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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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휘와 조홍이 진류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류태수 장막은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호탕하고 의협심 넘치는 지사답게,
그는 관료들과 함께 치소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진류군에 온 군웅들을 환대해주었다.
“하하! 간악한 도적 떼들로부터 연주를 구해 낸 군웅들과 함께 술잔을 나눌 수 있어 영광일세!”
장막이 술잔을 들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불과 5천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30만 명에 달하는 황건적 대군을 격파한 이성휘와 조홍의 무용담은 천하를 요동치게 만들 정도의 큰 활약이었다.
연주 사람들 중에 그 활약을 모르는 이 없었으며, 또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이성휘와 조홍의 이름을 모르는 자 또한 없었다.
“연주가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두 분 덕분입니다.”
“불과 5천으로 30만 대군을 대적하시다니…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연회에 모인 장막 휘하의 속관들이 이성휘와 조홍을 크게 상찬하면서 존경과 경외를 표했다.
그들의 연이은 칭찬에,
스스로 뽐내기를 좋아하는 조홍의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황건적 대군을 격파함으로서 명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조홍은 자신이 있는 한, 조조군이 패배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장막과 속관들에게 당당히 선포했다.
“뭐, 당연하죠. 우수한 인재들을 두루 배출한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으로서 실로 당연한 활약이었어요.”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다.
겸손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오만해 보이는 대답이었다.
과연 조홍다운 뻔뻔함이라고 할까.
그녀는 한없이 오만하고 뻔뻔스러웠지만 결코 허풍으로 들리진 않았다.
이미 그녀는 활약과 공훈으로 자기 능력을 입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맹덕이 종제들을 신임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 모두 믿음직스러운 용장과 명장들이 아닌가.”
장막의 연이은 찬사에 조홍의 어깨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아부에 한없이 약한 성격.
향후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필시 아부를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빈객들 때문에 큰 화를 겪게 될 듯했다.
술을 연이어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흥을 돋우는 조홍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이성휘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취기로 붉게 달아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게, 중원제일 검.”
“예.”
“진류군을 다스리는 태수로서 그대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네. 연주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다하여 싸우지 않았는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장막의 모습을 본 이성휘는 그가 장차 조조를 위협하는 배신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려 했다.
진류태수 장막.
동생인 광릉태수 장초.
그와 그의 동생은 조조, 원소, 여포 등의 군웅들에 의해 철저히 희생된 피해자였다.
오랜 벗을 배신하고 반란에 동조하였지만,
그는 욕망과 야심이 판을 치는 난세 속에서도 계속 의협심을 관철하면서 대의를 꺾지 않았던 명사로 존경받아 마땅했다.
‘연주에서 시산혈해가 벌어지는 참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막아야겠지.’
여포. 진궁. 장막.
결코 이 3명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
아직 시기상조일지도 모르지만,
조조가 패업을 달성하는 시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진류태수 장막이 여포와 진궁과 접촉하는 일 만큼은 막아야 했다.
“자네의 용력은 가히 중원의 제일이라는 말을 누누이 들었네만… 과연 자네는 정말 대단하군! 대단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해도 부족할 정도일세!”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용저에 필적한다는 그 찬사가 결코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장맹탁이 보증하겠네!”
속관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취기가 얼큰하게 돌기 시작했는지, 장막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장막을 보며,
이성휘는 복잡한 마음이 담긴 쓴웃음을 지었다.
* * *
이성휘는 흥에 취해 술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결국 꽐라가 되어 버린 흑발의 여인을 등에 업어야 했다.
잠꼬대를 웅얼웅얼하듯,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 조홍은 몸을 크게 뒤척이거나 두 다리를 거세게 움직이는 등의 행동으로 이성휘가 곤혹을 느끼게 만들었다.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도톰한 입술을 뻥긋뻥긋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으흐흐… 으흐흐흐흐!”
한 맺힌 처녀 귀신처럼,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조홍의 행동에 이성휘는 다시 한번 곤혹을 느꼈다.
이런 말괄량이 같은 아가씨 같으니.
입술을 달싹이면서 히히 웃음을 짓는 조홍의 모습에 이성휘는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꾹 꼬집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으읏! 당신!!”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푹 숙이고 있던 흑발의 여인이 고개를 들더니 몸을 거세게 뒤척였다.
“수,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저를 으슥한 곳에 데려간 다음에 먹어치울 생각인 거죠?! 이 짐승! 내 그럴 줄 알았다고요!”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조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예쁘니까! 몸매도 좋고 아름다우니까! 가문에 돈도 많고 능력도 뛰어나고… 또 가문에 재물도 많은 여자니까! 그래서 술에 취한 나를 데려다가 기정사실을 만들려고 하는 거잖아요!”
본가를 아득히 뛰어넘는 재물을 가진 엄청난 부자임을 특히 강조하고 싶었는지,
술에 취한 흑발의 여인은 자신이 부자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주장했다.
“아닙니다.”
“왜, 왜 아닌 데에!!”
이성휘의 단호한 대답에 흑발의 여인은 더욱 광분하여 두 다리를 크게 흔들었다.
그러나 거세게 반항했음에도,
여성을 등에 업고 있는 이성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잘난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야, 이 나쁜 놈아! 예주 패국의 제일가는 재녀인 내가 체면도 다 포기하고 간곡하게 매달리면 조금쯤은 넘어가 주는 게 예의잖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울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술에 꽐라가 되어 버린 상태이기에 가능한 얼토당토않은 고백이었다.
“나쁜 쉐뀌….”
격분에 찬 억울함이 실린 외침을 내지르느라 힘을 다 쏟았는지, 몸을 크게 흔들면서 난동을 피우던 고주망태는 중얼대는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
들리기 시작한 코 고는 소리.
실로 고주망태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거칠게 난동을 벌인 다음에 코를 골면서 자다니.
대체 어떤 남자가 이 피곤한 말괄량이를 데려가게 될지 실로 무서울 따름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연모하게 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고백받아들였을 겁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또 씩씩한 여걸이니까.”
이성휘는 깊은 잠에 빠진 조홍을 향해,
자기 진심을 속삭이듯이 전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 * *
조홍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 뜬 뒤였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격통.
술에 패배해 버린 어리석은 자에게 내리는 천벌처럼 극심한 두통이 엄습해 왔다.
이부자리에 누워 있던 흑발의 여인은 두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아아악…!!”
안타까운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를 들은 듯,
사랑채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고개를 숙인 채로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숙취를 달래실수 있도록 꿀물을 가져 왔사옵니다.”
“고마워요.”
꿀을 물에 탄 뒤 호두와 잣을 섞은 차.
몹시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홍은 연적이나 다름없는 초선에 건넨 꿀물을 망설인 없이 꿀꺽꿀꺽 삼켰다.
꿀물은 적당히 미지근했다. 뜨거우면 숙취에 민감해진 위장이 놀랄 수 있고 차가우면 머리의 지끈거림이 더 심해질 수도 있기에 일부러 배려를 해준 것이리라.
“어제 어떻게 들어왔죠?”
시원하게 한 대접을 모두 비운 조홍이 초선에게 물었다.
초선이 미소를 머금으면서 입을 열었다.
“명공께서 업고 오셨사옵니다. 혹여 기억나지 않으시옵니까?”
“명공이라면….”
낙양제일미가 명공이라고 극진히 높여 부르는 상대가 누구였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조홍은 딱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딱 한 사람.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남윤의 수양딸이 명공이라고 극진히 부르는 상대를 떠올린 흑발의 여인은 술에 취한 자신이 대체 무슨 추태를 벌였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엎드려 누운 채로 베개를 집어 제 머리를 짓눌렀다.
“무, 무슨 말 없었어요…?”
“명공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사옵니다.”
하긴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니지.
초선의 대답에 조홍은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내가 무슨 추태를 보였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무슨 괴기어린 행동을 벌였는지,
기억이 싹 날아간 것처럼 머릿속이 백지가 된 상태였기에 더욱 무섭고 두려웠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처나 대책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명공이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왜, 왜요?! 왜 기다리는데, 불안 하게!”
“그건 소녀도 잘….”
이성휘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조홍은 웅크리고 있던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숫물로 세안을 한 뒤,
흐트러진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도록 완벽하게 단장했다.
최상급 비단으로 지은 예복을 입은 조홍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으면서 곱고 화려한 미색을 뽐냈다.
“아, 이제 기침하셨습니까.”
“…읏.”
문을 나서자 등을 내민 채 마루에 앉아 있던 이성휘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홍은 잠시 허둥대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꿋꿋하게 행동하면서 천연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어젯밤에는 제가 술이 조금 과했나 보네요. 미안 해요, 어림총사.”
“괜찮습니다.”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조홍은 자신이 어젯밤에 책을 잡힐 만한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고 확신했는지,
금세 화색을 띠면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언니께서 진류왕을 추종하는 인사들을 감시하라고 하셨으니까…, 진류태수의 치소로 가죠.”
“알겠습니다.”
조홍의 말에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구간에 있던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그리고 조홍에게 말했다.
“숙취 때문에 말을 몰기 어려우실 테니 제 뒤에 타십시오.”
“예…?”
“혼미한 상태로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바로 마차를 마련하겠습니다.”
“아, 아뇨! 그냥 뒤에 탈게요.”
이성휘의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한 조홍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의 뒤에 타기로 했다.
함께 말에 오르게 되었다.
말에 오른 이성휘의 뒤에 타게 된 조홍은 그의 앞에 서기만 하면 쿵쾅쿵쾅 요동치던 심장 소리가 더 격하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윽!”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어지러웠던 탓일까.
흑발의 여인은 남성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체중을 기대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톡하고 건드리면 과육이 흘러넘칠 것만 같은 농염한 아름다움에 찬 처녀의 용모였다.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예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장 소리가 시끄럽게 박동을 울려댔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연모의 마음에 두근대는 심장 소리는 오히려 기분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이, 이렇게 매번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놓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반해 버리는 거라고요.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당신 때문이예요.’
이성휘의 등에 수줍게 얼굴을 파묻은 조홍은 속으로 사랑을 속삭였다.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는지,
머리로 이성휘의 등을 툭툭 치면서 고양이처럼 귀여운 애교를 부렸다.
‘아비규환 속에서 의지했던 어림총사의 등….’
죽음이 쏟아지고 살육이 반복되었던 아비규환 속에서 끝까지 나를 지켜 준 등이다.
결코 꺾이지 않고,
무수히도 많은 적들이 달려들었음에도 결코 이성휘의 등은 꺾인 바가 없었던.
어미에게 매달린 아이처럼 매달렸던 등의 따스함을 기억하고 있었던 흑발의 여인은 당시 느꼈던 감정들을 상기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언니…. 하지만 저….’
물기에 촉촉하게 물들어 버린 두 눈을 반짝이던 조홍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범람하는 연모의 감정을 느끼면서,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언니에게, 주군을 향해 진심 어린 사죄를 했다.
‘저는 아마도 진심으로… 진심으로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이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외로움을 느낄 정도로.
외로움에 사무쳐서 그만 앓아누워 버릴 것처럼.
나는 이 남자가 없으면,
정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에 조금 기대도 될까요?”
“예.”
어린아이처럼 부탁을 한 조홍은 사랑하는 이의 등을 꼭 껴안은 채로,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따스한 온기를 마음껏 만끽했다.
행복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어떻게든 이 남자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되었다.
‘죄송해요, 언니.’
이성휘를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은,
어느덧 조조를 향한 충성마저 집어삼킨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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