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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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아픔과 고통은 무인에게 있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아픔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을 끝내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제일의 무인이 되겠노라고 결심했던 여포는 무수히 많은 아픔과 고통들을 참고 인내한끝에 북방의 비장이라 불리며 수많은 무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하아… 하악…!!”
상반신에 붕대를 두른 금발의 여성이 처절한 신음을 내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붉은 눈동자에 광기가 서렸다.
그 눈빛이 마치 치명상을 입고 서서히 죽어 가는 늑대를 떠올리게 했다.
새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고통에 섞인 식은땀.
식은땀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금발의 여인은 이를 꽉 깨물면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의 끔찍한 아픔을 감내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상처투성이의 여인이 거친 불쾌감을 토해내면서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차가운 금속을 늘어뜨린 중원제일 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늘어뜨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성의 눈빛이 마음을 힘껏 후벼 파듯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으으으…, 으아아아아!!”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명과 명성을 모두 잃고,
한순간에 더러운 비겁자로 떨어져 버린 무인의 절규였다.
“빌어먹을──!!”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산발로 늘어뜨린 여인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바닥을 내리쳤다.
주먹을 타고 흐르는 고통.
허나 마음속을 불태우는 격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롭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가슴을 잿더미로 만들고 정신마저 불태울 것만 같은 맹렬한 불길이 금발의 여인을 한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봉선 님….”
중상을 입은 여포가 기거하고 있던 내실의 장지문이 열리면서 흑발의 여인이 들어왔다.
긴 흑발을 늘어뜨린 미녀.
청초한 완숙미를 뽐내는 여인이 수심에 젖은 눈빛으로 여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흑발의 여인에게 안쓰러움을 느낄 법도 했건만, 그녀를 직시하는 여포의 두 눈은 맹렬한 증오와 분노로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왜 나를 살렸어! 왜 나를 살렸냐고, 문원!! 결투에 왜 끼어들었냐고!!”
북방에서 쌓아 올렸던 명예와 무명을 잃은 여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염원이 바로 중원제일 검과의 결투였다.
중원제일 검과 싸워 무위를 증명하겠다는 목표가 바로 여포의 마지막 남은 긍지이며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영광으로 남았어야 할 패배는 처절한 치욕이 되어 여포의 마지막 남은 명예를 앗아갔다.
병주의 비장 여포가──
결투의 승패를 인정하지 않고 도망쳤다.
부하들이 무단으로 범한 행동이라고 할지라고 말이다.
“죽었어야 했어…!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긍지를…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난세의 무인으로 죽기 위해서라도!!”
정정당당하게 치러진 단기결전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목숨을 유지하고자 비겁하게 도망쳤다.
정말 나는 죽기를 각오했던 걸까?
가슴 한편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안도하지는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남은 긍지마저 잃었다는 상실감과 자괴감 때문인지, 여포는 제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번뇌하며 망념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아아악!!”
두 눈을 부릅뜨면서 장료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비명을 토해내던 금발의 여인이 돌연 고통에서 비롯된 비명을 내질렀다.
붕대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염료를 담은 통이 터진 것처럼 붉은색이 뚝뚝 흘러내렸다.
간신히 봉합한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리라. 상반신에 겨우 붕대만을 둘렀을 뿐인 여포의 새하얀 나신이 금방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봉선 님! 다, 당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됐어, 그냥 둬!!”
몸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격통에 비명을 내지르던 금발의 여인이 돌연 고개를 들어 장료를 향해 소리쳤다.
마지막 남은 긍지마저 잃게 된 뒤,
몇 번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그녀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대로 피가 멈추지 않게 되어 비참하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여포는 심적으로 크게 내몰려 있었다.
“괜찮아, 그냥 죽어버려도…. 나는 비참하게 죽어도 싼 년이니까….”
양부를 죽이고 굴욕적인 항복을 택했다.
부하들을 위한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주군을 향한 충(忠)과 양부를 향한 효(孝)를 져 버리게 된 자신은 천하 만민들로부터 증오와 모멸감에 찬 규탄을 받아 마땅한 역적에 불과했다.
내가 비참하게 죽는다면 모든 이들이 크게 기뻐하겠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경애와 존경도 받지 못한 채,
평생을 경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리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숭산 방면으로 침투하려는 이성휘과 손견을 지원하기 위해 원소는 지방관들과 함께 사수관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적의 경계를 붙들기 위한 수단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교란이며,
또한 주공(主攻)과 조공(助攻)을 혼란시키는 양동공격의 일종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왜 적들이 안 보이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우거진 수풀을 가르면서 산을 오르던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의 의아함을 토해냈다.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 병사들의 걸음 소리 뿐.
병장기에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와 갑옷이 철컥철컥 금속음을 내고 있었음에도 고요한 정적이 흘러가고만 있었다.
“앞서 파견된 척후병들 또한 적들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후돈의 말에 그녀를 뒤따르던 흑발의 여인이 대답했다.
대범하게 사지(死地)에 들어선 여걸,
이성휘를 보필하기 위해 하후돈과 함께 스스로 참전을 자원한 조인은 척후들을 계속 보내어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척후들은 모두 근처에 그 어떤 흔적들도 보이지 않는 보고만을 할 뿐이었다.
‘설마 동탁 군은 낙양의 턱밑이나 다름없는 숭산 방면을 전혀 방비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 적들이 그렇게 허술할 리 없다. 군략과 전술을 모르는 필부가 아니고서야….’
수차례 척후들을 보냈음에도 흔적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수상쩍었다.
시커먼 의심이 조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자랑하는 여걸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단번에 의심을 떨쳐 놓았다.
이제 와서 두려움에 떤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적들의 매복에 당하게 된다면 용맹하게 응전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괜찮으십니까?”
앞장서서 수풀을 헤쳐 나가던 이성휘가 조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에 조인은 손끝을 잠시 떨다가,
이내 이성휘가 뻗은 손길을 맞잡으면서 산길 위로 올라섰다.
“감사합니다.”
형양을 출발한 아군 군세는 어귀를 넘어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매복하고 있던 적들이 공세를 시작한다면 저항조차 못하고 전멸할 수밖에 없는 사지(死地)를 지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안약하게도,
주의와 경계를 계속 기울여도 모자랄 판국에 사내의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도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어림총사가 내 손을…! 하, 하지만 언니와 어림총사는 서로 연모하는 관계다. 어림총사의 친절은 그저 단순한 호의일 뿐….’
냉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엄격한 성정을 가진 여걸의 마음이 사춘기 소녀처럼 녹아내렸다.
작은 친절에도 기뻐하고,
작은 호의에도 가슴을 두근대는,
차가운 철가면을 쓴 것처럼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심정은 어느 때보다도 흔들리고 있었다.
“저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무사히 넘기만 하면 한숨 돌리셔도 될 겁니다.”
짐승 가죽을 걸친 남성들이 말했다.
그들은 숭산에서 활동하는 사냥꾼으로,
동탁을 타도하기 위해 군세를 일으킨 연합군을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예주의 백성들 중에 폭정과 전횡을 일삼는 동탁을 미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기에 숭산의 지리에 밝은 사냥꾼과 심마니들이 솔선수범하여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잠시 휴식한다.”
이성휘가 검을 들어 올렸다.
지친 장졸들의 피로를 달랠 겸,
사냥꾼과 심마니들이 말한 고개에 적의 매복이 있지 않을까 수색하기 위함이었다.
“총사!”
“산기슭 부근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립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아군 군세가 넘어야 할 고지 인근을 수색하고 돌아온 척후병들이 마침내 적을 포착했다.
고지 아래에 위치한 산기슭.
수천에 달하는 동탁 군의 군세가 산기슭 아래에 주둔하고 있었다.
우거진 숲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시야를 포착할 수 없는 험지(險地)에 적들이 웅거하는 것이었다.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적의 기습에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저따위 장소에 주둔하고 있지?”
수천 명에 달하는 동탁 군이 산기슭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견이 헛웃음을 토해냈다.
물론 희소식인 일이나,
산기슭 아래에 주둔하는 적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고지를 넘은 뒤, 단숨에 산기슭 아래의 얼간이들을 친다.”
이성휘의 말에 손견이 어깨를 으쓱였다.
조조군 장수들도, 손견군 장수들도 모두 이의가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 *
동탁의 명을 받고 숭산 방면을 방비하게 된 장수는 그의 사위였던 중랑장 우보였다.
휘하 장수인 복호적아와 함께 군세를 이끌고 숭산에 주둔하게 된 우보는 무더운 뙤약볕을 피하고자 산기슭에 군영을 펼쳤다.
우거진 숲이 둘러싸인 장소였기에 결코 주둔해서는 안 될 최악의 장소였으나, 어떻게든 무더운 뙤약볕을 피하고 싶었던 우보는 선선한 산바람이 부는 산기슭을 주둔지로 선점했다.
“왜 하필 사수관을 서영 같은 놈에게 맡긴단 말인가! 어르신께서 참으로 너무하시는군! 어찌 이 사위를 홀대하고….”
우보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될 사수관 전선을 총지휘하기를 원했다.
거대한 전선을 지휘하는 도독.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통솔하는 장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사수관 전선을 총괄하는 도독은 낭중령 이유의 천거를 받은 서영이 임명되었고, 우보는 사수관 방면과 떨어진 숭산 방면을 지휘하게 되었다.
“중랑장, 방금 전령이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사수관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영광을 서영, 그놈이 모두 가로채고 있는 것일세!”
과연 허영심에 찬 우보다운 말이었다.
독보적인 활약하게 된 서영을 향한 악의를 토해낸 우보는 분기를 씩씩 토해내면서 술을 들이켰다.
자신이 만약 도독이었다면 겁쟁이처럼 요새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전면전을 노렸을 것이라며 부하들을 향해 떠벌려댔다.
“그렇사옵니다, 중랑장!”
“감히 서영 따위가 어찌 중랑장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갑옷을 걸친 채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우보를 따르듯이 그의 휘하 장수들 또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취기에 얼굴이 붉어진 채,
낄낄 웃음을 터트리면서 우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전선에 선 장수들이 아니라 나들이를 나온 나그네들처럼 태평하기만 했다.
관동의 반란군들은 지금 서영이 있는 사수관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중이다. 가파르고 험준한 계곡과 골짜기들이 많은 숭산에 올 리가 없다며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다.
“커헉!”
“저, 적의 기습이… 크흡!!”
우보와 장수들이 껄껄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채 꾸벅꾸벅 졸면서 경계를 서던 병졸들의 목이 잘려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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