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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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제후들의 연합은 급하게 의기투합하여 모여든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떼를 지어 모인 까마귀들.
고함을 내지르면서 위압을 가하면 뿔뿔이 흩어지게 될 나약한 군중에 지나지 않았다.
엉성하게 규합된 오합지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뛰어난 군재를 가진 책략가였던 가후는 아군에게 완벽한 승리를 안겨 주고자 최선의 전술을 꺼내 들었다.
“군진을 모두 불태워라!”
“영천군의 병참을 무너뜨려야 한다! 서둘러라!!”
가후는 대담하게도 관동 제후들이 사수관을 경계하는 틈을 노려 영천군을 침공한다는 특단의 전술을 여포에게 진언했다.
한나라의 제일로 손꼽히는 신속한 기동력을 보유한 병주군이기에 가능한 전술이다.
병주군은 낙양과 예주의 경계에 위치한 숭산(嵩山)의 샛길을 은밀 기동하여 영천군을 급습했다.
“부, 불이다!”
“어서 불을 꺼라! 병참이 모두 타고 있지 않으냐!”
여남군이 시뻘건 불길에 잠겨 잿더미가 되었던 것처럼 영천군 또한 여포의 공격받아 불바다에 휩싸이게 되었다.
침략.
그리고 파괴.
만리장성 이북으로 진출하여 흉노족과 선비족, 오환족의 부락들을 불태우면서 철저히 파괴했던 병주군은 거점의 침략과 파괴에 특화되어 있었다.
“크학!”
병참을 수비하던 장수를 쓰러트린 여포가 방천화극을 치켜들면서 불바다에 잠긴 병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불에 타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에 잠긴 채,
강한 바람이 불 때마다 주홍빛의 불씨들이 흩어지면서 휘날렸다.
예주 지역의 지방관들이 관동 제후들을 지원하고자 긁어모은 물자들은 드넓은 벌판을 삽시간에 불태우는 화염에 둘러싸인 상태로 잿더미가 될 뿐이었다.
“소녀의 책략이 어떠신가요. 혹여라도 소녀의 책략에 일말의 엉성함이나 빈틈이 있는지요?”
능숙한 기마술로 말을 몰던 여인이 여포의 곁에 다가와 시커먼 속셈에 찬 미소를 흘렸다.
얼굴에는 환희가 넘쳐흘렀다.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환열.
더없이 책략가에 어울리는 냉정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두 팔을 크게 뻗었다.
그리고 환성을 내질렀다.
불바다에 잠겨 사라지는 관동 제후들의 희망을 만끽하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한껏 비웃었다.
“그냥 우연히 잘 맞아떨어진 거지.”
“후후,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그 솔직하지 못한 점이 바로 중랑장의 매력입니다만, 가끔은 소녀의 우수함을 칭찬해 줘도 괜찮다고요.”
음험한 교활함에 찬 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여포에게 애교를 떨었다.
그에 여포는 인상을 찡그렸다.
‘돼먹지 못한 여자이긴 해도… 머리 하나만큼은 진짜 비상하단 말이야.’
여포는 가후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를 꺼림칙하게 여겼지만,
분명 그녀의 책략에는 족집게로 찍은 것처럼 승리를 끌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일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졸들에게 명령을 내릴 뿐인 책략가를 몹시 혐오해온 여포였지만 결국, 그녀를 뛰어난 군재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포는 가후의 책략을 군말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누님! 도망치려던 놈들을 잡아왔습니다!”
위속이 시커먼 그을음을 발끝까지 뒤집어쓴 두 남성들을 끌고 왔다.
영천태수 이민. 예주종사 이연.
이민은 관동 제후들의 군세에 호응하기 위해 물자를 지원하던 지방관이었고, 이연은 뿔뿔이 흩어진 여남원씨 가문의 추종세력을 모으기 위해 예주에 파견되었던 원소의 부하였다.
이민과 이연, 관동 제후들의 끄나풀을 힐끗 쳐다본 가후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위속 교위.”
“예, 군사!”
“저들을 최대한 끔찍하게 죽이세요. 목을 치는 것은 너무 심심하니까… 팽형(烹刑). 그래요, 끓는 가마솥에 넣어서 죽이도록 하죠.”
붙잡은 포로들에게 팽형을 선고하는가후의 무자비한 명령에 위속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실로 잔인한 처형방식이 아닌가.
하지만 위속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후의 명령을 받들었다.
“알겠습니다, 군사.”
전쟁에서는 모든 행위들이 용인된다.
게다가 이들은 낙양의 중앙 정권에 맞서 반기를 든 관동 제후들을 돕던 끄나풀이 아닌가.
대역죄인들에게 팽형을 선고하는 것은 실로 당연했다.
“쳐 죽일 역적 놈들!”
“너희들은 결국 동중영, 그 역적 놈과 함께 하늘의 응벌을 받게 될 것이다!”
팽형을 선고받고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게 된 이민과 이연이 여포와 가후를 향해 분개에 찬 외침을 내질렀다.
그에 가후가 후후 웃음을 지었다.
“하늘 따위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진정 하늘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면…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는 일도, 잔혹한 난세가 펼쳐지는 일도 없었겠지요.”
천벌이니,
인과응보이니….
그런 것은 패배자들이 지껄이는 위안에 불과하다.
하늘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
그저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천하에 있을 뿐.
“중랑장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가후가 빙긋 웃으면서 물었다.
그에 여포는 대답하지 않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을 뿐.
자신을 긍정하는 듯한 여포의 모습에 가후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 * *
영천군이 비장 여포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듣게 된 관동 제후들은 사분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서 영천태수 이민을 구해야 한다.
안 된다.
사수관을 앞에 두고 군세를 돌릴 순 없다.
일단 말머리를 돌려 영천군을 지원해야 한다는 제후와 이미 늦었을 테니 일단 사수관으로 진군해야 한다는 제후들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게 되었다.
“그놈들이 병참을 다 태울 게 분명하오!”
“이미 늦었을 거요! 놈들이 삽시간에 여남군을 모두 불태우고 도주한 사실을 잊으셨소!”
적진을 앞에 두고 말머리를 돌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관중 지역의 지방관들은 대부분 책상머리에 앉아 탁상공론이나 읊어대던 샌님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영천태수 이민을 매몰차게 외면할 순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전쟁에서 정과 의리를 내세우는 지방관들의 안약한 모습에 흑발의 여인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빌어먹을 인사들 같으니. 천하의 패권을 결정하는 이 중차대한 전쟁에서 우정놀음을 논한단 말인가.’
그들의 어리석음에 염증을 느꼈다.
내뱉는 말들이 너무도 멍청하게 들려,
멍청한 인사들과 함께 군세를 이끄는 스스로에게 회한이 들 정도였다.
“여포의 옆에 뛰어난 책략가가 붙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만약 제가 그 책략가라면…, 분명 아군의 측면이나 후미를 노릴 겁니다.”
진류왕을 호위하던 중에 조조의 부름을 받고 군사회의에 급히 참여하게 된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여포를 보필하는 책략가는 가후,
삼국지 최고의 책략가가 누구인지를 거론할 때마다 항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다.
당대 제일의 책략가가 병주의 비장을 보필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가후는 영천군의 소식을 듣고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은 지방관들의 모습 또한 예측하고 있을 것이었다.
“영천군을 기습한 여포가 군세를 돌려 사수관으로 향하는 아군을 노릴 것이라는 말이군.”
이성휘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조조가 되물었다.
“사수관에 적을 둔 채 말머리를 돌려 영천군을 돕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하지만 영천군을 급습한 여포를 무시한 채 사수관을 향해진군하는 것 또한 자살행위일 겁니다.”
“사수관의 서영과 영천군의 여포가 앞뒤로 아군을 협공할 게 뻔하니 말일세.”
합리적인 추론이다.
실로 타당한 의견이었다.
사예주는 적들의 영역.
이미 아군은 적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진류군에서 출병하여 사예주의 경계를 넘어 사수관을 향하는 아군 군세는 서영의 군세는 물론, 사방을 모두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진류태수 장막이 물었다.
그에 이성휘가 대답했다.
“형양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잠시 돌려 관도현(館陶縣)으로 향하여 기주에서 내려오고 있는 군세와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북장군 원소와 그녀를 따르는 하북 지역의 지방관들과 합류해야 한다.
부족해진 물자를 보충할 겸,
여포를 피해 관도현에서 웅거하는 쪽이 군략을 짜기에도 수월할 것이었다.
장막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생 장초 또한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조조 또한 의견에 가세하자 다른 지방관들 또한 동의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이성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직감으로 무언가를 포착한 듯,
감각에 예민한 맹수를 상회할 정도의 단련된 본능을 가지고 있던 중원제일 검이 방안을 한 가지 꺼냈다.
* * *
이성휘의 예상대로 가후는 사수관으로 향하는 관동 제후들의 군세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이 영천군으로 말머리를 돌린다면 우회 기동하여 측면을 공격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사수관을 향한다면 후미를 들이칠 것이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묘수.
촘촘하게 만들어진 쇠그물을 던져 맹수를 잡는 것처럼 매우 철저하게 적들을 내모는 것이 바로 가후가 즐겨 사용하는 책략이었다.
“이런. 이건 예상외인데요.”
전장에 보낸 척후를 통해 소식을 접하게 된 가후는 적들의 이상행동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놈들은 사수관으로 향하지 않았다.
사수관이 있는 형양이 아닌 북쪽의 관도현으로 향했다.
분명 기주에서 내려오고 있는 정북장군 원소의 병력과 합류하기 위함일 터.
정면과 측면에 있는 적들을 따돌리고 북쪽에서 물자까지 보충할 수 있는 적절한결정이었다.
“놈들이 관도현으로 갔다면 그 뒤를 쫓아서 공격하면 되는 거 아냐?”
여포가 물었다.
그에 가후가 고개를 저었다.
“전투 도중에 정북장군 원소가 합류하게 된다면 크게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할 거예요. 영천군에서 크게 승리를 거둔 아군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음험하다는 것은 곧,
신중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없이 음험한 성정을 가진 가후는 사소한 계산에도 주판알을 굴리는 상인처럼 관동 제후들의 이상행동에 신중하게 반응했다.
“도위.”
“예, 군사.”
가후의 부름에 장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척후병을 이끌고 관도현으로 간 적들의 동태를 살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윽고 장료가 민첩한 기마술을 자랑하는 척후병들과 함께 관도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
가후가 여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설마 덜떨어진 제후들이 북쪽으로 빠져나갈 줄은 몰랐네요.”
“뭐…. 항상 맞추라는 법은 없으니까.”
사수관으로 향하는 제후들에게 절멸의 피해를 입혔다면 천하의 향방을 건 전쟁을 빠르게 종식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딱히 아쉽진 않았다.
예주에서 수송해온 물자들을 모두 불태운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전과가 아닌가.
적들은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관도현에서 물자를 충당한다고 한들,
막대한 양의 물자들을 잃은 제후들은 계속 군량부족 문제를 겪게 될 것이었다.
“일단 문원을 관도현에 보내긴 했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여포의 물음에 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관도현에 웅거하고 있을 적들을 한 번 견제 한 뒤에 형양을 가로질러 낙양으로 복귀하죠.”
속셈이 간파되었다는 것은 조금 쓰라리지만 그렇다고 하여 경계할 것은 없다.
이미 원하던 바는 얻었다.
영천태수와 예주종사를 살해했으며,
예주의 물자들을 모두 불태움으로서 관동 제후들의 군량을 끊어냈다.
실로 완벽한 승리가 아닌가. 낙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필시 큰 벼슬과 포상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조금 찝찝하네요. 관도현에서 적과 전면전을 벌이는 건 피하는 게 좋겠어요. 굳이 제후들과 싸워줄 이유도 없으니까.’
과육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사과를 크게 베어 물었는데 안에서 벌레를 발견한 것 같은 찝찝함을 느꼈다.
가후는 매우 신중하게 반응했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릴 순 없다.
적들로부터 호쾌한 승리를 거뒀으니 이에 만족하여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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