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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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악재들로 인해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던 관동 제후군은 형양 전투의 승전으로 승기를 거두게 되었다.
비장 여포를 물리쳤다!
여남군과 영천군을 연쇄적으로 침범하여 중원 지역을 유린했던 병주군이 무너졌다!
승전 소식을 들은 장졸들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면서 중원제일 검의 명성을 칭송했다. 창검을 크게 치켜들면서 영웅의 이름을 환호하기까지 했다.
“패전 소식을 들었을 동중영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것이오!”
“핫핫핫! 이제 사수관만 돌파하면 바로 낙양이외다! 어서 나아갑시다!!”
사수관을 넘으면 바로 낙양이다.
형양 전투에 고무된 장졸들은 형양을 통과하여 사수관 인근까지 진군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동탁 군 군세는 출현하지 않았다.
아마 사수관에서 관동의 적들을 막을 요량이겠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별다른 부상도 없습니다.”
함께 말을 몰던 조인이 이성휘를 향해 물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도 역시 조인은 무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그저 사무적으로 대할 뿐이라는 투박함. 서늘한 얼음장처럼 투명한 조인의 모습은 여전했다. 마치 온몸으로 차가운 냉기를 발산하는 듯하다.
‘으으으!! 이럴 때는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 거지…?! 분명 나를 매정한 돌계집으로 취급할 거야! 제대로 웃지도 못 하는 년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해!!’
그러나 얼음장 같은 외견과는 달리,
내면에서는 맹렬한 격정이 몰아치고 있었다.
상냥하고 친절한 반응을 보이고 싶었음에도 만년설처럼 차가운 얼굴은 여전히 냉기를 뿜어낼 뿐이다.
애틋한 감정이 풍부한 조홍은 물론, 무뚝뚝한 성정으로 유명한 조조보다도 과묵하고 냉정한 성정을 가진 조인에게 ‘애틋한 애교’는 유주(幽州)와 교주(交州)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자효 님은 괜찮으십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이성휘의 물음에 조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뚝뚝하게 답했다.
내면을 철저히 숨긴 채,
한결 같이 차가운 모습으로 일관했다.
과묵하고 엄격한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겠지. 현재 그녀의 내면에서는 매우 격렬한 심적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진짜 대단한데, 중원제일 검! 설마 여봉선까지 쓰러트릴 줄이야! 하하핫, 이런 복덩이 같으니!!”
말을 몰면서 다가온 하후돈이 이성휘의 등을 정겹게 내리치면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여포를 극과 함께 베어 버렸다.
말과 함께 통째로 베어 버린 마인참(馬人斬)에 이은 경이로운 무예였다.
사예주를 시산혈해로 뒤덮었던 여포를 쓰러트린 그를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의 무위는 중원(中原)을 넘어 천하(天下)의 제일(第一)을 논할 정도였다.
“아…!”
오랫동안 사귄 지기처럼 살가운 모습을 보이는 하후돈의 행동에 조인이 안타까움에 찬 침음을 흘렸다.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지금까지 담소를 나누던 이성휘를 빼앗긴 것만 같아 서글픈 마음이 밀려들었다.
물론 그런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과묵하지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패국조씨 가문이나 패국하후씨 가문의 데릴사위라도 되는 게 어때? 중원제일 검이 데릴사위로 들어오게 된다면 가문 어르신들도 두 팔 벌려 맞이해 줄 텐데.”
조씨 가문이나 하후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오라는 하후돈의 당찬 제안에 이성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단순한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제안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자효, 네 생각은 어때?”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조인을 향해 하후돈이 물었다.
그에 조인이 답했다.
“저도 공감합니다.”
중원제일 검을 패국조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인다.
차가운 가슴에 들뜬 기대감이 불었다.
맏언니 조조는 가문과 세력을 이끄는 군주의 신분이므로 당연히 제외될 터.
중원제일 검과을 데릴사위로 두기 위한 혼약 대상에 자신과 조홍이 거론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렴은 중원제일 검과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천성이다. 당연히 내가 중원제일 검의 혼약 대상이 될 수밖에…. 언니와 패국조씨 가문을 위해서라도!’
중원제일 검의 배필!
조인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패국조씨 가문의 천하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중원제일 검이 반드시 필요했다. 조인은 언제든 정략을 위한 희생양이 되겠노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맏언니가 여동생의 이러한 시커먼 내심을 간파했다면 사랑하는 남성에게 먼저 마수를 뻗힌 발칙한 년과 함께 황하에 내던졌을 것이다.
“소란스럽군. 조용히 해라, 원양.”
흰 갈기의 백마를 탄 조조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맹덕, 병주의 비장까지 쓰러트린 중원제일 검을 한시라도 빨리 패국조씨 가문의 데릴사위로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 다른 가문이 채가기 전에 말이야.”
“떠들썩하여 뭔가했더니….”
하후돈의 말에 중얼거리며 답한 흑발의 여인은 이성휘를 힐끗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 일이 떠오른 걸까.
조조는 물론, 이성휘 역시 얼굴이 붉어진 채였다.
“큼, 큼큼…. 지금은 전황이 집중해라!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중에 의논하겠다.”
쑥스러움에 찬 반응을 보이던 조조는 하후돈의 제안을 뿌리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전쟁에 집중해야 할 때다.
원론적인 말을 꺼내면서 답을 회피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논제를 의논하겠다는 조조의 말에 조인은 들뜬 기대감을 보였다.
혹시 자신이 중원제일 검과의 정략혼 상대로 선점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었다.
* * *
형양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하게 된 동탁 군은 사수관에서 관동의 적들을 막기로 결정했다.
도독(都督) 서영.
그는 신중한 성정으로 유명한 숙장이었다.
사수관 전선의 총지휘를 위임받게 된 서영은 철옹성 같은 방비를 형성하면서 낙양을 도모하기 위해 몰려들 적들을 맞이하려 했다.
“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죠?”
잿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격노에 찬 시선을 보내면서 물었다.
형양 전투에서 패주하여 사수관에 입성하는 그 순간까지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가후는 끝내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서영을 향해 책임을 물었다.
“사수관에서 결코 출병해선 안 된다는 태위 어르신과 낭중령의 명이 있었소.”
“하지만 전선에 선 도독에게는 상황에 따라 병마를 지휘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을 텐데요?”
“나는 그저 명에 따라 움직일 뿐이오.”
상부로부터 하달된 명령을 수행할 뿐이라는 서영의 답에 가후는 답답함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서영은 뛰어난 군재를 지닌 장수였다.
그러나 완고한 성정 탓에 민첩하고 기민하지 못했다.
전투를 훌륭하게 이끌 명장이 되 전선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으로서의 재량이 부족하다. 필시 그 완고한 성정은 언젠가 서영에게 큰 화근이 될 터였다.
“토로교위, 그대를 사수관 전선의 군사로 발탁하라는 낭중령의 전언이 있었소.”
“그거참 고맙군요. 미련하고 무지한결정 때문에 형양에서 죽을 뻔했지만!”
가후의 표독스러운 말에도 서영은 묵묵부답을 지킬 뿐이었다.
그녀는 낭중령 이유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유에게 계책을 진언하여 낙양을 침범했던 정원군을 완파한 이후부터 군중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서량 장수들은 그녀를 ‘무위군의 암여우’라 불렀다.
냉철한 지휘와 잔인무도한 계책.
여우처럼 음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흘리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서량 출신의 장수들은 음란한 옷차림새를 한 채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걷는 그녀를 강제로 범하고 싶다는 흑심을 품고 있었으나, 낭중령 이유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감히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형양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오. 비장이 큰 부상을 입고 병주군마저 큰 손실을 입게 되었으니.”
“…….”
서영의 말에 가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여포가 패배했다.
낙양을 벌벌 떨게 하였던 북방의 비장이 중원제일 검과의 단기결전에서 졌다.
가후는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적의 매복들을 모두 간파했다면 형양에서 패배를 겪는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서영에게 분명 책임이 있었지만 매복에 당해 버린 자신 또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었다.
“군사.”
담소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선 가후에게 장료 휘하의 무관이 다가왔다.
그에 가후가 입을 열었다.
“비장은 어떻게 됐죠?”
“상처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제가 듣기로는…, 마비산(麻痹散)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검흔을 꿰매신다고 합니다.”
여포는 마취약의 일종인 마비산을 복용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생살을 뚫고 꿰매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그만큼 치욕과 패배감이 컸던 걸까.
두 눈을 부릅뜬 채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은 상처투성이의 호랑이를 보는 듯했다.
“후우….”
가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러진 방천화극은 다시 복구할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병장기처럼 쉽게 복구할 수 없었다.
언제쯤 전선에 복귀할 수 있을까.
천하를 요동치게 만든 당대 최고의 맹장이 중상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동탁 군에게 있어 매우 뼈아픈 손실이었다.
“비장에게 가보도록 하죠.”
지금쯤 봉합이 모두 끝났겠지.
패배의 굴욕을 곱씹으면서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 여포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멀리 걷지 못한 채 멈춰 서게 되었다.
“군사, 남쪽에서 적의 증원군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증원군…. 남쪽이라면 형주 방면이군요.”
서영 휘하의 무관이 다가와 가후에게 급보를 전했다.
형주 방면의 증원군.
필시 관동 제후들과 내통하는 형주자사 왕예의 군세일 것이다.
여포가 건재했다면 병주군을 이끌고 형주에서 올라오고 있는 군세를 요격했을 것을.
형주에서 적의 증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가후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또 뭐죠?”
뒤이어 말할 게 남았는지 재차 입을 여는 무관의 모습에 가후가 물었다.
“낭중령께서 군사를 부르십니다.”
* * *
남양군을 출병한 군세가 양성(陽城)을 통과하여 사수관 인근에 군영을 세운 본대를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후장군 원술이 이끄는 군세였다.
배신과 모략으로 형주자사 왕예의 군세와 물자를 모두 빼앗은 원술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영천군의 군참들을 대부분 잃게 된 관동 제후군들에게 있어 형주에서 올라오고 있는 증원군은 천군만마와 같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후장군께서 군세를 이끌고 계십니다!”
원술이 보낸 전령의 소식을 듣게 된 지방관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양군 군세를 이끄는 총사는 원술.
여남원씨 가문의 멸문지화를 피해 낙양에서 도망쳤던 후장군 원술이 군세를 이끌고 있다.
배은망덕하고 후안무치하며, 염치라는 것을 모르는 놈이 형주 군세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었다.
“병참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물자가 부족하지 않소.”
“원공로는 동탁에게 일가친척들을 모두 잃었네. 적어도 우리를 배신하는 일은 없지 않겠나.”
장사태수 손견을 선봉장으로 삼은 후장군 원술의 군세가 오고 있다.
당장 물자가 급했던 지방관들은 후장군 원술의 참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놈을 내치는 것이 당연히 옳겠으나,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막대한 군량을 수송하여 오고 있는 원술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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