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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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총사 이성휘가 도독 화웅을 효수했다.
수백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한 공세에 화웅이 전사했으며, 최정예부대인 금군(禁軍) 또한 뿔뿔이 흩어진 채 전멸하게 되었다.
1만 7천에 달하는 군세의 패퇴.
두 날개를 펼치면서 숭산 방면을 포위하고 있던 걸대한 맹금이 머리를 잃고 죽임을 당했다.
“화, 화웅이 죽었단 말이냐?!”
숭산에서 온 전령으로부터 패전소식을 듣게 된 동탁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량 제일의 용장이 죽었다.
또한 숭산에 투입했던 정예부대들 또한 풍비박산으로 박살 나버렸다.
지독한 악몽이다.
실로 지독한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총애하던 사위를 죽인 중원제일 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금군까지 파견했건만… 복수는커녕 오히려 진압에 투입한 병력의 태반을 잃는 최악의 참사를 맞이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패주한 이각 교위와 곽사 교위가 사방으로 흩어진 군세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이각과 곽사가 전후를 수습하고 있다는 전령의 말에 동탁이 시중(侍中) 겸 중군교위(中軍校尉)였던 동황에게 명령했다.
격노에 찬 명령에 동탁의 조카였던 동황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예를 취했다.
“당장 이각과 곽사! 그 빌어먹을 놈들을 낙양으로 불러들여라!
수많은 장수들이 숭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우보. 북호적아. 장룡. 호진. 왕방. 화웅.
일군을 이끌었던 6명의 장수들을 모두 잃게 된 동탁은 이성을 잃은 듯 광분을 토해냈다.
아끼던 장수들을 모두 잃었다.
심지어 최정예부대였던 금군까지 전멸했다.
숭산에서 웅거하던 수천 명의 군세에게 1만 7천에 달하는 병력이 완패를 당했다는 사실에 동탁은 괴성을 내지르면서 집기를 내던지고 검을 뽑아 드는 등의 기행까지 벌여댔다.
“으아아아아!!”
검을 빼든 동탁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환관들을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녀들은 물론,
심지어 궁궐을 경비하던 숙직병까지 베어 버렸다.
사대부와 호족들을 참살하고 백성들을 수탈했던 동탁은 장졸들에게만큼은 한없이 두터웠으나, 숭산 전투의 참패를 들은 동탁은 광인이 되어 있었다.
“어르신!”
동탁이 길길이 날뛰고 있을 때,
그를 만류하듯 낭중령 이유가 다급히 대전에 들어섰다.
“숭산을 넘은 반란군이 의양과 영녕의 병참기지들을 공격한다면 후방보급을 잃은 사수관 전선은 무너지게 될 것이며, 관동의 십만 대군은 사수관을 넘어 낙양을 도모하려 들 겁니다.”
“그걸 누가 모르는가! 나도 알고 있네!!”
뻔히 아는 말을 되풀이하는 이유의 행동에 동탁이 격노를 담아 소리쳤다.
그에 이유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림총사 이성휘를 우군으로 끌어들이십시오. 어렵다면 화친을 맺는 것도 좋습니다.”
“놈을… 우군으로 만들란 말인가?”
중원제일 검을 포섭하라는 이유의 방책에 동탁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성휘를 우군으로 끌어들인다.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겠노라고 벼르던 숙적을 우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말에 동탁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숙고에 빠졌다.
“상급장군의 벼슬과 함께 어림총사를 어르신의 손녀사위로 들이십시오.”
“손녀사위…? 우리 백아를, 한나라의 새 황후로 책봉하기로 한 백아를 그놈에게 짝지어 주라는 말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을 정략과 교섭을 위한 패로 삼으라는 이유의 진언에 동탁은 잠시 격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냉정을 되찾으며,
숭산 전투의 대패로 궁지에 내몰리게 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 중원제일 검을 거두셔야 합니다.”
“흐음….”
오랜 벗이자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화웅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지금은 실리를 따져야 할 때다.
서량 제일의 용장을 일합에 쓰러트릴 정도의 무예와 담대한 용맹을 갖춘 당대 최강의 맹장.
당대 최강의 맹장을 휘하에 둔다면 뿔뿔이 흩어진 천하를 다시 통일하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
“어림총사 이성휘를 위장군(衛將軍)에 임명하고 막대한 규모의 봉토와 함께 제후에 봉하십시오. 어르신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아무리 짐승 같은 무리라도 크게 감복하여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손녀딸을 주어 중원제일 검을 농서동씨(隴西董氏)의 일원으로 포섭한 뒤, 위장군의 벼슬과 함께 사예주의 대제후로 삼는다.
욕망을 가진 사람인 이상,
당연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황후에 책봉하기로 했던 손녀딸을 배필로 내리겠다는 통 큰 조건을 내걸 정도로 동탁은 숭산 전투의 참패에 큰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제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것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싶지가 않네.”
동탁은 금지옥엽처럼 키운 손녀딸을 정략과 교섭에 세우는 것이 영 꺼림칙했는지, 계속 주장해 오던 장안 천도에 대해 발언했다.
동탁은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배신자와 변절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교활한 승냥이 같은 것들이 언제 뒤통수를 노릴지 알 수 없었기에 동탁은 내심 전쟁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피신할 것을 원하고 있었다.
“허나 어르신, 장안은 한나라의 전(前) 수도였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크게 척박해졌습니다. 인구 또한 낙양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게다가 장안은 서쪽으로 크게 치우쳐진 곳에 있으니, 어르신께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신다면 관동의 반란군 무리가 너나 할 것 없이 왕과 제후를 자칭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이유가 장안 천도를 고집하는 동탁에게 강한 우려를 표했다.
천도는 가벼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닌가? 전쟁을 수행하는 도중에 천도를 결정한다면 필시 장졸들이 큰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관동의 비천한 무리가 스스로 왕과 제후를 참칭하며 난립한다면 오히려 아군에게는 득이 될 일이 아닌가요?”
동탁과 이유가 장안 천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작은 소녀가 10여 명의 시녀들을 대동한 채로 대전에 들어섰다.
회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매서운 늑대처럼 삼백안을 가진 소녀였다.
“또한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긴다고 하여 모든 백성들을 서쪽으로 옮길 필요는 없어요. 노인과 아이들은 땅에 묻어 버리고, 젊고 건장한 백성들만 추려내어 장안으로 옮기면 되죠.”
노인들은 밥이나 축내는 벌레에 불과하다.
또한 아이들은 장안으로 이주한 백성들이 또 낳으면 된다.
늑대 눈을 가진 소녀는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잔악함을 속삭였다.
“낙양을 모두 불태우면 관동의 반란군들은 갈 곳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터. 제 분수도 모르고 천하를 도모하려는 저 반란군들은 관동의 패권을 두고 반목과 내분을 일으킬 게 뻔하죠.”
한나라 황실과 조정을 위해 역신을 토벌하겠노라는 관동 반란군의 명분은 한낱 헛소리에 불과했다.
아군이 거점을 서쪽으로 옮긴다면,
대의를 부르짖으며 뭉친 반란군들은 서로에게 창검을 겨눌 게 분명했다.
“허나 위양군, 갑자기 장안성으로 천도하겠다고 발표하면 조정대신들이 크게 반대할 겁니다.”
이유의 말에 소녀가 빙긋 웃었다.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야 마땅해요. 할아버님의 대의명분을 이해하지 못한 무능한 족속들이니까요.”
결정과 결단은 힘과 권력을 가진 위정자에게만 허락된다.
힘과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말 따위는 한 줌의 가치도 지니지 못 하는 허언에 불과할 것이다.
동탁의 손녀딸, 동백.
소녀는 권력을 잡은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아 위양군(渭陽君)에 봉해진 제후였다.
인의와 도덕이 미치지 않는, 오로지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인 변방에서 살아온 동탁의 손녀답게 잔인하고 악랄한 성정이었다.
“방금 전에 중원제일 검과의 정혼에 대해 말씀하셨죠? 저는 딱히 반대하진 않지만…, 과연 명예롭고 긍지 높으신 중원제일 검께서 제안을 받아들일지가 미지수네요.”
회색빛을 형형하게 내뿜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중원제일 검 이성휘.
그를 어찌 모르겠는가.
만약에 그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흔쾌히 지아비로 섬기겠지만, 동백은 중원제일 검이 결코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황실과 조정을 중시하는 그가 중앙 권력을 찬탈한 농서동씨 가문을 적대했으면 적대했지, 벼슬과 봉토에 눈이 멀어 전향해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 *
숭산을 공격했던 도독 화웅이 전사하고 1만 7천에 이르는 대군이 패주했다.
낙양이 크게 요동치게 되었다.
중원제일 검이 화웅을 효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 유변은 안도감에 서린 한숨을 내쉬었고, 왕윤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서량에서 온 역적의 차례가 머지 않았다며 기대감을 보냈다.
한편…,
여포는 여전히 칩거를 이어 나갔다.
의지와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그녀는 마치 사자(死者) 같은 몰골을 한 채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네. 역시 중원제일 검이야.”
숭산 전투의 전말을 듣게 된 여포는 자괴감에 서린 비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량 제일의 용장을 참했으며,
한나라의 최정예병인 금군과 서량군까지 모두 격파했다.
실로 대단한 공훈이다. 나흘 밤낮으로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둔 이성휘의 공훈은 분명 유구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군웅들이 쌓은 업적에 견줄 만했다.
“나 같은 년은 절대로 못 할 일이야…. 매번 꼴사나운 실패만 하니까.”
낙양의 패권을 두고 동탁 군과 치렀던 격전에서 무참히 패배했으며, 그 탓에 양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말았다.
모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내가 만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고집불통 같은 성정의 양부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 텐데.
“봉선 님께서 괴로운 결단을 내리신 덕분에 저희들이 살아 있습니다! 봉선 님께서는 수만 명의 아들들을, 그리고 10만 명이 넘는 부모들을 살리신 겁니다!”
만약 여포가 양부 정원을 죽이고 투항하지 않았다면 수만 명에 이르는 병주군은 전멸했을 것이다.
또한 병주에서 있을 부모들은 전쟁터에서 모든 병사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그를 알기에 병주 출신의 장졸들은 여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면서 그녀가 다시 자신들을 호령해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나를 알아준들…, 천하는 나를 알아주지 않아. 결국 양부를 죽인 괴물로, 사욕과 욕망에 빠져 충성과 무명을 내던지고 부와 권력을 택한 배신의 무장으로 남을 뿐이야.”
나한테는 더 이상 일말의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산송장일 뿐.
무명과 명예를 추구하던 여포는 양부를 살해한 날에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까 당장 떠나. 당장 가솔들을 데리고 병주로 돌아가. 그 여우 같은 년이 군권을 다시 얻어냈다며.”
가후가 낭중령 이유와 담판을 지은 덕분에 병주군의 지휘권이 다시 여포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여포는 전장을 나갈 생각이 없었다.
부상이 심하다는 것은 핑계일 뿐,
맹렬하게 타오르던 용맹과 의욕이 잉걸불처럼 서서히 사그라지게 된 여포는 죽은 눈을 한 채 의지를 외면했다.
“이 장문원, 봉선 님을 두고 결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죽더라도 함께, 봉선 님의 곁에서 최후를 맞이하겠습니다.”
자신을 두고 떠나라는 여포의 말에 장료는 결연함에 찬 눈빛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
당신의 곁이 바로 내가 있을 곳이므로.
천하가 당신을 외면할지언정,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가…. 나 같은 년과 계속 어울리면 너한테까지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변함없는 충성을 다하는 흑발의 여인을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보았다.
온갖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건만.
지금도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고 있건만.
그런데도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는 장료의 모습에 여포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괴로움을 토해냈다.
“하아…. 진짜 중증이시네.”
자괴감이 섞인 번민을 쏟아 내는 금발의 여인과 결연한 모습으로 맞서는 흑발의 여인.
두 여인들의 음울한 대치를 바라보고 있던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여포가 머물고 있던 내실에 발을 들였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모르시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여포를 본 가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하였던 병주의 비장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줄이야.
마치 산송장이 아닌가.
숨을 쉬고 있을 뿐인 시체처럼 몰골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수척하게 변한 어깨와 두 팔은 창검을 휘두르는 무장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해져 있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울 거라고 해요. 관동의 적들이 낙양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모조리 도살할 생각인 거죠.”
숭산에서 대패를 당한 동탁은 궁지에 몰린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짐승이 가장 사납듯이,
오른팔이었던 화웅을 잃게 된 동탁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광인이 되어 있었다.
낙양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뒤에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던져 버리겠지.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온 한나라의 수도는 무간지옥이 될 터였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거예요?”
재차 이어진 가후의 물음에 시커멓게 죽어 버린 두 눈에 일말의 생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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