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화려한 장식들이 눈에 띄는 마갑을 두른 백마가 흑발의 여인을 등에 태운 채로 오솔길을 나아갔다.
견고함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한 마갑.
휘황찬란한 장식들로 볼 때,
황금 갑주를 걸친 흑발의 미녀가 자신을 뽐내기를 좋아하는 거만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진류왕을 추종하는 명사들이 빈객 신분으로 가장한 채 진류군으로 모여 들고 있다고 해요. 괜히 언니한테 오해를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용무만 끝내고 금방 돌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조홍의 목소리는 짐짓 퉁명스럽게 들렸지만 오로지 이성휘를 걱정하기에 퉁명스레 말한 것이었다.
진류왕은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하다.
꼭두각시로 내세운 어린 황녀와 돈독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간다면 언젠가 큰 후환이 될 터.
어쩌면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조홍은,
이성휘를 위해 일부러 매몰찬 모습을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자렴 님.”
나란히 말을 타고 가고 있던 이성휘의 대답에 조홍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걱정이 무사히 닿은 것 같아,
그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어떻게 옆모습도 이렇게 잘생겼지?’
거칠고 중후한 용모를 가진 이성휘의 얼굴을 본 조홍은 속으로 크게 비명을 내지르면서 기뻐했다.
허여멀건한 멸치처럼 생긴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용모였다.
사실 조홍은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미남을 선호하는 취향이었지만 이성휘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취향이 완전히 뒤집히게 되었다.
“자렴 님?”
“큼… 큼큼…. 아무것도 아니예요.”
자기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조홍의 노골적인 시선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그에 조홍은 얼굴을 확 붉히면서,
멋쩍은 헛기침과 함께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 봤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쳐다보진 않았는데….
단둘뿐인 상황에 다소 격앙되었는지 무심코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진류왕과, 진류왕의 궁인들과도 너무 친하게 지내진 마세요. 계속 진류왕에게 마음을 줘서 어쩔 셈인가요? 그러니까 진류왕이 진류태수에게 부탁하여 어림총사에게 직접 서한까지 보낸 거잖아요.”
이성휘를 향해 핀잔을 준 조홍이 개미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림총사, 당신은… 우리 패국조씨 가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요.”
여덟 살 황녀 따위가 아닌,
우리 패국조씨 가문에 충성을 봉행해 달라.
흑발의 여인은 어렴풋이 연심을 드러내면서 자기 속셈을 에둘러 표현했다.
황녀에게 보내는 마음을 나에게 달라는 일종의 질투였다. 질투의 화신인 조조의 사촌답게, 이성휘가 진류왕과 진류왕의 시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경성지미(傾城之美)의 미녀가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다하는데 천하에 어떤 남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제 어림총사가 슬슬 저한테 고백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본디 남자는 현모양처처럼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다하는 여인에게 끌리는 법이다.
하물며,
경성지미의 미녀가 억만금의 재물까지 동원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처마 아래의 심단돌이 뚝뚝 떨어지는 빗물에 구멍이 뚫리듯, 나의 일편단심 같은 정성에 결국 이 남자는 무릎을 꿇으면서 애걸복걸 매달릴 게 분명했다.
“자렴 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이성휘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남성의 그 미소에,
두 눈에 콩깍지가 씌어 버린 흑발의 여인은 갸름한 얼굴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드러났다.
현모양처 같은 모습을 보여서 남성의 마음을 빼앗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번에도 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고만 것이었다.
* * *
하늘하늘한 심마바람이 부는 오솔길.
높게 솟은 비자나무 숲 아래를 이성휘와 단둘이서 거닐게 된 조홍은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나무 그늘에 어두워진 얼굴,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앞머리.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두 눈과 다부진 얼굴은 조홍의 마음을 한없이 떨리게 만들었다.
“자렴 님, 진류군이 보입니다.”
여정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황건적과 흑산적이 모두 토벌된 뒤,
조조 군에 의해 치안이 확보되면서 낭인과 행상인을 위협하던 산적들이 대부분 소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류군과 동군을 잇는 가도는 조조군 장졸들이 항상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산적들이 얼씬댈 수 없었다.
“네, 정말 일찍 도착했네요. 아무 일도 없이.”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조홍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가슴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기뻤던 행복이 단숨에 끝나는 것은 누구나 아쉬운 법이다.
게다가 조홍은 욕심이 매우 많은 성정이었기에 단숨에 끝나버린 행복에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깊은 아쉬움을 보였다.
‘왜 산적들이 이럴 때는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건데요! 조금은 성실하게 일하라고요, 산적들! 그렇게 굼떠서야 제대로 밥벌이나 할 수 있겠어요?!’
산적들이 나타나 위기감을 조성해주기를 내심 기대했던 조홍이 뻔뻔한 분노를 표출했다.
‘만약 산적들이 기습을 가해 왔다면….’
비겁한 급습을 가해온 산적들.
그로 인해 자신은 말에서 떨어지게 되고,
이성휘와 함께 산적들을 피해 필사적인 도주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에 불타게 되는 두 사람.
싸움과 도주를 반복하면서 점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되고, 결국 욕정을 이기지 못해 외딴 폐가로 들어가 음란한 육체관계를 나누기에 이른다.
“자렴 님.”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순결한 처녀를 짐승처럼 덮치면서 욕정을 해소하는 이성휘의 광기 어린 모습을 기대했던 조홍은 아쉬움에 찬 중얼거림을 툴툴 내뱉었다.
“일단 가택으로 가도록 하죠.”
조홍이 말머리를 돌리면서 이성휘와 함께 가택으로 향했다.
향하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대궐 같은 규모를 자랑하는가택은 진류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 명공!”
가택의 대문에 도착했을 때,
미리 소식을 접하였는지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경국지색의 미녀가 새하얀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마치 연인과 오랜만에 재회한 듯,
여인의 두 눈에 기쁨에 찬 눈물이 맺혀 있었다.
“명공께서 혹시 다치진 않으셨는지…, 혹여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소녀는 매일 아침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눈물을 보일 정도로 자신을 걱정했다는 초선의 말에 이성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조홍은 봄바람에 탄 것처럼 둥실둥실 떠 있던 기분이 급격히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누, 누구 앞에서 꼬리를 쳐! 낙양제일미로 칭송받는 미녀면 다야? 수중에 땡전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 주제에 어디서 감히!’
빌붙은 군식구 주제에!
여덟 살 황녀와 함께 낙양에서 쫓겨난 주제에 감히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에게 가당치도 않는 마음을 품다니.
어림총사의 애처로운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가택에 받아주었거늘.
마치 자신이 어림총사의 안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성휘를 살뜰하게 대하는 시녀의 모습에 조홍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헌데 이분은…, 아! 혹여 호위장군이시옵니까?”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흑발의 여인과 시선을 마주하게 된 초선이 고개를 급히 숙였다.
“전하와 소녀에게 큰 은공을 베푸신 분이라 들었사옵니다…! 이제야 감사를 전하는 소녀의 황망한 배은망덕함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자기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삐까뻔쩍한 황금 갑주를 두른 흑발의 여인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정동장군 조조의 사촌인 조홍.
머무는 가택의 주인이며,
진류왕과 궁인들에게 은공을 베푼 은인이다.
그를 기억하고 있던 초선은 고개를 깊이 숙이면서 조홍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뭐, 염치는 있는 모양이네요.”
초선의 극진한 인사에 조홍은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원래 제가 머물렀어야 하는가택이니까 당연히 마음대로 지내도 되겠죠? 지체 말고 어서 본채로 안내해주세요.”
“아, 알겠사옵니다.”
본채는 주인이 머무는 안채와 귀빈이 머무는 사랑채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또한 안채와 사랑채들의 좌우에는 여러 부속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ㅁ자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 진류왕이 안채에 머물고 있었기에,
초선은 이성휘와 조홍을 본채와 마주 보고 있는 사랑채로 안내했다.
“그대가 다시 와주었구나. 몹시 기쁘다!”
금발의 작은 여자아이가 폴짝 뛰면서 본채 안으로 들어선 이성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두 팔 벌리며 폭 안긴 황녀.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주섬주섬 든 작은 다람쥐처럼 앙증맞은 소녀가 이성휘의 품에 안긴 채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마음 깊이 의지하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것이 너무도 기쁜 듯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다! 그대의 활약상은 이 진류군에서도 듣고 있었다. 연주 백성들을 괴롭혔던 도적 떼를 크게 소탕했다지…. 정말 노고가 많았다.”
아기자기한 두 손으로 옷소매를 꼭 움켜쥔 유협이 고개를 들어 이성휘와 시선을 마주했다.
도적 떼를 무찌르고 백성들을 구한 영웅.
여덟 살 황녀의 두 눈에 이성휘는 군담 속에 등장하는 멋진 영웅처럼 비춰졌다.
나라를 위협하는 국적을 제거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 낸 활약과 공훈은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유협은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주면서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성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흥….”
사내의 품에 당돌하게 안겨 배시시 웃음을 짓는 작은 여우.
그 모습을 조홍은 언짢은 듯 보고 있었다.
새빨갛게 물든 뺨과 환열에 찬 웃음.
겨우 여덟 살짜리를 질투한다는 것은 실로 우스운 일이었지만 조홍의 눈에 유협은 큰 근심거리로 보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 패국조씨 가문에 충성을 바친 사람이라고요. 아무리 꼬리를 쳐도, 사특한 눈웃음으로 현혹시키더라도 절대로 한나라 황실 쪽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조홍은 이성휘를 향한 전폭적인 믿음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들었는지, 이성휘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표시하는 유협과 초선을 힐끗 노려보았다.
* * *
안채에서 유협과 장시간 동안 담소를 나눈 이성휘가 마침내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조홍이 낚아채듯이 이성휘의 팔을 붙잡았다.
“왜 이렇게 담소가 길어요? 다리에 쥐 나는 줄 알았네…!”
흑발의 여인은 투덜대는 중얼거림과 함께 이성휘와 팔짱을 낀 채 발걸음을 움직였다.
한쪽 팔이 붙잡힌 이성휘는 조홍이 시키는 대로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여야 했다.
“죄송합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셨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당연히 몰랐겠죠! 황녀와 낙양제일미를 만나 헤벌레하느라 바빴을 테니까.”
성난 고양이처럼 쌍심지를 켠 조홍이 이성휘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바람을 피운 남편을 현장에서 붙잡은 듯,
조홍은 주변의 궁인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성휘와 팔짱을 낀 채로 가택 안을 거닐었다.
“저한테 빚이 있다는 건 알고 있죠?”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일단 따라오기나 하세요.”
강압적인 요구였음에도 이성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홍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황녀와 낙양제일미와 친밀한 관계였던 이성휘를 향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언니의 패업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패국조씨 가문의 세업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이 사람을, 중원제일 검을 놓칠 순 없어요!!’
패왕의 업을 무사히 이뤄낼 수 있도록.
언니께서 장차 천하를 아우르는 패왕에 등극할 수 있도록.
중원제일 검을 절대로 한나라 황실에 빼앗길 순 없다.
그래서 조홍은 언니를 위해, 가문과 세력을 위해서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호, 혼인하면… 되잖아요! 저와 어림총사가 혼례를 올리면 만사가 해결될 문제예요. 어림총사가 우리 패국조씨 가문에 불변의 충성을 맹세한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붙잡아야 될 테니까요.’
패국조씨 가문과 언니를 위해서 일신을 모두 불사르기로 맹세했다.
내가 너무도 아깝지만.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이 싫지만.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원제일 검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한 정략의 일환으로,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이 남자에게 지금까지 간직한 순결을 바친 뒤에 혼례를 치러야만 했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대체 무슨 엉뚱한 생각하는 걸까.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리더니 헤실헤실 웃음을 짓기 시작한 조홍의 모습에 이성휘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흑발의 여인은 사랑하는 남성과 팔짱을 낀 채 즐겁고 행복한 망상을 즐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