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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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태수 음수에게 천거되어 조정에 출사한 순욱은 수궁령(守宮令)에 임명되어 많은 명성을 쌓았으나, 부패한 조정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인 영천군(穎川郡)에 내려온 뒤,
정북장군 원소를 섬기게 된 오빠 순심을 따라 발해군으로 향한 순욱은 결국 정동장군 조조를 섬기기로 결심하면서 동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아가씨, 대체 저 궤짝 안에 든 게 뭡니까? 무거워서 속도가 안 납니다.”
“정동장군께 드릴 선물입니다.”
“선물… 말입니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연 순욱의 대답에 노복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청렴하기로 유명한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가 정동장군 조조에게 진상할 뇌물을 마련했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무엇이 궤짝에 들어 있기에 이렇게 무게가 나간단 말인가.
“아가씨, 이제 곧 동군에 들어설 것 같습니다.”
“예상한 시일보다 훨씬 빠르네요.”
순욱의 말에 노복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문약 아가씨께서 마침내 대의를 품으셨는데, 아가씨를 모시는 노복인 제가 어찌 굼뜨게 수레를 몰 수 있겠습니까! 설령 아가씨의 목적지가 교주(交州)나 익주(益州)라고 할지라도 단 걸음에 가야지요!”
드디어 아가씨께서 가슴속에 대의를 품으셨다.
계속 천하를 관망하던 아가씨가.
보필할 주군을 찾지 못한 채 학문을 갈고 닦을 뿐이었던 아가씨께서.
그에 영천순씨 가문의 노복은 크게 기뻐하면서 수레를 끌던 말을 쉴 새 없이 재촉했다.
“고마워요.”
노복의 열성 넘치는 모습에 상아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선녀처럼 청아한 미소를 살포시 지으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속도를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자칫 후열이 낙오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는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나 봅니다.”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고 있는 수레들을 본 노복이 웃음을 터트렸다.
수레들은 총 다섯 대.
영천순씨 가문의 노복과 사병들이 물건을 차곡차곡 실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대의를 품은 아가씨를 위해 일정을 서두르려는 마음은 모두 한결 같았는지, 선두에 선 마차가 계속해서 속도를 높이고 있었음에도 모든 마차들이 군말없이 따라왔다.
“감사합니다. 이 순문약, 여러분들의 노고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위해 분발하는 노복과 사병들의 모습에 순욱은 감읍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기뻤다.
자신을 위해 성심성의를 모으는 그들의 노력과 노고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가씨!”
만인의 헌신에 따스함을 느끼던 순욱을 향해, 마부석에 앉아 말을 재촉하던 마부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다급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노복의 외침에 고개를 든 순욱은 창검을 든 장졸들이 마중을 나온 것처럼 좌우로 도열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동장군 조조…. 분명 저 군세는 조조군입니다.’
저 깃발.
조조군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올 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발해군의 오라버니께서 먼저 파발을 띄워 정동장군 조조에게 소식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일정을 크게 서둘러서 동군에 일찍 도착할 것까지 예상했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범, 앞에서 멈추세요.”
“알겠습니다.”
선두에서 맹렬하게 달리던 마차가 이윽고 장졸들의 앞에 멈추게 되었다.
불어든 바람 때문에 부스스해진 상아색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다듬은 순욱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에 늘씬한 다리를 뻗으면서 올라탄 수레에서 내렸다.
“먼 길을 오셨습니다, 소저.”
굳세고 다부진 인상의 남성이 정중하게 예를 취하면서 손님을 맞이했다.
귀중한 빈객을 마중하듯,
좌우에 도열한 장졸들 역시 정중하게 예를 취하면서 순욱을 환대하였다.
이렇게까지 환대를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순욱은 의아함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중한 환대를 받았음에도 멍청하게 멀뚱멀뚱 서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순욱 또한 예를 취하면서 정중하게 환대에 감사를 보냈다.
“정중한 환영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영천순씨 가문의 여식인 순욱이라고 합니다.”
“어림총사 이성휘입니다.”
“호, 혹시 중원제일 검…!”
남성의 신분을 알게 된 순욱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놀라움을 토해냈다.
영천군의 명사로서 명성을 크게 떨친 순욱이었지만 중원제일 검이라 불리는 이성휘에 비하면 한낱 반딧불에 지나지 않았다.
설마 자신을 환대하기 위해,
13주 전역에 위대한 무명을 떨친 중원제일 검이 나설 줄은 몰랐기에 순욱은 물론 마부석에 앉아 있던 노복 또한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중원제일 검이란 말인가!”
“설마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허리에 검을 찬 사병들은 경외에 찬 모습을, 노복들은 정동장군 조조가 중원제일 검을 보낼 정도로 아가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에 당혹감 섞인 기쁨을 느꼈다.
“어림총사,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여쭤보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이성휘의 허락에 순욱은 긴장감이 담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재차 열었다.
“저희들이 어떻게 빨리 올 줄 알고 미리 나와 계셨던 건가요?”
그 물음에 이성휘가 답했다.
“사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 사흘씩이나요?!”
돈구현(頓丘縣)에서 사흘 동안 계속 기다렸다는 말에 순욱은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환대를 받아도 되는 걸까.
기대와 기망이 너무도 무거워,
무거운 중압감에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몸소 환대를 나온 인물은 중원제일 검이 아닌가. 겨우 자신 따위가 이렇게 무거운 환대를 받아도 되는 건지 불안감이 절로 들 정도였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미인이군. 인상이 초선하고 좀 비슷한가.’
하늘하늘한 산뜻함의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
감히 낙양제일미와 비교를 할 정도로,
상아색 머리카락을 둔부까지 늘어뜨린 순욱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새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아담한 가슴과 늘씬한 허리.
옷소매 속에 폭 숨은 두 손과 온화함과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유순한 눈매.
자애로움의 상징인 수국화처럼 순결한 아름다움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여독이 깊으실 터이니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네.”
지극정성인 환대에 황송함을 느낀 순욱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무심코 짧은 단답을 하고 말았다.
혹시라도 무례하게 비춰지진 않을까,
그것을 우려한 순욱은 이성휘를 향해 급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읏!”
장시간 수레를 탔기 때문일까.
그만 다리를 헛딛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된 상아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괜찮으십니까.”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녀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이성휘였다.
섬섬옥수 같은 가느다란 손을 맞잡으며,
민들레처럼 가벼운 그녀의 몸을 품에 안은 채로 지탱했다.
얼떨결에 사내의 품에 안기게 된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 그 광경을 본 사병과 노복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춘 채 시선을 고정했다. 입을 쩍 벌리면서 눈을 크게 뜬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 * *
비장(飛將) 여포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예주자사 공주를 참살하고 여남군을 모두 불살랐다는 급보가 전해지면서 관동 지역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
동탁이 먼저 움직였다.
서량에서 온 그 역적 놈이,
필시 연합을 맺으려는 관동 제후들을 경계하여 일을 벌인 것이리라.
명망 높은 대학인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에 천하의 명사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고, 예주자사 공주와 뜻을 함께하던 지방관들은 동탁을 더욱 적대하게 되었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야 하오! 필시 동탁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을 거요!”
“관동에 의기(義氣)를 모으는 일은 부디 우리에게 맡겨 주시오! 목숨을 바쳐 연합을 이뤄내겠소이다!”
급보를 듣게 된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가 쏜살 같이 연주성으로 달려와 정동장군 조조를 설득했다.
거병의 명분과 정당성을 알리는 한편,
연주성에서 거병을 선언한다면 관동 지역에서 정의로운 군대들이 속속히 집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뭔가 이상하군…. 천하에 널리 명망을 떨친 예주자사 공주를 참살하면 도리어 관동 제후들이 크게 격앙하어 동맹을 맺으려 들 터인데.’
예주자사 공주는 무략에 미숙하고, 담력 또한 매우 부족한 백면서생이다.
공주를 먼저 치는 것은 실로 당연했다.
다수의 적들을 두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상대적으로 약한 적을 쳐야 한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데도 조조는 의구심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천하의 향방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를 일부러 유도하려는 듯한 행동이다. 관동 제후들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동탁의 속셈인가? 아니면 동탁 휘하에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의구심을 계속 빚어내던 흑발의 여인은 이내 그 마음을 떨쳐 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이치를 따질 때가 아니다.
전쟁을 부르짖는 전운에 편승하여,
관동 전역을 울리기 시작한 대의를 움켜쥘 때였다.
유대와 교모의 절박한 호소에도 계속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던 조조였으나, 예주자사 공주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면서 전운이 뜨겁게 고조되고 있었기에 더 이상 결단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연주자사. 동군태수.”
짙게 느껴지기 시작한 전의와 호승심을 곱씹은 조조가 입을 열면서 유대와 교모를 불렀다.
그에 조조가 결단을 내렸음을 간파한 유대와 교모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휘하의 모든 제장들을 연주성에 소집하여 나의 결의와 결단을 알릴 것일세.”
흑발의 여인은 그간의 심사숙고 끝에 드디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며 유대와 교모를 자극시켰다.
결단의 칼날을 뽑아 든 것처럼 결연한 모습을 보이는 조조의 행동에, 유대와 교모는 분골쇄신하여 보좌하겠노라며 분기를 토해냈다.
“명부, 연주의 모든 군현들에 소집령을 하달하겠습니다.”
옆을 지키던 진궁이 입을 열어 조조에게 허락을 구했다.
마치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듯,
진궁은 밖에서 대기하는 모든 전령들을 각 군현으로 떠날 것을 명령했다.
“드디어 웅거할 때가 왔군. 그렇지 않은가, 군사.”
유대와 교모를 보낸 뒤,
단둘이 남게 되자 조조가 진궁을 향해 말했다.
진궁이 입을 열었다.
“실로 현명하신 용단이십니다.”
호기가 도래하였으니 이제 해야 할 것은 결단의 칼을 뽑는 것이다.
신중한 것과 우유부단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
그를 판가름하는 것은 전운을 담은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음을 직감할 수 있느냐 없는냐였다.
조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전운을 담은 바람을 이용하여 거병의 명분으로 삼는 교활한 노련함을 보여 주었다.
“주군, 어림총사께서 손님과 함께 도착하셨습니다.”
결단을 내리기 무섭게 빈객을 맞이하기 위해 돈구현으로 떠났던 이성휘가 돌아왔다.
‘분명 귀관은 내게 장량과 소하에 필적하는 인재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었지.’
허저가 충장의 대명사인 번쾌라면,
영천순씨 가문의 인재는 천하통일을 이룩한 명신의 대명사인 장량과 소하에 필적한다.
그렇게 확신을 담아 말했던 이성휘의 모습을 떠올린 조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대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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