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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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류군으로 떠난 이성휘가 돌아오자 조조는 그리움에 찬 감정을 해소하려는 듯,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도 이성휘와 손을 맞잡았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
뺨이 파르르 떨리면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을 손아귀에 쥔 흑발의 여인은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기쁨의 감정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진류군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귀관.”
조조가 물었다.
물론 손은 여전히 맞잡은 채였다.
“권력을 탐하려는 수많은 승냥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이성휘는 자신이 진류군에서 보았던 것들을 매우 상세하게 전했다.
“재야의 명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이 가택 주변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신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한 현 황제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관동의 황제로 옹립해야 한다는 여론을 부추기는 듯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썩은 과일에 벌레들이 꼬이는 법이 아닌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게.”
“예, 알고 있습니다.”
유협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 무리들을 크게 경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조조는 무리들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조홍을 진류군에 파견한 것은 부관에게 부름을 내린 유협을 경계해서일 뿐, 진류왕을 옹립해야 한다는 여론을 주장하는 벌레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증명하듯,
조조는 이성휘가 돌아오자마자 진류군에 대한 모든 관심들을 끊어 버렸다.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가 관동 지역의 제후들을 연이어 접선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맹덕 님께서는 관동 연합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성휘의 물음에 조조는 고심에 빠진 듯,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치면서 침음을 삼켰다.
물론 고심에 빠진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이성휘와 손을 맞잡은 채였다.
“본초가 움직인다면 움직일 걸세. 만약 본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움직이지 않을 걸세.”
조조 군의 향후 방침은 원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치에 집중하면서 후일을 도모할지.
아니면 관중 제후들과 연합하여 적신(賊臣)에 대적할지.
흑발의 여인은 벗의 결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관동의 공적을 토벌하기 위해 모인다고 한들, 오합지졸처럼 모인 제후들이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본초가 연합을 이끈다면 최소한의 성과 정도는 이룩할 수 있겠으나…, 요새와 관문들을 뚫고 낙양을 도모하기는 어려울 걸세.”
예상대로 조조는 관동 제후들과의 연합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었다.
이미 제후들은 군벌이 된 상태였다.
황실과 조정을 향한 충성심을 가진 이는 매우 드물었으며, 욕심과 탐욕만을 우선시할 뿐인 살쾡이에 지나지 않았다.
호기롭게 나서겠으나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 테지. 최악의 경우,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한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귀관이 다시 한번 천하를 요동치게 만들 괴력난신의 용력을 보여 준다면… 또 모를 일이겠지만 말일세.”
“맹덕 님께서 명하신다면 싸울 뿐입니다.”
“후후, 그런가.”
이성휘의 답변이 믿음직스러웠는지 흑발의 여인이 웃음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귀관의 말을 들으니 든든하군.”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100명의 장수들보다도 이성휘 한 명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조조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를 짓자 이성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항아보다도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고 있었기에, 이성휘는 달빛에 그만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조조의 미소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제 그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리하도록 하지.”
이성휘는 조조를 뒤로한 채 집무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뜨거워진 가슴을 진정시킨 뒤,
들뜬 호흡까지 가다듬은 이성휘는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분주하게 복도를 누비던 시녀들을 지나쳤다.
“요즘 명부와 분위기 좋은데~?”
휘파람을 불면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
진궁이 팔짱을 낀 채로 조조의 집무실을 나온 이성휘를 맞이했다.
머리카락을 다시 염색했는지 짙은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염색물이 빠지면서 검은 머리카락을 보이던 정수리 부분도 금발로 물들어 있었다.
“군사.”
“우리 명부께서 중원제일 검이 돌아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리셨다고. 얼마나 애타게 보고 싶었으면….”
입을 나불대면서 수다를 떨던 진궁이 말끝을 흐리면서 한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조조가 있었다.
더 이상 입을 나불대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조조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상관이 보낸 무언의 경고에 굴복해 버린 진궁은 어깨를 으쓱 흔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폭력적인 매력을 자랑하는 그녀라도,
조조의 날카로운 위압 앞에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가서 부관을 불러오게.’
‘호족들을 만날 터이니 부관을 부르게.’
의지하는 마음이 컸던 조조는 시녀들에게 이성휘를 호출할 것을 명령하는 귀여운 실수를 범했다.
그 결과,
조조가 이성휘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시녀들이 알게 되었다.
주군의 귀여운 실수를 떠올린 진궁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면서 당장에라도 그 사실을 이성휘에게 말해주고 싶어 근질 대는 입을 진정시켜야 했다.
“군사, 잠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들어오도록.”
조조가 스산한목소리로 명령했다.
주군의 부름에 진궁은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왜 이제 나와요? 기다리다가 발이 저릴 뻔했네.”
집무실로 들어가는 진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린 이성휘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흑발의 여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황금 갑옷을 입은 여인,
고귀한 황금이 찬연하게 빛나는 여걸이었다.
“죄송합니다, 맹덕 님께서 부르신 터라.”
“됐어요.”
이성휘의 대답에 조홍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불만에 가득 찬 마음을 내비쳤다.
“저보다도 언니의 명령이 우선이라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이런 둔탱이 같은 사람!”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이성휘의 발등을 콱 내리찍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조홍이었지만, 그가 여심을 티끌만큼도 모르는 미련한 둔탱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울분을 삭였다.
“자렴 님.”
“왜요! 그리고 또 존댓말! 편하게 말하라고요!”
"나중에… 차차 익숙해지면 그리하겠습니다."
"에휴!"
자신을 부르는 이성휘의 목소리에 조홍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에 이성휘가 물었다.
“진류왕과 궁인들이 머무는 진류군의 가택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자렴 님께 갚아야 할 빚의 변제에 대해….”
“갚지 마요, 괜찮으니까.”
“예?”
“괘, 괜찮다고요! 그냥 그 꼬맹이한테 준 걸로 할래요. 그러니까 변제는 없던 일로 해요!”
의아함 섞인 반응을 보이는 이성휘의 모습을 본 조홍은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홱 돌리면서 대답했다.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천하제일의 자린고비로 불리는 흑발의 여인은 이성휘에게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다.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패국조씨 가문의 신분으로 고리대금업을 벌일 정도로 재물을 밝히는 수전노가, 생애 단 한 번도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적이 없을 정도로 재물에 인색한 여걸이 가택의 토목공사에 사용된 십만금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마세요. 그냥 제 변덕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을 끝낸 조홍은 이성휘에게 등을 돌리면서 발걸음을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성휘가 뒤쫓았다.
* * *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는 관동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을 친히 설득했다.
그에 광릉태수 장초가 호응하였으며,
산양태수 원유와 제북상 포신 등의 지방관들이 가세하면서 관동군(關東軍) 연합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자신을 도모하기 위해서 관동 제후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듣게 된 동탁은 크게 격노하면서 교위(校尉)에 임명된 이각에게 시중(侍中) 주비와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을 참수할 것을 명령했다.
“어르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비와 오경이 추천한 인물들은 모두 정북장군 원소와 친분이 있는 자였습니다. 필시 원소를 돕고자 유대와 공주 같은 자들을 지방관으로 보낸 겁니다.”
낭중령(郎中令) 이유의 말에 동탁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불만이 팽배한 민심을 억누르고자 명망 높은 관료들을 지방관으로 보냈건만, 도리어 그 선택이 제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기주목 한복을 제외한 모든 지방관들이 자신을 향해 적대관계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런 쳐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지방관에 임명해주었거늘, 감히 이 동중영의 목을 노리려 든단 말인가!!”
그 배은망덕한 놈들을 모두 요절을 내야 마땅했다.
당장 붙잡아서 삼족을…
아니, 구족을 모조리 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관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놈들이 하나로 뭉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겠네. 무릇 전쟁은 먼저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지 않은가.”
중용무쌍한 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교만에 빠진 모습을 보일 만도 하건만, 동탁은 매우 신중하게 관동의 제후들을 상대했다.
동탁은 무수히 많은 전투들을 경험한 숙장이다.
그렇기에 그는 관동 제후들의 취약한 점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먼저 예주를 불바다로 만들겠네! 관동 놈들이 거병한다면 필시 예주에 집결할 터.”
관동 제후들이 거병하여 낙양으로 진군해 온다면 분명 예주를 전진 거점으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동탁은 예주를 쓸어 버린 뒤,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든 예주자사 공주를 처참하게 찢어 죽이고 영천군(穎川郡)과 여남군(汝南郡)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도륙할 생각이었다.
“봉선.”
“…예, 어르신.”
동탁의 부름에 방천화극을 들고 호위를 서고 있던 붉은 갑옷의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를 여전히 의심하는 무리가 군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너에게 충성을 입증할 기회를 주겠다.”
서량 제일의 맹장이라 불리는 화웅이 중상으로 인해 전쟁에 동원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동탁은 여포에게 화웅의 역할을 맡겼다.
“이번 전투에 큰 공훈을 세운다면 너를 높은 벼슬에 임명하는 것은 물론, 너와 함께 투항해온 병주 출신의 장수들 또한 귀하게 대접할 것이다.”
동탁은 여포가 병주의 전우들을 끔찍이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가솔들을 모두 인질로 잡아 낙양에 살게 했다.
낙양을 벌벌 떨게 하였던 맹장의 두 발목에 족쇄를 채운 동탁은 가솔과 부하들을 모두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여포가 냉혈한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전쟁에 투입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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