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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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태수 손견과 함께 기병부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후장군 원술은 인질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본영에 강제로 구금된 채,
형주 군세가 수송해온 물자들을 모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여겨야 할 형편이었으나, 원술은 이 치욕을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주겠노라며 조조를 향해 살의를 드러낼 뿐이었다.
“원공로를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분명 큰 후환이 될 걸세.”
조조가 이성휘를 보며 물었다.
원술은 하등 도움될 것 없는 놈이다.
필시 이번 일을 계기로 못된 흉계를 꾸미겠지.
여남원씨 가문의 적통을 살해했다는 부담을 짊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본영에 구금된 원술을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맹덕 님께서 부담을 애써 짊어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병력과 물자를 모조리 빼앗긴 원술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테니까요.”
“흠…. 그건 그러네만.”
“이제 곧 정북장군이 이끄는 기주 군세가 당도하게 될 겁니다. 원술의 신병을 정북장군에게 양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분명 정북장군은 원술에게 큰 앙심을 품고 있을 테니까요.”
“실로 마음에 드는 명안이군!”
원술의 신병을 원소에게 넘기자는 이성휘의 제안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원소와 원술은 오랜 견원지간.
서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칼부림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먼 길을 달려왔을 오랜 벗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 주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이 몰려오는 필부를 본영에서 치워 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방안이었다.
“방금 전에는 맹덕 님답지 않으셨습니다. 대뜸 자리에서 검을 뽑으시다니….”
원술을 향해 거침없이 살의를 발산했던 흑발의 여인을 떠올린 이성휘가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조조는 분명 원술의 입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살의를 휘두르려 한 그녀의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냉철한 지혜와 완벽한 판단력을 겸비한 그녀답지 않은 무분별한 잔인함이었다.
“노, 놈이… 귀관을, 모욕했지 않은가…!”
흑발의 여인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여남원씨 가문의 적손이라는 우수한 혈통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필부 따위가… 감히 이 조맹덕의 부관을 모욕했단 말일세!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네!”
마치 투정을 부리듯.
떼를 쓰고 억지를 범하듯이.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삐죽 내미는 조조의 모습은 성난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조조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은 이성휘는 자신을 위해 나서준 주군에게 감사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맹덕 님.”
솔직한 마음이 담긴 감사 인사에 조조의 얼굴이 더욱더 붉게 달아올랐다.
붉은 눈동자가 황홀하게 젖었으며,
잘 익은 앵두처럼 탐스러운 입술은 입맞춤을 바라는 것처럼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읏!”
작은 다람쥐 같은 조조의 모습에 초선을 떠올린 걸까.
이성휘는 무심코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만질 것처럼, 쓰다듬을 것처럼 손을 들어 올린 이성휘의 행동에 조조는 기대감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한 걸음 내디디며 머리와 몸을 내밀었다.
하지만 접촉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가냘픈 뺨을 쓰다듬으려 했던 이성휘가 다시 손을 내리면서 한 걸음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
애달프게 달아오른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있던 흑발의 여인은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린 이성휘의 행동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를 만져 주기를,
나를 쓰다듬어두기를 바랐는데.
혹시 내가 과도한 기대한 것일까 머쓱함이 들면서도, 자기 기대에 좀처럼 부응해주지 않은 이성휘에게 야속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 겁쟁이가.”
흥!
조조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결국 또 나만 기대한 꼴이군! 매번 혼자 기대하고, 혼자 끙끙 앓아버리고…!’
흑발의 여인이 등을 돌렸을 때,
앞을 향해 뻗은 두 팔이 그녀의 왜소한 몸을 감싸면서 꼭 끌어안았다.
“우읏!”
사내의 넓은 품에 안겨들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분명히 이성휘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였다.
달콤한 향수도, 그윽한 향료의 향기도 아니지만 그녀는 이성휘가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나는 체취를 좋아하고 있었다.
바로 등 뒤에서 자신을 와락 껴안으면서 풍기는 아찔한 체취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귀, 귀관…?”
“죄송합니다, 맹덕 님.”
사랑스럽게 속삭이듯이 귓가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조의 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섬세한 손길을 이용한 전희에 절정을 느껴버린 여인처럼 애처롭게 온몸을 떨어댔다.
‘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둔감하기 짝이 없었던 부관이 갑자기 늑대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오늘 어떤 속옷을 입었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부관을 부르기 전에 향수라도 뿌리는 건데.
게다가 오늘은… 위험한 날!
오늘 밤은 조심해야… 아니, 오히려 좋았다!
중원제일 검을 패국조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삼아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정사실을 만들어 이 남자를 차지해 버리자.
‘아니,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둔감하기 짝이 없던 부관의 적극적인 공세에 놀란 흑발의 여인은 짧은 찰나의 시간에 수많은 생각들했다.
“…….”
“…….”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상태로 토끼처럼 두 어깨를 움츠린 흑발의 여인과,
두 팔로 여인을 껴안은 채 그대로 굳어 버린 남성.
만약 이 어색한 장면이 전통극으로 나왔다면, 수많은 구경꾼들은 “그래서 다음 장면으로 언제 넘어가는데!!”라고 소리치면서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을 것이었다.
“뭐, 뭐라고… 말 좀 해 보게… 귀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조조였다.
고개를 푹 숙인 흑발의 여인은 당돌하게도 뒤로 몸을 기대면서 사내의 품에 밀착했다.
‘서향나무 향기 같아.’
조조를 꼭 껴안은 이성휘는 서향나무를 떠올렸다.
빽빽한 가지들 속에 핀 한 떨기의 꽃.
홍자색 꽃잎 속에 달콤한 향기를 머금고 있는 서향나무.
조조에게서는 서향나무의 향기가 났다. 두 팔로 강하게 껴안을 때마다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성휘는 품에 안은 여인을 계속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마저 품게 되었다.
“맹덕 님….”
침묵을 곱씹고 있던 이성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에 조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2년 동안 짝사랑해온 남자가 빨리 자신에게 연모의 감정을 고백해주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때───
“언니.”
흑발의 여성이 군막으로 들어왔다.
냉정하고 침착한 아름다운을 가진,
군중을 단번에 압도할 정도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성이었다.
보고를 위해 군막으로 들어선 조인은 이윽고 광경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에 물이 얼어붙는 것처럼.
“저, 정북장군이 지금 막 둔영에 도착했습니다.”
입을 쩍 벌리면서 경악할 만한 광경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음에도 조인은 평온했다.
실로 강철과도 같은 침착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외견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존경하는 맏언니와 어느덧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된 남성이 밀회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조인은 속으로 크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 무무무슨!! 언니와 어림총사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니… 대체 언제부터…!!’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경악.
언니와 어림총사가 서로를 연모하는 관계임을 알게 된 조인은 이유 모를 아픔을 느꼈다.
* * *
마지막 남은 거점이었던 업성(鄴城)을 차지한 원소는 당당히 기주의 패자에 등극했다.
기주의 원소.
연주의 조조.
황하를 기준으로 세력을 양분하듯 군세를 이끌고서 낙양을 출병했던 정북장군과 정동장군은 뿔뿔이 흩어졌던 주(州)를 수습하여 군벌의 일각이 되었다.
“정북장군께서 오셨다!”
“깃발을 나부끼고 고각을 크게 울려라! 기주의 정북장군의 왕가이시다!!”
원소를 호위하는 근위대는 대장군부 소속이었던 낙양 출신의 무관들이었다.
우렁찬 고함을 크게 내질렀다.
손에 든 깃발을 치켜들면서 정북장군의 위세를 널리 알렸다.
원소를 향한 충성심이 가히 절대적인 근위대는 오만한 자존심이 똘똘 뭉친 집단이다. 그들이 걸친 휘황찬란한 갑주를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소란은 그만 거두세요, 맹대. 진류왕 전하께서 군중에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우직한 충성심을 자랑하는 근위장을 만류한 금발의 여인이 말에서 내려섰다.
풍성한 흰 갈기를 자랑하는 백마에서 내린 금발의 여인은 수려한 아름다움으로 장졸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황금을 녹여낸 듯한 진한 금발.
밤하늘의 샛별 같은 홍색 눈동자가 아찔하게 빛났다.
백조처럼 우아하고 청려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가 수백 명에 달하는 장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개선장군 같은 무거운 위엄을 떨쳤다.
“정북장군.”
“드디어 오셨구려!”
원소와 진중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접한 관동의 지방관들이 부리나케 맞이했다.
환호. 동경. 경탄.
수많은 군중들이 원소를 향하고 있었다.
청류파의 명망 높은 명사이며, 대장군 하진을 보필하며 대장군부를 이끌었던 원소는 지방관들의 기대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초.”
원소와 친위대가 본영에 도달했을 때,
휘하 무장들과 함께 흑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요, 맹덕. 뭐,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지만요.”
“업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북방을 호령하는 패자가 되었군.”
“후후, 고마워요.”
조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은 금발의 여인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던 남성을 바라보면서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었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네요, 어림총사.”
“예.”
이성휘를 바라보던 원소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다소 붉어져 있었다.
매우 미세한 변화였지만…,
이성휘를 빤히 쳐다 보면서 놀리기를 좋아하는 원소였기에 미세한 변화를 즉시 감지해냈다.
‘성휘의 얼굴이 달아오른 상태네요. 설마 제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건가요? 후후, 귀여우셔라. 뺨이라도 깨물어 주고 싶네요.’
자신에게 유리한쪽으로 해석한 원소는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헤픈 웃음을 지었다.
이 무뚝뚝한 남성이 나를 기다렸다니.
학수고대를 했을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을.
‘제가 만약 변고가 생겨 합류가 늦어졌다면…. 우리 귀여운 성휘가 상사병이라도 걸렸을지도 모르겠네.’
속으로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귀여운 사람.
누나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걸까.
저 무뚝뚝한 얼굴 속에 애절한 사랑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실웃음이 무심코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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