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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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유협이 독자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래서 진류태수 장막에게 유협의 감시를 부탁했으며, 유협과 궁인들이 기거하는가택의 주변에 첩자들을 배치하여 문중을 드나드는 인원을 철저히 감시했다.
유협은 겨우 여덟 살,
권력을 거머쥐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선황의 핏줄이며, 고귀한 혈통의 모친을 둔 황녀였기에 권력에 굶주린 승냥이들이 그녀의 주변에 점점 모여 들기 시작했다.
“진류왕을 등에 업은 권신은 언니만으로 충분해요. 유일한 정점을 위협하는 또 다른 권신이 생기지 않도록 진류왕을 철저히 감시하는 게 이번 임무죠.”
첩자들이 건넨 명부를 살피던 조홍은 벌써 한나라 황실에 충성하는 명사들이 움직였음을 알게 되었다.
퇴직한 관료들을 비롯하여,
명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재야의 학자들이 유협과 접촉하려 했음을 알아냈다.
연주 사대부와 호족들은 물론, 퇴직한 관료와 재야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황제 유변이 중앙 세력을 거머쥔 동탁의 전횡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중원에 새로운 황제를 옹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점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명부에 적힌 인원들이 전부입니까?”
“설마요.”
이성휘의 물음에 조홍은 옥편 정도의 분량은 될 것 같은 다른 명부들을 보여 주었다.
모두 유협과 접촉하려 했던 인원들로,
그들은 역신에게 놀아나는 황제를 폐위하고 고귀한 혈통의 황녀를 새 황제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겨우 여덟 살 밖에 안 된 아이에게 빌붙어 권력을 거머쥐겠다는 건가…. 한심해서 말도 안 나오는군. 쓰레기 같은 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가 몇 권이나 되는 것을 본 이성휘는 구역질을 느꼈다.
역신에게 붙잡힌 황제를 구할 생각은 않고,
마치 망가진 물건을 새 물건으로 교체하듯 벌써 정권을 운운하는 모습이 실로 우스웠다.
관동 제후들이 연합하여 역신에 대항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는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가 한나라의 충신으로 보였다.
“모두 맹덕 님께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펼쳐보던 명부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은 이성휘가 조홍에게 물었다.
그에 조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야겠죠. 향후 정적이 될지도 모르는 인간들에 대해 조사가 필요할 테니까요. 물론 이 많은 숫자들을 모두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요.”
진류태수의 치소에 도착하여 명부를 조사한 이성휘와 조홍은 여덟 살 황녀를 옆에 끼고 전횡을 일삼으려는 승냥이들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일단 어림총사가 진류왕의 동태를 살펴주세요. 첩자들을 배치하여 의심되는 인원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진류왕 본인에게 직접 의사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어림총사 밖에 없으니까요.”
조홍의 말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덧붙일 말이 있었는지 조홍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진류왕은 물론, 그녀를 보필하는 궁인들과 계속 관계를 맺는 건 그만두는 게 좋아요. 괜히 의심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조홍은 속으로 ‘언니가 어림총사를 의심하는 일은 없겠지만.’이라고 중얼거렸다.
친족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조조였지만 오직 이성휘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어쩌면 친족들보다도 더.
그런 조조가 이성휘를 의심하게 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 * *
말을 타고 가택으로 돌아온 이성휘는 안채에서 글공부하고 있던 유협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공부에 열중하던 황녀였지만,
이성휘가 알현을 청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글공부를 뒷전으로 젖혀두고 만남을 가졌다.
공무 때문에 연주성에서 함께 온 조조의 사촌과 함께 진류태수 치소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유협이었으나, 이성휘가 치소에서 곧바로 돌아와 만남을 청한다고 하니 금세 기쁜 표정을 지었다.
“흉악한 황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도탄과 궁핍에 빠진 연주 백성들을 구했다고 들었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중원제일 검이다!”
유협이 금색 눈동자를 찬연하게 빛내면서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동경심을 내비쳤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어서 무용담을 들려달라는 것처럼 동경과 존경으로 물든 눈빛을 간절하게 쏘아냈다.
당장에라도 품에 달려들어 옷깃을 당길 것만 같은 유협의 애절한 간청에 못 이긴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투에서 있었던 일을, 어린아이가 들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순화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대처럼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는 무인이 되고 싶구나. 한나라 사직을 위협하는 국적을 모두 무찔러서 횡포에 시름하는 백성들을 구하고 싶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꿈을 듣게 된 이성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참혹함도, 무서움도 모르는…
도적 떼로부터 고통받는 백성들을 모두 구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순수한 꿈이었다.
이성휘는 그런 유협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자기 자기 공명심 때문이 아닌,
남들을 위해 싸우고 싶다는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과 드시겠습니까?”
“그대도 다과를 들어라.”
이성휘가 다과를 권유했다.
그에 유협 또한 이성휘에게 다과를 권하면서 함께 다과를 즐겼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마치 볼태기 터질 때까지 먹이를 우겨넣는 다람쥐처럼 유협이 작은 입으로 다과를 먹기 시작했다.
작은 입에 저 큰 과자가 어떻게 빠르게 들어가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낙양에 있을 적에 전하와 함께 다과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반쯤 먹은 다과를 내려놓은 이성휘가 다과를 부지런히 먹고 있는 유협에게 말했다.
그에 유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와 함께 낙양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조청을 바른 다과를 먹고 싶었는데 말이다.”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작은 황녀의 모습에 이성휘는 터무니없는 약속했다.
낙양에 다시 입성하기까지 앞으로 수년 이상은 족히 걸리게 될 터.
무턱대고 약속해버렸다.
만약 이 광경을 조홍이 봤다면 탄식을 금치 못했을 테지.
하지만 희망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배시시 웃는 유협의 모습을 본 이성휘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다!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대와 그리고 황제 폐하와 함께… 오순도순 앉아 다과를 먹고 싶다.”
당찬 목소리로 입을 연 유협은 자기 유일한 염원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다과를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유협의 단 하나뿐인 소망이었다.
‘이런 순진무구한 아이를 이용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놈들이 승냥이처럼 날뛰고 있다는 게 역겹군. 그저 함께 다과를 먹고 싶을 뿐인 아이에게, 권력을 향한 욕망을 가르치려는 놈들이 가택 주변에 깔려 있다는 게 있다는 게 역겹게만 느껴진다.’
진류왕과 궁인들이 기거하는가택의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거지처럼 움막을 친 인원은 물론,
노복들을 잔뜩 대동한 채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부리는 사대부와 호족도 보였다.
어떻게든 중앙 권력을 향한 동아줄을 잡을 수 있을까 싶어 가택 주변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인파들의 모습을 떠올린 이성휘는 칼자루를 뽑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소녀가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장지문 너머로 여성의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양제일미로 칭송받는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아름답기로 유명한 미녀, 초선이었다.
“물론이다! 들어오너라!”
유협의 윤허가 떨어지자 장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폐월수화(閉月羞花)의 미녀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들었다.
“담소를 방해하여 송구스럽사옵니다.”
“아니다, 담소는 원래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것이 아니더냐.”
수줍은 미소를 짓는 초선의 모습에 유협은 친언니를 대하듯 친애의 감정을 보였다.
황녀와 시녀의 관계가 아닌,
사이좋은 의자매로 보일 정도로 친애가 넘쳤다.
함께 낙양의 고난을 돌파하여 연주까지 왔으니 의자매처럼 지내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유협과 궁인들은 낙양에 있을 적부터 가족처럼 지내 왔었으니까.
“전하, 바깥에 수많은 인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초선에게 곁눈질을 한 이성휘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유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분들이 모두 가택의 빈객을 청하고 있사 온데…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고 있사옵니다.”
초선의 말에 이성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빈객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무리를 형성하게 되고, 무리를 크게 형성하게 되면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법입니다. 역신이 낙양을 침탈하여 4백 년 사직이 위태로운 지금, 진류군에서 크게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면 필시 의심하는 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될 겁니다.”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연 이성휘의 말에 유협과 초선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심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위협하는 정적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태어날 때부터 궁중 생활을 해온 유협은 남을 의심하는 마음이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협은 이성휘의 말을 명심하기로 했다.
“그대의 말이 맞다. 내 명심하도록 하겠다.”
의심을 일으키게 해선 안 된다.
작은 황녀는 든든한 은인의 충고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꾸벅 끄덕였다.
“만약 바깥의 무리가 억지를 부리거나 행패를 부린다면… 즉시 진류태수 장막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의협심이 대단한 진류태수라면 응당 두 팔 벗고 나서서 도움을 줄 겁니다.”
“알겠사옵니다, 명공.”
유협과 아쉬움에 찬 작별 인사를 한 뒤,
함께 안채를 나온 초선을 향해 유사시에 진류태수 장막을 의지하라는 말을 남겼다.
“이제 다시 연주성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옵니까?”
아름다운 미녀가 수심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초연하게 보내려 했으나,
마음을 억누르는 게 쉽지 않았는지 연모에 빠진 여인은 사랑하는 남성에게 무심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찬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가까운 시일 내로 돌아올 겁니다. 진류군에서 해야 될 일이 많으니까.”
“며, 명공…! 일 때문에 아니라… 다음에는 소, 소녀를 보러 와주시옵소서…!”
부끄러움에 물든 얼굴을 한 채,
모든 감정을 발산하듯 풋풋한 고백을 끄집어냈다.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애처로움 가득한 표정을 짓는 초선의 모습은 꼭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예, 다음에는 소저를 보러 오겠습니다.”
그리고 이성휘는 귀여운 미녀를 향해 살가운 대답을 전했다.
* * *
진류군에서 임무를 끝낸 뒤,
이성휘와 조홍은 연주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정길에 오르게 되었다.
“자렴 님, 이제 슬슬 해가 질 것 같습니다. 제가 주변에 역(驛)이나 원(院)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연주성으로 돌아가려는 조홍의 무리한결정 때문에 다소 어두운 산길에서 해 질 녘을 보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려 했으나,
진류군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조홍의 강경한결정을 뿌리칠 수 없었던 이성휘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해가 지게 되면 산짐승들이 내려오게 될 텐데. 어쩌면 미처 소탕하지 못한 황건적의 잔당을 조우하게 될지도 모르고…. 산길을 무리하게 나아가는 것은 더 이상 어렵겠어.’
밤의 음영이 내려앉게 되면 상인과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고 묵을 곳을 찾는다.
이성휘와 조홍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산길에 발걸음이 멈춰버린 그들은 당장 몸을 눕힐 수 있는 곳부터 찾아야 했다.
하지만 울창한 계곡이 위치한 산길에서 사람이 묵을 수 있는 곳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떤 작자가 미쳤다고 이런 난세에 인적 드문 장소에 거처를 두겠는가? 당연히 산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다시 마을 쪽으로 가요.”
“예, 알겠습니다.”
조홍과 이성휘는 말머리를 돌리면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자기 무리한결정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지, 조홍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개울 근처에 외딴집이 있는 것을 어렴풋이 본 것 같습니다.”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개울 근처에 작은 초가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이성휘는 어쩔 수 없이 그 건물에서 이슬을 피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짙게 깔렸을 때,
말을 재촉하여 길을 되돌아온 이성휘와 조홍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개울 근처의 초가집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물레방아…. 지나쳐 온 현의 백성들이 쓰는 방앗간인가? 저녁 그림자 때문에 흐릿하게 보여 몰랐었는데 설마 물레방아를 움직이는 방앗간일 줄이야.’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에서 발생하는 동력을 통해 방아를 찧는 방앗간.
개울물이 세차게 흘러갈 때마다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물레방아를 본 이성휘는 자신이 어렴풋이 본 초가집이 물레방앗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물레방앗간을 눈앞에 둔 두 남녀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리 대본이라도 짠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머쓱하고,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휙 돌리면서 헛기침하거나 뒷머리를 긁으면서 어색함에 찬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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