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예주로 출전한 비장(飛將) 여포가 예주자사 공주와 그 측근들의 수급을 베고 사예주로 개진했다는 승전보를 듣게 된 동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더러운 배신자를 죽였음은 물론,
그를 따르던 일파들까지 모두 제거하였으니 예주에 산재되어 있던 후환을 제거한 셈이었다.
단결하기 시작한 관동 제후들의 움직임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동탁에게 있어 여포의 승전은 후환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강한 오만과 자신감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으하하! 으하하핫!!”
동탁이 껄껄 웃음을 터트리면서 조정대신들에게 예주자사 공주의 수급을 보여 주었다.
이놈들도 이제 알게 되었으리라.
감히 서량의 군웅을 배신하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
“황실과 조정을 배신하고 관동의 역적들과 결탁했던 늙은이가 죽었소이다! 이 얼마나 감복스러운 승전이오?”
예주 세력의 멸망으로 기세등등해진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태위(太衛)로 승진했다.
전임을 강제로 면직시키고 사공(司空)에 임명된 지 불과 보름도 안 되어 더 높은 벼슬에 스스로 오른 것이었다.
여포의 승전을 통해 동탁의 교만이 더욱 깊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값진 승전을 거둬낸 중랑장 여포를 평동장군(平東將軍)에 임명하고, 또한 온후(溫侯)에 봉하겠다!”
동탁은 공을 세운 여포를 평동장군에 임명했다.
그는 곧,
예주자사 공주를 토벌한 여포를 관동 제후들을 평정함에 있어 선봉에 세우겠다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여포는 굴욕에 찬 침음을 삼키면서 동탁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그 모습이 실로 듬직했는지,
동탁은 항장 출신인 여포를 내세워 자기 권위를 내세웠다.
사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낙양을 뒤흔들었던 비장 여포의 위용과 용력은 가히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할 정도였기에, 동탁은 중상을 입은 화웅을 대신하여 여포에게 근위를 맡겼다.
이번 승전보로 인해 여포를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된 듯했다.
“폐하, 평동장군이 예주의 역적을 참하셨사옵니다!”
동탁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유변을 향해 승전보를 알렸다.
그에 유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 수고 많았소….”
옥좌에 앉은 유약한 황제는 전횡과 폭정을 일삼는 서량의 권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놈은 괴물이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도살자.
그래서 동탁이 궁중의 여인들을 강제로 범하고 황실 종친들의 능묘를 파헤치는 등의 악행들을 일삼고 있었음에도, 동탁이 등에 업은 위세가 무서웠기에 눈뜬장님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 동중영이 있는 한, 관동의 역적들은 결단코 사수관(汜水關)을 넘지 못할 것이옵니다! 황실과 조정에 충성하는 중용무쌍한 군대가 있사 온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대전의 중심에 선 동탁은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겁박하듯 자기 군대를 자랑했다.
밖으로 나가 병력을 확인할 것도 없이, 허리에 검을 찬 채 각비전(卻非殿)을 호위하는 근위대만 하더라도 모두 동탁의 수족들이었다.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거머쥔 동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궁중을 장악하는 것으로, 황실에 충성하던 근위대를 모두 변방으로 내쫓아버리고 자기 근거지인 옹주와 양주 출신의 무관들로 근위대를 편성했다.
“폐하, 일 전에 제가 간하였던 상소에 대해 심고하여 보셨사옵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소.”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연 동탁의 말에 유변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신분이 미천한 황후 당씨를 폐하고 소신의 손녀딸인 동양군(渭陽君)을 새 황후로 삼을 것을 폐하께 주청하지 않았습니까.”
욕망에 결코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듯,
동탁은 황후 당씨를 폐하고 손녀딸인 동양군 동백을 새 황후로 삼아줄 것을 요구했다.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동탁은 황제의 악부(岳父)가 되겠다는 야심을, 유씨 황실에 동씨 일족의 피를 더하겠다는 시커먼 욕망까지 내비쳤다.
“동중영, 이 더러운 역적 놈아!!”
“어찌 신하가 감히 황후를 참소한단 말이냐!”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던 조정대신들이 동탁을 향해 거침없이 욕설을 토해냈다.
그에 동탁이 손짓 했다.
좌우에 도열한 근위대가 다가와 고함을 내지르면서 항변하는 조정대신들을 각비전에서 끌고 나갔다.
“으아악!!”
“역적 놈! 이 역적 놈들아!!”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끌고 나가자마자 목을 쳤는지,
불투명한 색의 장지문에 시뻘건 핏물이 뿌려졌다.
동탁의 폭정이 날이 갈수록 끔찍함을 더해 가고 있었으며, 급기야 동탁은 황후를 폐하고 자기 손녀딸을 새 황후로 책봉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황실과 조정을 향한 내 충정을 헤아리지도 못 하는 무지렁뱅이들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소, 사도?”
두툼한 배를 두드리면서 불편한 듯 콧방귀를 낀 동탁은 자기 안배로 하남윤에서 사도로 승진하게 된 왕윤을 향해 물었다.
그 물음에 왕윤이 공손하게 예를 취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도처에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 역적들에게 위협을 받는 황실을 더욱 견고하게 지키려는 태위 어르신의 포석이 아닐는지요.”
“그하하핫! 내 본심을 알아주는 사람은 역시 사도 밖에 없소!”
자신을 치켜세우는 왕윤의 말에 동탁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부와 권력을 탐할 뿐인 교만한 권신.
동탁에 의해 사도에 임명된 왕윤과 평동장군에 임명된 여포는 오만과 탐욕을 휘두르는 권신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 * *
발해군을 떠난 순욱이 황하를 건너 동군에 왔을 때는 관동 전역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걸 위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것을 기회라고 해야 할까.
둔부까지 늘어뜨린 상아색 머리카락을 녹색 머리끈으로 단정하게 정리한 미녀는 흑발의 여인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취하면서 간언했다.
“용맹한 제장들을 앞세워 역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시는 한편, 연주와 예주 출신의 현인들을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면 중원을 크게 아우르는 세력으로 거듭나실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명사와 현인들을 아우르는 세력이 되어야만 어지러운 난세를 평정할 수 있는 법이다.
순욱은 인재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자신에게 인재 등용을 일임해준다면 억만금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명사들을 불러 모으겠다는 강한 확신을 내비쳤다.
“허나 무능한 황실과 부패한 조정에 실망한 명사들은 두문불출하며 속세로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계속 사람을 보내어 설득하였으나 모두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지.”
“주군과 어림총사께서 한낱 서생에 불과한 소녀에게 과분한 기대와 신뢰를 주신 것처럼 천하의 명사와 현인들이 정동장군을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초야에 묻혀 야인이 되기를 결심한 명사들을 다시 속세로 불러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명사들은 속세에 회한과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난세를 끝장낼 수 있을 리 없다.
무능한 황실과 부패한 조정은 결국 역적들에게 집어삼켜져 멸망하게 될 운명이다.
땅에 떨어진 법도와 이치에 절망하여 속세를 떠나버린 이들을 다시 일으키는 방법은 희망뿐이다.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기대와 신뢰를 그들 스스로가 가슴속에 품도록 만들어야 했다.
“흠.”
자기 물음에 거침없이 답변하는 달변가의 모습을 본 조조는 침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눈앞의 이 여자는 과연 대단한 인재다.
게다가 순욱은 예주의 명망 높은 영천순씨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예주로 진출하여 명사와 현인들을 휘하에 끌어들이려는 조조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과묵한 입담을 가진 부관이 장량과 소하에 필적할 인재라며 몸소 추천할 만하군.’
그렇게 순욱을 높게 평가한 조조는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직접 찾아왔음에 기뻐하는 한편, 내심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뾰족한 질의를 던졌다.
“문약, 그대는 참으로 기쁘겠군. 천하에 무명을 떨치는 중원제일 검이 성심성의를 다해 그대를 추천했으니 말일세.”
질투에 빈정대는 듯한,
사랑하는 남성이 아름다운 미녀를 데려왔음에 짐짓 까칠하게 보이는 반응을 보였다.
유능한 인재들을 누구보다 높게 평가하는 그녀였지만 질투에 물든 마음은 어쩔 수 없었는지 퉁명한목소리로 작게 불만을 드러냈다.
그에 순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림총사께서는 진심으로 주군을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돈구현에서 사흘 동안 기다리는 노력을 기울이신 것 아니겠습니까.”
“흠…. 물론 그렇겠지.”
다소 아부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조조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기뻐했다.
조조의 반응은 매우 옅었지만,
지혜로운 현인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자신을 위해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인 이성휘에게 고마움을 느꼈는지, 바닥을 응시하던 여인의 붉은 눈동자에서 행복감에 서린 감정이 느껴졌다.
“그대에게 부군사를 맡기겠다. 역적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게 된다면 호위장군을 도와 연주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조조는 제장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출정하게 된다면 사촌인 호위장군 조홍을 연주성에 남길 생각이었다.
조홍이라면 연주를 맡길 수 있다.
충성심이 대단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숙장이니.
하지만 다소 내정과 책략에 어두웠기에 조조는 부군사로 임명한 순욱으로 하여금 조홍의 부실한 점을 보완하려 했다.
* * *
예주자사 공주와 측근들을 비참하게 살해한 동탁 군의 만행에 맞서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세력은 조조군이었다.
1만 5천의 병력이 움직였다.
거병 당시의 병력을 포함하여,
연주에서 새롭게 징집한 장졸들까지 규합한 병력이었다.
연주를 제패한 패자의 위용과 기염을 토해내는 것처럼 깃발을 든 기병과 창검을 세운 보병들이 진군하면서 드넓은 벌판을 가득 메웠다.
“전군, 이동하라!”
선봉장을 맡은 여봉교위 조인이 장졸들을 매우 엄격하게 단속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절충교위 하후돈과 기도위 하후연이 군대를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본군 역할을 하는 후군(後軍)은 정동장군 조조와 어림총사 이성휘가 맡았다.
3천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가 조조와 함께 나란히 말을 몰면서 한나라 지방관으로서의 위엄과 면모를 보였다.
“부군사가 내게 말했네. 이번 전쟁에서 기대와 신망을 보여야만 재야에 숨은 천하의 명사와 현인들을 속세로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일세.”
관동 제후들의 연합에 합류하기 전에 조조는 연주 병력을 모두 소집한 뒤 군사훈련을 단행했다.
연주의 전력을 두 눈으로 보고,
전쟁에서 보일 활약을 미리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1만 5천, 유대와 교모의 병력까지 합친 1만 8천의 병력은 호탕한 기개를 자랑하면서 힘껏 저력을 뽐내고 있었다.
“천하 만민이 이 전쟁을 지켜볼 겁니다. 재야에 묻힌 명사와 현인들도 분명… 전쟁의 승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겠지요.”
“물론일세. 황실과 조정에 크게 실망하여 낙향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의지와 협기를 가슴속에 품고 있을 터이니 말이네.”
이성휘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신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
분명히 이성휘의 말처럼 천하 만인이 이 전쟁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관중의 제후들과 관서와 관중을 틀어진 역적. 천하를 양분하는 두 세력들의 격돌로 인해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