으로 압송하듯 강제로 데려가려 했다.
“짐을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가!”
검을 찬 무관들이 침전을 침범하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유변은 이내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동황을 향해 소리쳤다.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동황이 턱짓하자 무관들이 달려들어 유변의 두 팔을 붙잡았다.
그에 환관들은 감히 무부가 황제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대냐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곧 무관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어서 황상을 모셔라!”
숙부 동탁의 명을 받은 동황은 황제 유변을 비롯하여 황후 당씨, 그리고 황실 종친들까지 모두 끌고 나왔다.
이미 동탁 군은 천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의 윤허도, 조정대신들의 재가도 받지 못했지만 동탁은 안하무인처럼 장안 천도를 일방적으로 강행하려 했다.
중앙 권력을 모두 장악한 동탁은 천도를 강행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숭산 전투의 참패로 위기를 느낀 동탁은 낙양을 모두 불태우고 장안으로 도망치려 했다.
* * *
숭산 전투의 소식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어림총사 이성휘. 장사태수 손견.
당대 최강의 맹장이라 불리는 두 무인들의 무명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사수관 전선에 가로막힌 관동 제후군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별동대로 출격했던 병력이 화려한 승전보를 울리면서 천하의 패권을 건 건곤일척의 전투에 승기를 마련했다.
“어림총사가 해낼 줄 알았소이다!”
“도독 화웅을 효수하고 금군까지 모두 일망타진했다고 하오!!”
승전보를 듣게 된 관동의 지방관들은 이성휘와 손견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불과 2천의 군세로 1만 7천에 이르는 대군을 격파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전공인가!
필시 두 맹장들의 공훈과 업적은 천손만대에 걸쳐 역사에 남을 터였다. 중앙 권력을 장악한 역신의 무단통치에 종언을 고하는 전투로 기록되리라.
“어림총사와 누님께서 해낸 모양입니다.”
하후연이 들뜬 목소리로 조조에게 말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의 부관이다. 원양과 자효 또한 숭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을 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사수관의 높은 성벽에 가로막혀 진척이 없었던 전황에 활기가 불기 시작했다.
드디어 승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숭산 전투의 승전보가 알려지자 사수관 공략의 연이은 실패로 침울해진 병사들의 사기가 분기탱천하듯 하늘로 치솟았다.
“어림총사가 해냈군요. 과연… 해낼 줄 알았어요.”
항상 무표정한 모습을 보이던 흑발의 여인이 기쁨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 벗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금발의 여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조조가 이성휘의 승전에 기뻐하듯,
원소 또한 이성휘의 승전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해낼 줄 알았다.
그가 해낼 거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었으니까.
‘고마워요, 성휘…. 당신의 무예와 용맹이 또다시 우리를 구해주는군요.’
내심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뒤이어 찾아왔다.
계속 이성휘에게 많은 것들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지금쯤이면 진류태수가 이끄는 군세가 숭산을 넘기 시작했을 겁니다.”
문추가 다가와 원소에게 고했다.
그에 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류태수 장막과… 맹덕의 객장들이 투입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예, 그렇습니다. 의용군을 이끄는 유씨 황족이라고 들었습니다.”
중산정왕의 후예.
조조 군의 객장 신분으로 연합군에 참전한 여성.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큰 공들을 여럿 세웠으며, 장거와 장순이 일으켰던 반란까지 진압하면서 유주(幽州)에서 무명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뛰어난 군략과 식견을 가진 의병장과 영용무쌍(英勇無雙)한 무예와 용맹을 떨친 두 의자매들.
의용군을 이끄는 여걸들이 진류태수 장막을 보필하는 부장으로 선발되었다.
“아마도 어림총사는 증원군을 이끌고 낙양을 급습하려 할 거예요.”
“낙양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어르신, 분명 숭산에서 동탁 군이 대패를 당한 것은 사실이나 낙양에는 여전히 동탁을 따르는 무리가 많습니다.”
의문이 드러내는 문추의 말에 금발의 여인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사람은 분명 그럴 거예요. 제가 장담하죠.”
이성휘가 이제 어떻게 행동할지 미리 들여다본 것처럼 원소는 그가 낙양을 직접 공격할 것이라며 단언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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