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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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품은 감정은 결코 척애(隻愛)도, 편련(片戀)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상대인 이성휘 또한 조조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짝사랑하는 기묘한 관계.
‘고백’이라는 행위만 이루어지게 된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암울하게도 조조와 이성휘는 서로에게 진심 어린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하지가 못했다.
장대비처럼 화살들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빈 영웅들이 고백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실로 우습게 보이겠지.
하지만 조조와 이성휘는 서로에게 있어 첫사랑 상대였기 때문에 다소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맡기신 건 모두 처리했습니다.”
“와 벌써? 진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만약 중원제일 검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일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났을 거야.”
죽간더미들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그에 진궁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고마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게.”
난폭한 매력을 두른 금발의 미녀가 이성휘를 향해 도발적인 미소를 짐짓 보이면서 말했다.
물론 얄궂은 농담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흑발의 여인은 무심코 손아귀에 쥐고 있던 붓을 부러뜨릴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공대…. 지난번에 귀관과 야심한 밤에 서고에서 은밀하게 밀회를 보내고 있던 것을 잠자코 넘어가 주었거늘.’
질투라는 감정은 참으로 무섭다.
그렇기에 당연히,
2년 동안 마음을 애태우면서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조조가 품은 질투는 실로 어마어마한 독기를 자랑했다.
총애하는 군사라도.
신임하는 사촌이라도.
단숨에 황하 밑바닥에 처박아버릴 수 있을 정도의 잔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손이 불편하십니까.”
부러진 붓을 내린 채,
잠시 저릿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던 오른손을 주무르는 조조의 모습을 본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저릴 뿐일세. 붓을 오래 쓰다 보면 이런 손저림이 있지 않나.”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 흑발의 여인. 그리고 그것을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남성.
두 남녀의 모습을 빠르게 잡아낸 진궁은 둘의 관계를 단번에 좁힐 수 있는 최적의 판단을 떠올렸다.
진궁은 이미 자신이 모시는 주군께서 휘하에서 보필하는 부관을 남몰래 연모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맞는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부관께서 명부의 옥수(玉手)을 잠시 주물러 주는 건 어때. 손이 저릴 때마다 다른 손으로 주무르고는 하잖아.”
“무, 무슨…!”
진궁의 대담한 제안에 얼굴이 붉어진 조조는 물론, 이성휘 또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대담한 제안을 한 진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를 쳐다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지만 싫진 않은… 오히려 기쁘지만, 마냥 기쁜 반응을 보이기엔 부끄럽다.
조조와 이성휘의 긴장된 반응을 옆에서 가만히 관망하던 진궁은 입안에 가득 넣었던 벌꿀사탕이 내던 단맛보다도 더 달콤한 내음을 맡았다.
“부, 부탁하지….”
“맹덕 님.”
“괜찮네… 귀, 귀관이라면….”
“…예, 알겠습니다.”
서로에게 허락을 구하고, 허락을 맡았다.
보는 사람이 목이 막히는,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숨 막히는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풋풋한 사랑 내음을 풍기는 이성휘와 조조의 모습에 진궁은 피식 웃으면서 둘의 관계를 계속 지켜보았다.
“읏…!”
비단처럼 부드럽고 새하얀 손을 감싸는 두터운 손가락들.
굳은살이 박힌 무인의 다섯 손가락들이 마치 도자기를 감싸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여인의 섬섬옥수를 뒤덮었다.
‘지, 진공대…! 특별히 방금 전의 무례를 넘어가 주도록 하지…. 으읏! 으으으….’
손바닥을 지그시 누르는 압력.
거칠면서 두터운 손가락들이 피로에 지친 손바닥을 기분 좋게 눌러 주었다.
그때마다 조조는 부끄러움에 물든 신음을 애써 삼키면서 두 다리를 움츠렸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편해졌네.”
서로의 손이 계속 맞닿을 때마다 친애의 감정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가슴속에 깃든 사랑의 감정이,
사람의 신체 부위들 중 가장 중요한 부위이라고 할 수 있는 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어서 더욱 자극적으로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참나. 이렇게 옆에서 부채질을 해 줘야만 진전이 이뤄진단 말이지. 분명 낙양제일미로 유명한 진류왕 전하의 시녀도 중원제일 검을 연모하고 있을 텐데….’
빨리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후발주자에게 따라잡힐 뿐이다.
선두주자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일은 결코 자신을 앞지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후발주자에게 순위를 빼앗기는 일이겠지.
조조 군의 군사인 진궁은,
내정분야 뿐만 아니라 연애 사업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혹여 아프지 않으십니까.”
“괜찮네…. 오히려 더… 세게 해도…으읏.”
달달하게 분위기를 내는 두 남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궁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 기가 막힌 판단에 찬사를 보냈다.
* * *
연주자사 유대와 동군태수 교모가 탄 배가 연주 하구에 도달했다.
최대한 서둘러서 온 것인지,
낙양 하남현(河南縣)의 나루터를 떠난 선박은 불과 사흘 만에 연주 지역에 입성하게 되었다.
“정동장군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교모가 물었다.
그에 유대가 대답했다.
“이 천하에 서량의 난신을 도모할 수 있는 조맹덕과 원본초 밖에 없소. 황실과 조정의 재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가 그들을 설득하여 동탁을 처단해야 하오!”
유대와 교모는 기주와 연주에서 세력을 결성한 원소와 조조를 주축으로 한 동맹을 결성하여 황실과 조정을 장악한 역신을 주살할 작정이었다.
비록 동탁에 의해 지방관에 임명됐으나,
두 지방관들은 동탁을 주살하여 무너진 천하를 바로세우려는 웅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위해 유대와 교모는 먼저 연주의 조조를 설득한 뒤, 뒤이어 기주로 가 원소를 설득하려 했다.
“당장 연주성으로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에 오른 유대와 교모는 낙양 출신의 무관들과 함께 연주성으로 말머리를 향했다.
‘정동장군 조조는 낙양에서 출병하기 전에 동탁에게 피습을 당했다고 들었다. 필시 동탁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을 터…! 설득함에 있어 어려움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낙양에서 출병하려던 정동장군 조조의 수많은 장졸들이 급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조조에게 있어 동탁은 철천지원수.
그렇기에 유대와 교모는 정동장군 조조가 자신들의 계획에 협력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서 정동장군을 뵙게 해다오!”
“우리는 황실과 조정의 명을 받고 연주에 온 지방관일세!”
바로 말을 재촉하여 연주성에 도착한 유대와 교모는 즉시 조조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그리고 알현은 어려움 없이 성사되었다.
유대는 태위(太衛) 유총의 조카이며,
교모는 사공(司空)과 사도(司徒)를 모두 역임한 바 있었던 교현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비록 역신에 의해 지방관에 임명되었지만, 우리는 결단코 그 역적에게 동조할 생각은 없소!”
“결의와 협의의 기치를 들고 연주에서 거병한 정동장군을 돕고 싶소이다. 서량에서 온 역신을 토벌하여 기울어진 천하의 정세를 바로잡아야 때이오!”
상석에 앉은 조조는 유대와 교모의 의기 넘치는 말에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붉은 눈동자를 선명하게 빛내며,
새하얀 뺨과 꾹 다문 입가에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잔잔함을 품은 호수처럼,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물결처럼 낙양에서 온 연주 지방관들의 말에 경청할 뿐이었다.
“낙양의 의로운 충의지사들의 의기를 크게 공감하는 바이나 동탁을 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군은 겨우 기틀을 다졌을 뿐이다.”
무맹도위 정원의 휘하 장졸들을 모두 흡수한 동탁은 천하를 아우르는 일강(一强)이다.
어느 누가 감히 동탁에게 맞설 수 있겠는가.
기주의 원소와 손을 잡는다고 한들,
막강한 병력을 자랑하는 동탁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쟁은 결코 의기와 의협만으로 치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조조였기에, 단순히 충의만을 앞세우면서 전쟁을 주장하는 유대와 교모의 주장이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두 충의지사들의 의견을 휘하 제장들과 함께 검토하도록 하겠다. 연주자사, 그리고 동군태수. 비록 동탁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그대들이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임명된 지방관임은 분명하니 그에 맞는 예우를 다하도록 하겠다.”
비록 확답을 내리진 않았지만,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조조의 모습에 유대와 교모는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취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순 없는 법.
유대와 교모는 예우를 다하겠다는 조조의 말에 감사한 마음을 보냈다.
“귀관.”
접빈실의 문을 나선 조조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성휘에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함께 거닐면서,
유대와 교모가 했던 말을 그대로 부관에게 전달했다.
“낙양에서 온 책상머리 샌님들이 지방 제후들을 동원하여 동탁을 치려 하더군.”
“관동(關東)을 준동시킬 생각인 겁니다.”
“흠… 관동이라. 관중과 관서는 이미 동탁의 수중에 떨어졌을 터이니, 동탁에 맞서기 위한 군을 모을 수 있는지역은 관동 밖에 없겠지.”
이성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흑발의 여인은 관동에 깊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관동에 결성되는 동맹군.
중앙 권력을 장악한 이후부터 폭정과 전횡을 휘두르기 시작한 역신을 토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유대와 교모를 중심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귀… 귀관.”
“예, 알겠습니다.”
새하얀 얼굴을 새색시의 연지곤지처럼 붉힌 조조가 쭈뼛쭈뼛한 반응을 보이면서 조심스럽게 이성휘를 향해 손길을 내밀었다.
그에 이성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빨리 잡아달라고 보채듯 조물조물 움직이는 귀여운 손을 꼭 맞잡았다.
‘두텁군. 그리고 따스하다. 귀관이 계속 내 손을 잡아 준다면… 이 조맹덕의 손이 떨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쑥스러움에 찬 표정을 지은 조조는 자기 손을 맞잡는 두터운 애정을 느끼면서, 천하에 자신보다 행복한 여인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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