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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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성(鄴城)에 도착한 기주목(冀州牧) 한복은 낙양에서 끌고 온 병력을 동원하여 여양현(黎陽縣)에 주둔하는 원소군의 영향력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 이후,
속관들을 원소군의 본 거지인 발해군에 파견하여 세력을 견제함에 있어 치밀한구석을 보였다.
“어르신, 발해군과 기주의 여러 군현들을 거느리고 있는 정북장군 원소의 세력은 실로 막강합니다. 필시 어르신을 해하려 들 것입니다.”
기주목 한복의 측근이었던 치중종사(治中從事) 유자혜가 깊은 우려를 보냈다.
원소가 이끄는 병력은 무려 수만 명에 달한다.
그에 반해 업성에 주둔하는 병력은 불과 5천에 불과한 수준이다.
만약 원소가 앙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업성에서 모두 몰살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원본초는 사세삼공의 명문인 여남원씨 가문의 일원이다. 조정에서 상서(尙書)와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낸 나를 도모하려 든다면 필시 천하의 미움을 받게 될 터! 감히 나를 직접 도모하진 못할 게다.”
한복의 대담한 발언에 기주목의 휘하 장수였던 민순과 경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동탁에 의해 임명됐으나,
한복은 엄연히 황실과 조정의 재가를 받고 기주목에 임명된 관료였다.
또한 상서와 어사중승 등의 고관을 역임하면서 명망을 떨친 대작이었으므로, 천하의 명망과 명성을 중시하는 원소는 섣불리 한복을 건드릴 수 없었다.
‘황실과 조정이 동탁의 손아귀에 넘어간 이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동탁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무맹도위 정원을 굴복시키고 휘하에 용맹한 장수들과 20만 대군을 거느린 동탁을 누가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천하에 동탁을 이길 자는 없다.
그래서 한복은 동탁을 지지하는 한편,
동탁이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원소를 견제했다.
서량에서 온 역적이 황실과 조정을 등에 업고 폭정과 전횡을 일삼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가문의 안위와 영달을 우선시한 한복은 자신이 역적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탁에게 굴종했다.
“어르신! 절대로 동중영, 그 역적을 신종하셔선 안 됩니다!”
“황실의 능묘를 파헤치고 낙양의 사대부와 호족들을 침탈한 자를 쫓으려 하십니까!”
동탁에 복종하고 원소를 견제하려는 한복의 굴종적인 방침에 기주 출신의 두 관료들이 반대했다.
별가(別駕) 전풍.
치중(治中) 심배.
강직하고 청빈한 재사로 명성이 높은 전풍과 심배는 황실과 조정을 쑥대밭으로 만든 역적을 어찌 따를 수 있겠냐며 결사반대를 외쳤다.
“동중영은 만고의 역신으로 천하의 지탄을 받게 될 역신입니다.”
“서량군의 창검이 두려워하시니, 장차 천하의 어느 명사가 어르신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역신의 뜻과 명령에 동조하는 것은 역신의 무리가 꾸미는 역모행위와 다를 바 없다.
무수히 많은 충신과 명사들을 배출했던 기주 지역의 주목(州牧)이 역신을 따르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던 전풍과 심배는 합심하여 한복에게 간언했다.
“그럼 자네들은 나더러 어찌하라는 말인가! 저 무도한 서량군의 창검 아래에 나와 그대들, 그리고 기주 백성들이 모두 휘말려야 만족하겠는가!”
기주는 새 지방관들이 임명된 다른 지역들처럼 사예주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동탁이 만약 사예주의 북단에 위치한 하내군(河內郡)에서 군사를 몰고 출진한다면 불과 나흘도 안 되어 업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었다.
역병과도 같은 기마군단이 몰려와
기주를 순식간에 불태우고 농토를 짓밟으면서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을 유린할 것이 분명했다.
“항거와 대항은 힘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일세. 힘이 없는 저의 항거와 저항은 무의미한 발버둥과 다를 바 없네.”
그렇게 말한 한복은 기주 출신의 명사인 전풍과 심배를 중임에서 제외한 뒤,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유자혜와 경무를 그 자리에 대신하게 했다.
“어르신.”
민순이 다가와 무관에게 들은 보고를 전했다.
“정북장군 원소가 어르신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업성 바깥에 왔다고 합니다.”
“필시 무뢰배처럼 수많은 군세를 이끌고 왔겠군.”
한복은 원소가 자기 기를 꺾기 위해 발해군의 군세들을 대동한 채 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군세를 동원하여 위압을 가하려 들겠지.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정북장군에 임명된 원소에게는 능히 그럴 만한 군사력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복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한복의 짐작에 민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정북장군 원소는 불과 10여 명에 불과한 호위들만 이끌고 업성에 왔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업성과 일부 군현을 제외한 거의 대다수의 기주 군현들을 복속 시킨 군벌이 불과 10여 명에 불과한 호위들만 이끌고 성문밖에 왔다는 소식에 한복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무모하고 과감했다.
그리고 사려가 깊지 못했다.
동탁은 지방 군벌들 중에서도 발해군에서 웅거하는 원소를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를 업성으로 유인한 뒤에 수급을 베어 동탁에게 진상한다면 큰 포상받는 것은 물론, 향후 삼공(三公), 구경(九卿)의 벼슬을 받게 될 것이었다.
시커먼 탐욕을 느낀 한복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 * *
진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2년 동안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던 임과 사이좋게 손을 잡는 관계까지 되셨는데… 그래서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명부?”
그에 흑발의 여인은 부끄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는지 말을 우물쭈물 흐리면서 양 엄지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였다.
“모… 모르겠다, 나도 잘. 마치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계속 간지럽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쑥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기쁜 웃음을 헤실헤실 짓는 조조의 모습에 진궁인 뺨을 파르르 떨었다.
첫사랑에 기뻐하는 주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탕을 듬뿍 뿌린 설탕물을 입에 가득 머금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이 너무도 따스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수많은 살생들을 범한 무인의 손이었지만, 내게는 더없이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조조는 두 손을 꼭 쥐면서,
마치 그때의 온기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자기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크고 넓은 손이었다. 여인의 손과는 전혀 다른, 사내의 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겨우 손을 잡았을 뿐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려 2년 동안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던 조조에게는 매우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연인처럼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손가락 사이의 애정과 손바닥에 담긴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과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행복한 기쁨이었다.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몹시 부끄러워하시는데, 나중에 더 진도가 나가게 되면 어쩌려 그러십니까, 명부? 이를테면 입맞춤이라든지.”
입맞춤.
의미심장한 애정 행위를 언급한 진궁의 말에 조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손을 잡게 된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만약 입맞춤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뇌리에 만약의 경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군사의 조력에 감사를 표한다.”
“명부를 모시는 심복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앞으로도 계속 조력해주기를 바란다.”
“알겠습니다, 명부.”
부끄러움 가득한 조조의 모습에 진궁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이 진공대가,
주군의 연애 사업을 위한 조력자가 될 줄이야.
주군과 중원제일 검의 관계를 맺어 주기 위한 연애 사업. 주군에게는 오랜 숙원과도 같은 일로, 패왕의 업에 준하는 수준의 중차대한 대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진궁은 앞으로도 조력자로서 큰 활약들을 하겠노라고 조조에게 다짐했다.
“명부, 연주성에 기거하는 연주자사와 동군태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의 처우에 대해 물었다.
유대와 교모는 위험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관동(關東) 동맹을 준비하는 한편,
연주에서 세력을 키워 제후가 되려하고 있었다.
황건적과 흑산적을 토벌한끝에 마침내 뿔뿔이 흩어졌던 연주를 통일한 조조에게 있어, 연주에서 세력을 형성하려는 유대와 교모의 행동은 자칫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 요소였다.
“연주의 주인은 오로지 명부이십니다. 유대와 교모는 역적에 의해 임명된 빈껍데기 지방관일 뿐, 연주의 모든 권력은 명부에게 집중되어야만 합니다.”
연주를 관찰하는 감찰관과 연주의 중심지인 동군을 관할하는 태수.
한 명의 사공이 탄 배에 갑자기 뭍에 있던 두 명의 사공들이 한꺼번에 탑승하게 된 격이었다.
연주의 모든 내정과 군사권은 당연히 황건적과 흑산적을 격멸한 전쟁영웅인 조조에게 있었지만 유대와 교모는 명망 높은 고관대작이었기 때문에 감히 박대할 수 없었다.
“군사, 연주자사와 동군태수를 압박할 수단이 있겠는가?”
“…수단을 마련하여 명부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조의 주문에 진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유대와 교모를 압박할 수단.
중앙의 고관대작을 역임했던 그들을 압박할 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이미 연주는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패왕의 업을 논하는 바탕이 될 땅에 다른 야심가가 끼어드는 것은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헌데 중차대한 일을 은밀하게 의논하는 자리에 어림총사가 보이지 않습니다만….”
유대와 교모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을 논의하는 자리에 이성휘가 보이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진궁이 조조에게 물었다.
그에 조조가 대답했다.
“부관은 잠시 진류군에 다녀올 예정이다.”
“진류군… 말씀입니까?”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로 인해 여론이 시끄러워진 현 상황에 이성휘가 전(前) 거점이었던 진류군에 다녀온다는 말에 진궁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꼭두각시 황녀가 부관에게 서한을 보냈다는군. 명분을 위한 허수아비 주제에 감히.”
곁이 외로워 잠시 와 줬으면 한다.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 동정심을 유발하는 작은 황녀의 행동이 가증스럽게 보였는지 조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언니, 자렴입니다.”
문 너머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홍의 목소리였다.
“자렴.”
갸름한 얼굴을 가진 미인을 쳐다 보면서 조조가 입을 열었다.
“부관과 함께 진류군으로 가 진류왕의 동태를 살펴라. 진류왕을 옹립하려는 불온한 세력들이 진류군으로 점점 모여 들고 있다는 첩보가 방금 맹탁에게서 왔다.”
“진류왕을… 옹립한다고요…? 하지만 이제 겨우 여덟 살이잖아요?”
불과 여덟 살에 불과한 황녀를 차기 황제로 옹립하려는 무리가 있다는 것에 조홍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것의 혈육인 현 황제와는 달리, 진류왕은 고귀한 신분의 어미를 둔 선황의 혈육이다. 황실을 추종하는 명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진류왕의 그 고귀한 혈통이다.”
조조는 조홍에게 진류왕 유협을, 그리고 점점 모여 들고 있는 황녀의 추종세력을 감시토록 명령했다.
“진류왕이 지금 진류군에 있는 네 가택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예… 그, 그렇죠?”
“너라면 진류왕과 궁인들, 그리고 황녀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을 터.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빼놓지 말고 알아봐라.”
“네! 알겠어요.”
진류왕이 기거하는 가택에 빈객 신분을 가장한 추종세력이 모여 들고 있다.
조조는 혹시라도 유협을 추종하는 무리가 이성휘를 꾀어내지 않을까, 그것을 우려하여 조홍에게 감시와 감독 역할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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