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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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는 동탁으로부터 투항에 대한 포상으로 중랑장의 벼슬을 하사받고 도정후에 봉해졌으며, 또한 우수한 한혈마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준마인 적토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포는 적토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양부를 배신하고 살해했던 자신을 향한 모멸감 때문이었는지, 여포는 붉은 갈기와 높은 체고를 자랑하는 용마를 마구간에 둘 뿐이었다.
“봉선 님, 천하제일의 용마를 계속 비좁은 마구간에 두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요.”
장료가 말했다.
좁은 마구간에서 답답함을 토로하는 울음소리는 내는 적토마에게 연민을 느낀 것일까. 장료는 마당에서 방천화극을 휘두르면서 단련에 매진하던 여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다칠 뿐이야. 동탁 군 장수들도 저 준마를 길들이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휘두르던 방천화극을 멈춰 세운 여포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적토마는 실로 오만하고 난폭한 기질을 가진 준마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장사들이 적토마를 길들이려 하였으나, 길길이 날뛰는 적토마의 난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말에서 떨어진 인원들 중 대다수가 적토마의 말발굽에 짓밟히거나 걷어차이게 되면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저는 괜찮은데요? 아하핫, 간지러워요.”
장료가 손을 뻗자 붉은 갈기의 용마가 혀를 내밀면서 새하얀 손등을 정성스럽게 핥았다.
난폭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온순한 초식동물로 보일 뿐이었다.
초패왕(楚覇王) 항우의 애마였던 오추마(烏騅馬)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흉포한 기질을 자랑했지만, 여포와 장료에게만큼은 양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문원이 적토마를 타고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든가.”
“네, 알겠습니다.”
여포도 내심 적토마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는지, 장료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봉선 님.”
청초한 용모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흑발의 여인이 마구간에서 적토마를 다독이고 있을 때, 앞뜰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노복이 여포에게 다가왔다.
“봉선 님, 토로교위(討虜校尉)께서 오셨습니다.”
“누구…? 나는 그런 놈을 모르는데.”
여포가 의아함에 찬 반응을 보였다.
분명 동탁을 따르는 놈일 텐데.
그런 놈이 왜 나를 굳이 만나러 왔지?
여러 의문들이 든 여포였지만, 손님으로 온 사람을 다짜고짜 내쫓을 순 없었으므로 노복에게 손님맞이를 일렀다.
“초면에 처음 뵙겠어요, 중랑장.”
대문으로 나선 노복이 데려온 손님은 타다 남은 재를 연상하듯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음란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치녀 같은 옷차림을 한 채로 여포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사특함에 젖은 금색 눈동자.
본의를 알 수 없는 묘연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교활한 뱀처럼 고혹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을 본 여포는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토로교위를 맡은 가후라고 해요.”
“그런 분께서 나는 어쩐 일로 찾아오셨대?”
이 여자는 위험하다.
맹독을 품은 독사처럼,
방심하는 순간 독니를 드러낼 것이다.
그를 직감한 여포는 가시를 곤두세우면서 가후라고 이름을 밝힌 여인을 경계했다.
“사공 어르신께옵서 중랑장께 출진을 명하시지 않으셨나요. 소녀가 중랑장을 보필하게 되었기에, 미리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예요.”
“내 보필을?”
이 여자는 백파적의 두령들과 은밀히 내통하여 병주군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려 했다.
만약 양부를 참살하지 않았다면.
양부와 함께 하동군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면.
필시 이 여자의 명령에 따라 나루터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군사들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동탁에게 투항한 뒤에 진실을 알게 된 여포는 병주의 모든 장졸들이 이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 꺼져. 너 같은 년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으니까.”
“저를 들이신 것은 중랑장이세요.”
“그러니까 축객을 명령하는 것도 내 마음이지.”
모멸감에 찬 여포의 시선에 가후는 흡족함을 머금은 미소를 지으면서 선홍빛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적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던 여포의 맹렬한 시선을 받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가후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사공 어르신께서 내린 재화들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들었어요. 어찌하여 그런 아까운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그거야 당연히 내 마음이지.”
“아, 잠시 결례를 범했네요. 말을 잘못 전해드렸어요. 어찌하여 중랑장께서는 그런 우둔한결정을 내리셨는지… 그것을 여쭤보려 했는데요.”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가후의 물음에 여포가 날카로운 살의를 발산했다.
당장에라도 목을 칠 것 같은,
상대를 단칼에 죽이겠다는 살의가 흘러넘쳤다.
그런데도 가후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촥 펼쳤다.
“중랑장께서 하사품을 모두 돌려보냄으로서 도리어 사공 어르신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어요. 탐욕과 욕심을 부정하는 행동은 도리어 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기 때문이죠.”
만약 여포가 재물을 밝히는 탐욕스러운 성정을 흉내 냈다면 동탁은 크게 안심했을 것이다.
저년은 재물을 밝히는 성정이니,
앞으로도 섭섭지 않게 금은보화를 한가득 안겨 준다면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동탁을 안심시켰다면 병주 출신의 부하들이 인질로 잡히는 일도, 부하들의 가솔들이 인질로 잡히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리라.
“중랑장은 처세술이 다소 부족하세요.”
“그래서 처세술이 대단하신 년께서 직접 우둔한 년한테 그걸 지적하려고 오셨어?”
“물론 아니죠.”
여포의 살의에 찬 물음에 가후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중랑장의 편이예요.”
“뭐…?”
“중랑장의 과감한 행보와 결단에서 큰 호감이 생겼다고 할까요. 사실 중랑장이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독사처럼 사특한 년으로부터 호감이 생겼다는 고백을 받게 된 여포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 년이 무슨 수작이지.
나를 기만하려고 혓바닥을 놀리는 게 분명한데.
선뜻 호의를 표시하는가후의 모습에 여포는 경계심을 품었지만, 변방 출신의 무인인 그녀가 뱀의 교활함과 속내를 알 수 없는 복지부동함을 보이는 요녀의 속내를 꿰뚫는 것을 결코 불가능했다.
“중랑장은 이번 출진에서 반드시 사공 어르신의 신뢰를 얻어야 해요. 방금 대문을 나섰던 어르신께 받은 명마를 타고 전장에 출진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병주의 비장.
가후는 단기필마로 낙양 방어선을 무너뜨렸던 여포의 용력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맹장이다.
병마를 이끌고 전투를 주도하는 능력만큼은 중원제일 검을 크게 능가할 정도였다.
낙양 전선에서 여포가 부하들과 함께 날뛰던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가후는 무(武)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용력과 용맹에 큰 기대감을 보냈다.
* * *
조조는 이성휘와 함께 무관들을 이끌면서 연주 지역의 인재들을 포섭했다.
훗날 오자양장(五子良將)으로 명성을 떨치게 될 악진을 등용하여 함진도위로 삼았으며, 승씨현(乘氏縣)의 종사였던 이건과 그의 조카인 이전을 중용하였다.
인재 등용이 점진적으로 착수될 때마다 연주를 제패한 조조 군은 더욱 부강해졌다.
“패국에 뛰어난 장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장이 무려 8척에 달하며, 뒷걸음치는 황소를 두 손으로 질질 끌 정도로 용력 또한 대단하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기대되는 인재로군.”
이성휘의 설명에 조조가 후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이 자자한 인재들을 직접 등용하기 위하여 몸소 나선 조조는 이성휘와 나란히 말을 몰면서 오순도순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연인끼리 나들이를 나온 것 같았기에,
따스한 봄바람을 맞이하고 있던 조조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르고 머물러 있었다.
“귀관과 함께 바깥나들이를 하니 좋군. 하늘이 청명하고 봄바람이 따스하니, 기분 또한 봄바람처럼 들뜨는 것만 같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봄바람을 맞이하면서 비자림 아래를 걷는 두 남녀의 모습은 실로 애틋하고 다정해 보였다.
뒤를 따르던 무관들도 느꼈는지,
큼큼하고 헛기침하면서 둘 사이를 응원했다.
‘대체 언제 고백하시는 거지?’
‘그렇게 고백이 쉬웠으면 주군께서 무려 2년 동안이나 전전긍긍하였겠나.’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당사자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실로 안타까웠다.
고백을 하기에는 용기가 없어,
서로의 진의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채 맴도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놈들! 너희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군사들이냐!!”
조조와 이성휘가 이끄는 군세가 패국의 한 고을에 이르렀을 때, 사자후 같은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리면서 거구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퍼런 언월도를 치켜든 채,
족히 100여 명이 넘을 것 같은 인원들과 함께 군세의 앞을 막아섰다.
경고의 의미가 담긴 외침과 함께 앞을 막아선 장사들의 등장에 조조와 이성휘를 뒤따르던 무관들이 검을 뽑으면서 경계했다.
“감히 시골의 무부 따위가…!”
“한낱 무부 주제에 연주를 제패하신 정동장군을 향해 위압을 가한단 말인가!”
창검을 든 무관들의 으름장에도 태산 같은 몸집을 자랑하는 거인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적잖게 놀라기는 했는지,
연주 지역을 모두 제패한 정동장군 조조의 행차라는 것을 듣게 된 거인은 부하들에게 창검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내 까막눈인 터라 정동장군 어르신의 행차라는 것을 알지 못했소. 나는 또 고을을 습격하러 온 군사들인 줄 알았지 뭐요.”
험상궂은 인상의 거인이 조조와 이성휘에게 무례를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패국의 허중강인가.”
“이 허저를… 아시오?”
“정동장군께서는 용력이 뛰어난 그대를 등용하시고자 직접 오신 것이다.”
“나를 등용하기 위해, 그러니까 나를 휘하에 두고자 먼 길을 왔단 말이오?”
수십만 명에 달하는 황건적과 흑산적을 모두 격파하고 연주 지역을 구원한 정동장군 조조가 자신을 등용하기 위해 직접 행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저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무척이나 황공하오나 이 허중강은 힘과 기개가 대단한 군웅을 섬기기로 하였소! 나를 쓰러트릴 정도의 용력이 있는 장수가 군문에 있다면 뜻대로 정동장군을 섬기도록 하리다!”
호기로운 용맹을 떨치면서 씩씩한 기상을 발산하는 허저의 모습에 조조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는,
허저가 호탕하게 꺼낸 조건 때문이었다.
“귀관, 저 거구의 장사를 쓰러트리게.”
“알겠습니다.”
조조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이성휘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허저는 코웃음을 치면서 육중한 언월도를 번쩍 들어 이성휘를 향해 겨눴다.
“크흐흐! 그대의 이름은 뭐요? 꽤 잘 싸우게 생겼소만. 이 대장부 허저, 합을 나누기 전에 이름을 듣고 싶소.”
“어림총사 이성휘다.”
“뭐, 뭐라고…! 서, 설마 중원제일 검!!”
이성휘가 이름을 밝히자 담대하고 용맹한 성정으로 유명한 허저가 대경실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원제일 검 이성휘.
연주의 황건적들을 무자비하게 벤 뒤,
살아 있는 사람의 뱃속에서 쓸개를 끄집어내어 술안주로 잘근잘근 씹었다는 귀신이 아닌가.
30만 명에 달하는 황건적들을 상대로 온몸이 피 칠갑이 될 때까지 혈겁을 벌였다는 풍문은 우는 어린아이조차 뚝 그치게 만들 정도였다.
“역시 우리 허협이시오!”
“야차보다 무섭다는 중원제일 검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용맹하게 대적하려 하시다니….”
허저를 따르는 무리가 호쾌하게 나선 장사를 향해 소리쳤다.
존경과 경외심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천하 무쌍에 필적할 중원제일 검을 향해 언월도를 겨눈 허저의 용맹에 찬사를 보냈다.
“어, 음….”
패국의 대장부가 두려움에 찬 침음을 흘렸다.
끓는 가마솥을 앞둔 사냥개처럼,
오금이 저렸는지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사예주에서 날고 긴다는 칼잡이들이 모두 저 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나 우리 허협은 두려움을 모르시오!”
“맨손으로 척추를 젓가락처럼 부러뜨린 괴물이 적수라고 할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 이외다.”
허저를 따르는 무리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중원제일 검과 대등하게 싸울 것이라며,
용호상박의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 큰 기대감을 보였다.
무리들로부터 신뢰와 기대한 몸에 받게 된 허저는 고개를 무섭게 끄덕이면서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주, 주군!!”
중원제일 검이 휘두르는 칼날에 자기 머리와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뒤에 푸줏간에 팔려 가고, 뱃속의 쓸개가 중원제일 검의 술안주로 오르게 될 것을 두려워한 허저는 순순히 복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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