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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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황건적들이 폭거를 일삼았던 시기에 기도위 조조와 함께 전쟁터를 종군했던 유씨 황실의 방친(傍親)은 천하에 단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의 후예,
유비.
예주에서 의용대를 조련하면서 거병의 시기를 기다려온 유비는 만고의 역적을 처단하기 위해 관동 제후들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의 뜻을 밝혀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조공.”
정예병처럼 잘 훈련된 의병들과 함께 진류군에 도착한 장수는 청명한 용모를 가진 미녀였다.
풀밭 위를 깡충깡충 뛰는 토끼를 연상하게 하는 새하얀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렸으며, 거기에 정말 토끼처럼 뚜렷하게 빨간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제 자신도 토끼를 닮았음을 아는지,
머리 위에는 길쭉하게 솟은 토끼 귀를 연상하게 하는 머리띠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대가 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네.”
“조족지혈에 불과하나, 조공의 보탬이 되고자 예주의 의병들을 이끌고 참전하고 싶습니다.”
유비를 본 이성휘는 새하얀 설원에 몸을 웅크리면서 사는 토끼를 떠올렸다.
정말 그 유비란 말인가.
눈웃음을 칠 때마다 애굣살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짐짓 의심이 들었다.
늘씬하게 잘 빠진 골반 위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은 분명 쌍검술의 기재라고 불리는 유비라는 것을 입증하는 큰 특징이었지만 토끼처럼 앙증맞고 귀여운 용모 탓에 계속 의심을 들게 했다.
“그대가 가세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걸세.”
조조는 유비의 참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자기 휘하에 두는 것은 물론,
연합에 합류한 제후와 지방관들에 버금가는 대우를 약속하는 파격적인 제안했다.
유능한 인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조조답게 중원 전역을 떠돌면서 무명을 떨친 유비에게 호의를 보였다.
객장 신분에 지나지 않은 유비를 몸소 환대하는 모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중산정왕의 후예인 유비일세. 황건적 군세를 대대적으로 토벌할 당시에 나와 함께 전쟁터를 종군한 적 있지.”
조조가 이성휘에게 유비를 소개했다.
그에 이성휘는 예상치 못한 유비의 가세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유비를 향해 예를 취했다.
“어림총사 이성휘라고 합니다. 익히 무용담을 들어온 황실의 방친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 혹시! 어림총사라면… 그 유명한 중원제일 검이신가요!”
유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중원제일 검이다!
십상시의 괴수 장양의 목을 쳤으며,
중앙에서 벌어진 반란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진압한 바가 있는 인물이다.
낙양을 벌벌 떨게 하였던 비장 여포와 함께 무인의 정점으로 불리는 이성휘를 눈앞에서 보게 된 유비는 주먹을 불끈 쥔 두 손을 붕붕 흔들면서 동경을 담아낸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예, 그렇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악수를 부탁해도 될까요!”
오랫동안 동경해온 무인을 만나게 되었음에 유비는 온몸으로 기쁨을 발산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
환희와 환열에 찬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더없이 격앙된 상태였다.
대체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비의 격앙된 감정이 반응하듯 머리 위에 달린 토끼 귀가 움찔움찔 떨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성휘가 손을 뻗었다.
그에 새하얀 백발의 여성은 억만금의 가치를 가진 도자기를 영접하듯이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내의 투박한 손을 품었다.
푸후읏!
바위처럼 딱딱한 손등과 손바닥을 쓰다듬게 된 유비의 입술에서 부끄러움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좀 더 직접 감촉을 느끼고 싶었는지, 손끝으로 이성휘의 손등을 섬세하게 쓸어내리기까지 했다.
“현덕, 예주에서 데려온 군세는 어느 정도인가.”
전희에 흥분하는 여인처럼 뜨거운 숨결을 하악하악 뱉어내면서 이성휘의 손등을 쓰다듬던 백발의 여인을 아니꼽게 여긴 조조가 입을 열었다.
그에 유비는 섬세하게 쓰다듬던 이성휘의 손을 놓으면서 답했다.
“다 합쳐 8백 명입니다.”
“8백이라….”
도적 떼를 토벌하기 위해 조직한 유격대답게 병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유비는 뛰어난 군재를 갖춘 주장이었으며,
또한 관장지용(關張之勇)이라 불리면서 무명을 널리 떨치게 될 두 맹장이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 휘하에 있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조공!”
유비는 함께 전쟁터를 종군했던 조조를 의지한 덕분에 관동 제후들의 연합에 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유비의 의자매인 관우와 장비,
8백 명에 달하는 예주 출신의 의용대가 조조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의용대를 이끌고 진류군으로 온 유비의 모습에 의구심을 느낀 이성휘였지만,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대군벌을 도모하기 위해선 유비군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조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저어, 어림총사!”
조조 군의 객장 신분이 된 유비가 동경심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또 이성휘를 부르는 목소리에,
흑발의 여인은 매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토끼 귀를 쫑긋쫑긋 세우면서 이성휘에게 지대한 호감과 관심을 보이는 유비의 모습을 본 조조는 농작물을 갉아먹으면서 기아를 몰고 다니는 털 뭉치 역병을 떠올렸다.
“바깥에 제 의동생들이 있는데… 어림총사가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둘 다 엄청 기뻐할 거예요!”
유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의 열렬한 반응에 이성휘는 중원제일 검의 명성과 유명세를 절실히 실감하게 되었다.
훗날 삼국지의 한 축인 촉나라를 건국하게 될 군웅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정도였단 말인가. 자기 명성과 유명세가 무서워졌다.
“지금은 진류왕 전하를 호위하는 중입니다. 호의는 감사하오나 사사로운 이유로 자리를 이탈할 수는 없습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무례를 범해 버렸네요.”
방방 뛰면서 흥분에 찬 반응을 보이는 토끼의 모습을 심상치 않게 쳐다보는 조조의 맹렬한 시선을 보게 되었다.
토끼를 박멸하려는 눈이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가꾼 농작물들을 토끼떼의 습격으로 모두 잃게 된 농부처럼,
그녀의 눈에서 진심 어린 증오가 느껴졌다.
* * *
형주자사 왕예는 원술과 손견을 좌우에 두어 위세를 떨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대의 호걸이라 불리는 원술과 최강의 맹장이라고 불리는 손견을 수하로 둔다면 관동 제후들의 연합에서 정북장군 원소와 정동장군 조조에 밀리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형주자사 왕예를 죽여 남양군의 모든 병력과 물자들을 빼앗겠다!”
그러나 원술은 왕예 따위가 길들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욕망에 물든 미공자답게,
동탁에게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났음에도 천하의 정점에 서겠다는 야심은 그대로였다.
원술은 종제 원윤을 은밀하게 보내어 군세를 이끌고 남양군으로 오고 있는 손견군과 접촉하려 했다.
손견과 힘을 합쳐 왕예를 도모하려는 속셈이었다.
“주군, 허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무엇이 그리도 걱정이란 말이냐. 왕예는 우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여남원씨 가문의 멸문으로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원술은 굶주린 들개와도 같았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겠다.
기필코 사세삼공의 여남원씨 가문을 재흥시키리라.
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인두겁의 탈을 쓴 괴물이라는 멸시를 당하게 될지라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여남원씨 가문의 마지막 남은 적통이다. 내게는 대명문가를 다시 일으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단 말이다!”
비루한 도망자 신세였던 자신을 흔쾌히 받아 준 점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살벌한 난세였다.
비겁하고 더러운 권모술수가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시대다.
왕예 따위의 수하가 될 생각은 결코 없었던 원술은 그의 병력과 물자를 모두 빼앗은 뒤, 남양군에서 위풍당당하게 거병하여 관동 제후들의 연합에 합류하려 했다.
‘속 좋은 얼간이가 호의를 베푼 덕분에 병력을 자유롭게 남양군에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원술이 시커먼 야욕에 찬 야심가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왕예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남양군에 세력이 모이게 되었다.
여남원씨 가문을 추종하는 사대부와 호족들이 모인 인사들로, 여남원씨 가문의 유일한 적통인 원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뒤이어 종제 원윤이 장사태수 손견의 포섭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보내 왔다.
그에 원술은 거병을 도모했다.
“형주자사 왕예가 남양태수 장자를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연루에서 연회를 즐길 예정이라고 한다. 오늘 밤이 바로 하늘이 내린 적기다.”
원술은 황실 근위대와 함께 수백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왕예와 그 측근들이 있는 연루를 기습할 생각이었다.
왕예는 어리석게도 이 연회에 원술을 초대했다.
덕분에 원술은 연회가 열리는 장소를,
연회에 참여하는 인원들의 명단까지 입수할 수 있었다.
후안무치한 배신을 결행하게 된 원술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침을 뚝뚝 흘리는 굶주린 들개처럼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왕예와 그 측근들을 죽여라!!”
휘황찬란한 갑주를 입은 원술이 선두에서 결사대를 이끌었다.
굶주린 들개는 누구보다도 용맹했다.
수천에 달하는 왕예의 병력들이 남양군을 수비하고 있었음에도 원술은 말을 재촉하면서 거침없이 연루를 향해 달려갔다.
“왕예를 죽여라!”
“저기 왕예가 있다!!”
이윽고 결사대가 연루를 습격했다.
수비 병력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50여 명밖에 되지 않는 병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설마 대명문가의 적통인 원술에게 배신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한가롭게 연회를 즐기던 왕예와 측근들은 하극상을 결행한 원술을 보고는 대경실색하며 비명을 질렀다.
“후장군! 이게 대관절 무슨 만행이오?!”
“형주자사 어르신께서 그대에게 평생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베푸셨거늘 어찌 창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왕예의 측근들이 크게 꾸짖으면서 원술을 힐난했지만 연루를 습격한결사대는 망설임이 없었다.
창검을 휘두르면서 뛰어들었다.
뒤이어 연루에서 배은망덕한 만행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남양태수 장자가 칼날에 목숨을 잃었으며, 연회에 참가했던 다른 태수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네, 네 이놈! 이런 천인공노한 만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럽지 않느냐!! 네놈이 대체 동탁과 다를 게 무엇이더냐!!”
왕예가 온몸을 떨면서 원술을 향해 소리쳤다.
앞을 가로막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벤 원술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늘어뜨린 채로 왕예를 향해 걸어왔다.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이 난세에 외부인을 가벼이 믿은 형주자사 어르신의 잘못이 아니겠소? 내 검에 죽더라도 원망은 하지 마시오. 내 평생 자사 어르신을 여남원씨 가문의 은인으로 여길 터이니.”
“이, 이런 천벌 받을 놈…!!”
이윽고 말을 끝낸 원술은 검을 휘두르면서 왕예를 참살했다.
왕예와 측근들의 수급을 벤 뒤,
역신 동탁과 내통하여 형주를 갖다 바치려 했다는 죄목을 내세우면서 그 수급을 성문에 매달았다.
더러운 배신이 벌어졌음을 알고 분개한 남양군 병력들은 원술과 그 일파를 죽이기 위해 창검을 들었지만 원술과 내통하게 된 장사태수 손견이 군세를 이끌고 남양군을 기습하여 상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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