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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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앗간을 나온 뒤,
이성휘와 조홍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연주성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첫 경험을 치른 풋풋한 두 남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까.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에게 곁눈질을 보내면서, 그러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
“…….”
한 움큼의 설탕을 그대로 입에 넣은 것처럼 달달한 분위기였지만, 이성휘와 조홍에게는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초조함이 흐를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어젯밤의 정사에 대해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둘 다 첫 경험이다 보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아, 아직도 몸이 끈적끈적한 것 같아요. 분명 개울가에서 꼼꼼하게 씻었는데….’
말을 타고 있던 흑발의 여인은 뜨거운 액체가 뱃속에서 꿀렁꿀렁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남성의 아기씨가 뱃속에 들어왔다.
욕정을 모두 분출하듯, 격렬한 기세로 뱃속에 뿜어진 정액의 뜨거움을 조홍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으으으! 아무리 분위기를 탔다지만! 어떻게 시집도 안 간 제가 그런 말을 저 사람한테…!!’
이성휘를 향해 ‘서방님’이라 부르면서 아양을 떨어댔던 자기 모습을 떠올린 조홍은, 당장에라도 죽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렴 님.”
“네, 네…!”
젖가슴을 출렁출렁 흔들면서 음란하게 허리를 들썩였던 어젯밤의 자기 자신을 떠올린 조홍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을 때,
당혹감어린 침묵을 지키던 이성휘가 마침내 조홍에게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조홍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의 망발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자렴 님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예?”
이성휘의 발언에 조홍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어림총사는 언니를 연모하고 있잖아요. 어젯밤 일은 그냥 제가 먼저 어림총사를 유혹해서 일어난 거예요.”
이성휘와 언니, 두 사람이 서로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홍은 애써 이성휘를 만류했다.
나 때문에,
어젯밤의 일 때문에 이성휘가 언니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접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그래도 나를 책임지겠다고 말해 줘서…, 진심으로 기뻐요.’
조홍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남성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성휘를 만류한 것은,
그가 진심으로 언니를 연모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자기 목숨을 구해 준 그에게 연모의 마음을 느꼈고, 언니에게 일편단심 같은 사랑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 동경심을 느꼈다.
‘저는 당신이 언니를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언니가 연모하는 남성과,
언니를 연모하는 남성과 사통을 범한 주제에 뻔뻔스러운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홍은 진심으로 이성휘를 연모하고 있었기에 그가 자신 때문에 언니를 향한 마음을 강제로 접는 것을 원치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우니까 어젯밤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마세요!”
“하지만 자렴 님….”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조홍의 모습에 이성휘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명문가의 여식,
한나라에서 손꼽히는 개국공신 가문의 아가씨였다.
고결한 혈통을 가진 아가씨의 처녀를 앗아간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이성휘은 뻔뻔스러운 성격이 되지 못했다.
“일단 그 호칭! 호칭부터 바꾸세요. 그냥 자렴이라고 불러줘요. 그리고 단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말을 놓으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 부탁도 들어 주지 않겠다면 저는 평생 어림총사와 연을 끊겠어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리는 조홍의 무대포 같은 모습에 결국 이성휘는 제멋대로 같은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렴.”
“네엣♡”
마치 연인을 부르는 듯한 이성휘의 부름에 조홍은 반사적으로 암컷 같은 소리를 냈다.
음란한 교태에 젖은 목소리.
질내사정을 당하면서 쾌락을 발산하던 천박한 신음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연인처럼 불러 주는 이성휘의 목소리가 너무 기뻤던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음란한 교태를 부린 조홍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제가 무슨 목소리를…!! 연인처럼 불러 주는 어림총사의 부름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음란한 여자 같은 목소리를 내버렸어요!’
고개를 푹 숙인 흑발의 여인.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이성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한 듯,
말을 재촉하면서 연주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서두를 뿐이었다.
“크흠….”
이성휘가 민망함이 섞인 헛기침했다.
그 짧은 반응을 통해,
조홍은 이성휘가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익!”
들었다.
알아챈 게 분명했다.
조홍의 새하얀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연인처럼 불러 주는 말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천박한 암컷 소리를 내버린 자기 반응을 알아챈 것이었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면서 연기한 것이리라.
“이, 잊으세요! 잊으라고요!”
뒷모습을 보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이성휘를 향해 조홍이 크게 소리쳤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들었잖아요! 방금 민망해서 헛기침까지 했으면서!”
다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조홍은 도리어 깊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 * *
발해군을 중심으로 기주의 군현들을 복속 시킨 원소는 수많은 빈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주 출신은 물론,
예주 출신의 명사들 또한 대거 발해군으로 와 원소의 군문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는 친부와 적모의 삼 년상을 연속하여 지내면서 효(孝)를 알렸으며, 또한 건석의 난과 십상시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의(義)와 충(忠)의 명성을 떨쳤으므로 수많은 명사들이 휘하에 들어온 것이었다.
“주군, 동탁이 군세를 보내어 장안을 취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동탁은 관서(關西)와 관중(關中)을 모두 거머쥔 대군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끔한 인상의 남성이 앞서 걷던 금발의 여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에 금발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가 실로 급박하군요. 설마 동탁이 이리도 빨리 관중 지역을 취할 줄은 몰랐어요….”
원소가 손톱을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동탁이 관서에 이어 관중을 장악했다.
그 말은 즉, 황제와 조정을 손아귀에 쥔 동탁이 중앙 권력을 보다 확고하게 다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주군, 동중영은 궁중의 여인들을 겁탈하고 황실 종친들의 문릉을 도굴하는 등의 패악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사대부와 호족들을 배척하고 민심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번번이 일삼고 있으니, 결국 손아귀에 거머쥔 권력은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동탁은 손아귀에 쥔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권력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변방 출신의 장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능할지언정 천하를 경영함에 있어선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동탁에게는 양주 출신의 맹장들과 20만에 달하는 막강한 군대가 있어요. 낙양이 분노와 불만으로 팽배한 상태라고는 하나, 동탁은 여전히 강해요.”
무맹도위 정원의 휘하였던 비장(飛將) 여포를 비롯하여 병주 출신의 장수들이 대거 동탁 군에 합류했다.
한나라 제일의 기마군단을 보유한 병주군이 동탁에게 투항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하오나 주군, 전횡과 폭정을 일삼으며 천하를 도탄에 빠트리고 있는 역적을 좌시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주군께서 관동 제후들을 연합하여 천하에 대의의 기치를 세우셔야 합니다!”
예주 출신의 모사인 순심의 간곡한 참언에 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동 제후들을 연합하여 역적을 친다.
순심의 참언에 담긴 뜻을 간파한 원소는 팔짱을 끼면서 번민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럼 관동 제후들을 규합하는 일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까요?”
“유대와 교모에게 맡기십시오.”
황제를 꼭두각시로 삼고 조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동탁은 관동 제후들의 공적(公敵)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역적이며,
관동 제후들이 두려워하는 대군벌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동탁이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관동을 정벌할지도 모른다며 불안감에 떨고 있는 제후들은 서로 단결하여 거대한 힘을 형성하자는 주장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주, 주군…. 하온데….”
관동 제후들과 연합하여 동탁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순심이었으나, 여남원씨 일가가 인질처럼 낙양의 동탁에게 붙잡혀 있음을 떠올린 순심은 사색이 된 채 다급히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관동 제후들과 함께 역신 토벌을 천 명하신다면… 주군의 숙부님과 일가친척 분들께서 큰 곤경에 처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미처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주군,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황송하다는 듯,
순심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예를 취했다.
그 말에 원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군사는 여남원씨 일가를 걱정하지 말고 관동 제후들과의 연합에만 힘써 주세요. 낙양의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요.”
싸늘하면서도 냉정한,
뾰족한 가시가 드러난 듯한 발언이었다.
원소의 매몰찬 모습에 순심은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아, 알겠습니다….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순심의 말이 끝나자마자,
원소는 고개를 돌리면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 자리에 남게 된 순심은 낙양에 있는 일가친척들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임에도 관동 제후들과의 연합을 강행하려는 원소의 결단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설마 주군께서는 낙양에 있는 여남원씨 가문의 일가친척들을 모두 희생시킬 셈이신가…! 필시 거병의 소식이 들리면 동탁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단칼에 결정을 내린 원소의 냉혹함에 심정이 복잡해진 순심은 빈객 신분으로 발해군에 머무르고 있던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에게 고견을 묻기 위함이었다.
“오셨습니까, 오라버님.”
가택에 도착했을 때,
순심은 빈객으로 머무르던 동생이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떠나게 되면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지, 지금까지 써 온 모든 물건들을 수레에 싣고 있었다.
“문약, 대체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오라버님을 따라 정북장군 어르신에게 귀의하려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골치 아픈 역마살에 씌이게 된 것인지 다른 지역들을 둘러보고 싶어졌습니다.”
짙은 상아색의 머리카락을 둔부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순씨 가문의 노복들을 재촉하면서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하여 신평, 곽도 등의 예주 영천군 출신들과 함께 정북장군을 보필하기를 원했던 순심으로선 다른 지역으로 떠날 것이라는 여동생의 변덕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주군께 상주하여 벼슬을 마련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천하를 좀 더 둘러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인물이 생겼고요.”
순심의 여동생, 순욱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헤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집필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멋쩍은 웃음을 지은 순욱은 자신이 쓴 작품집을 들어 올리면서 맹렬한 집필욕구를 보여 주었다.
여동생의 솔직한 말에,
순심은 한숨을 깊게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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