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낙양을 도모하려 했던 무맹도위 정원이 수양딸이었던 비장(飛將) 여포의 손에 참살되었다.
그를 따르던 일파들 또한 참륙되었으며,
사방이 포위된 채 진퇴양난에 놓였던 수만 명의 정원군은 그대로 동탁에게 투향했다.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 동탁은 여포를 중랑장에 임명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하는 한편, 함께 투항해온 장수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으핫핫핫핫!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하였던 위풍당당한 병주 호걸들이 마침내 내게 귀의하였으니, 천하의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동탁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투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병주의 막강한 병력을 흡수했다.
앞서 포섭했던 낙양 군단에 이어 한나라 제일의 기마군단으로 무명을 떨친 정원군까지 거둬들인 동탁 군은 천하를 호령하는 대군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양부의 수급을 들고 투항한 여포는 사수 방어선을 혈혈단신으로 돌파하는 놀라운 기염을 토해냈던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맹장이 아닌가.
여포의 투항은 곧 서량의 이리에게 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어르신.”
서량에서 온 역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 비장이 울분과 치욕을 애써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머리를 바닥에 조아린 그녀는,
가슴을 찢어발기는 격정을 느끼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였다.
사지에 놓인 수만 명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동탁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 여포는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충성맹세하게 되었다.
“이 역적 놈의 수급을 당장 성문에 내걸어라! 내게 거스른 자의 최후를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동탁은 무관들에게 명령하여 여포가 가져온 정원의 수급을 성문에 매달도록 했다.
황실과 조정을 뒤흔든 역적.
대역죄인(大逆罪人)이라는 모멸적인 문구가 새겨진 깃발과 함께 정원의 수급이 낙양 성문에 매달리게 되었다.
“믿을 수가 없군, 제 양부를 죽이다니.”
“부귀영화를 손에 넣으려고 패륜마저 저지른 년이네. 무인의 수치나 다름없지.”
동탁의 폭정에 시름하던 조정대신들이 여포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 말이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부귀영화를 위해 양부를 살해한 패륜아.
죽음이 두려워 주군을 시해한 패악 무도한 무인.
조정대신들은 물론,
동탁 군의 무장들 또한 주군이자 양아버지였던 정원을 죽이고 투항해온 여포를 뒤에서 힐난했다.
“저런 지독한 년 같으니라고.”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저런 역장(逆將)을 거두시려 하는 겐지.”
무인의 기개와 명예를 중시해온 여포의 무명은 단숨에 밑바닥으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병주 제일의 비장.
북방 오랑캐들로부터 변방을 수호해온 효웅.
전멸당할 위기를 겪게 된 수만 명의 장졸들을 살리기 위해 치욕스러운 가시밭길을 걷는 것을 선택한 여포는 양부를 살해함으로서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무명들을 잃게 되었다.
“…….”
사방에서 쏟아지는 모멸과 치욕.
혐오와 비난에 찬 시선들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의 마음을 끝없이 난자했다.
하지만 여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의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자신이 결국 선택한 가시밭길이었으니까.
‘나 하나 희생해서 모두 살았으면 된 거야.’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낸 것은 물론, 병주에 있는 장졸들의 가솔들 또한 모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애써 버텨내는 마음이 산산조각처럼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봉선 님.”
한없이 치욕스러웠던 자리를 견딘 뒤,
배정된 처소로 향하던 여포의 발걸음을 붙잡은 이는 묵묵히 뒤따르던 장료였다.
“괜찮아요.”
“뭐가?”
“지금은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장료가 두 팔을 벌렸다.
상처 입은 아이를 위로하듯,
온몸을 짓누르는 부담과 중압감 때문에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그녀를 향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참지 말고 우셔도 돼요.”
한없이 서투르고 서투른 그녀에게.
어떻게 마음을 터트려야 할지를 몰라,
무작정 격정을 억누르면서 슬픔을 삼키려는 그녀를 위해서.
그런 애처로운 여인을 위해, 장료는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부담과 중압감을 함께 분담하기로 결심했다.
“설령 천하와 만인이 봉선 님을 힐난하고 비난할지라도, 저만큼은 항상 봉선 님의 편이 되어드릴 테니까.”
이 서투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 품을 빌려주고 싶다.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부하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녀를 평생 지키고 싶었다.
“뭐야, 그게. 내가 무슨 철부지 아이도 아니고….”
여포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보살핌을 원하는 애가 아니라고,
혼자 상처받고 혼자 슬퍼하는 일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발의 여인은 억누르고 또 억눌러 온 마음을 더 이상은 억누를 수 없었는지,
결국 자애로움에 물든 품에 안기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품의 따스함에 매달리고, 두 팔을 뻗으면서 품의 부드러움에 매달렸다.
그리고 눈물을 터트렸다.
철부지 아이처럼.
“────!! ────────!!!”
양부를 살해한 패륜아.
부귀영화를 위해 주군을 배신한 패악의 무장.
천하 만민으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당하게 된 여인은 부하의 자애로운 품에 안겨 지금껏 억눌러 온 마음을 모조리 토해냈다.
꿈도. 무명도.
소중하게 간직해온 모든 것들을 잃게 된 그녀는 텅 빈 공허함을 마음속에 떠안게 되었다.
* * *
황건적들로부터 귀신이라 불리게 된 이성휘는 연주 백성들이 가장 경외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대적함에 있어 결코 망설임이 없으며,
적을 죽임에 있어 결코 연민을 베풀지 않는다.
연주 사대부와 호족들이 이성휘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간파한 조조는 공식적인 좌상마다 그를 대동하면서 교섭의 우위를 점거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그대들의 가산과 지배권을 보호해주겠다. 이는 진류왕 전하의 결정이기도 하니, 사대부와 호족들은 이를 따르도록 하라.”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충성을 요구했다.
그리고 또한,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증거로서 연판장에 이름을 적을 것을 요구했다.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요구로군!”
“계속 가산을 털어 지원해주었거늘, 이런 배은망덕한 처사가 있는가!”
창검을 들이밀면서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조의 강요에 사대부와 호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연주의 토착세력을 누르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이치와 계산에 능한 사대부와 호족들은 그런 조조의 내심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연주 땅을 지켜온 자신들을 발밑에 두려는 조조의 의도는 실로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변양을 비롯한 토호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맹덕! 한 줌의 권세를 얻었다고 하여 전횡을 일삼다니, 정녕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사대부와 호족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원로였던 변양이 조조를 향해 일갈했다.
연주에서 손꼽히는 명사답게,
변양은 연주를 발판으로 천하를 도모하려는 조조의 야욕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면 필시 앞으로도 계속 무리한 요구들을 해 올 터. 전쟁을 벌일 때마다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등골이 휠 정도의 자금과 곡량들을 요구해 올 게 틀림없었다.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연주를 위협하던 도적 떼들이 모두 물러 갔으니 더 이상 물자를 지원하지 않을 걸세!”
좌중에 모인 사대부와 호족들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 이성휘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중원제일 검이 살의를 발산하자 거칠게 분기를 토해내던 사대부와 호족들은 아연실색한 모습을 보이면서 크게 두려워했다.
“지방 유지들 따위가 감히 진류왕 전하와 정동장군의 뜻에 거역하겠다는 건가.”
이성휘는 분기를 못 참고 벌떡 일어난 인원들의 면면을 노려보면서 위압을 드러냈다.
연주를 지키고자 목숨 바쳐 싸웠거늘,
황건적과 흑산적 대군이 물러나자 입을 싹 닦고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사대부와 호족들의 뻔뻔함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를 죽여라, 이 무뢰배 같은 놈아!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칼잡이답게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는구나!”
위압에 질려 복종하려는 호족들을 가로막으려는 것처럼 변양이 벌떡 일어나 이성휘를 향해 소리쳤다.
두 팔을 좌우로 크게 펼치면서,
도적 떼들을 도륙했던 것처럼 이 늙은이도 한 번 죽여보라며 목청을 높였다.
변양의 외침에 이성휘는 조조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조조의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 목을 칠 기세였다.
“귀관, 물러서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내저으면서 입을 연 조조의 제지에 이성휘는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이만 가도록 하세!”
호기를 드러낸 변양은 자신을 따르는 일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반면 좌중에 남은 인원들은 조조가 내민 연판장에 자기 이름을 적으면서 충성을 맹세했다.
칼자루를 쥔 쪽은 조조군이다.
수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는 조조 군은 연주의 패자가 되었으며, 또한 사대부와 호족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류왕 전하와 정동장군에게 복종하겠소.”
“부디 정동장군께서는 우리 가문의 충정을 기억해주기를 바라오.”
사대부와 호족들이 조조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충성을 맹세했다.
충성의 대가로 허울에 불과한 관직과 지위가 내려질 뿐이었지만 조조 군의 병장기가 두려웠던 사대부와 호족들은 결국 위압에 못 이겨 복종해야 했다.
“그대들의 충정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겠네. 이 연판장에 적힌 충신들의 이름을 꼭 기억하도록 하지.”
변양 일파를 제외한 사대부와 호족들로부터 충성을 받아 낸 조조는 연판장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 이성휘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었다.
“맹덕 님.”
“말하게, 귀관.”
조조의 허락에 이성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필시 사대부와 호족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을 겁니다. 특히 변양과 그 일파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맹덕 님께 반기를 들겠지요.”
그 말에 조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왜 아니겠는가. 토호들의 눈에 이 조맹덕은 천하의 도둑년처럼 보일 테지. 갑자기 군세를 몰고 나타나서 자금과 곡량들을 모두 내놓으라며 강압하고 있으니 말일세.”
토호들의 눈에는 황건적과 다를 바 없을 걸세, 라며 조조는 쓴웃음이 섞인 말했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성휘의 말에 조조가 답했다.
“본격적인 난세가 도래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연주의 토착세력을 길들이려는 것일세. 태풍이 코앞에 들이닥친 상황에 놓였을 때 대비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태풍이 오기 전에 미리 대피를 해 두어야지.”
낙양 내전에서 결국 동탁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무맹도위 정원은 사망.
부하이자 수양딸이었던 여포의 손에 참살되어 목이 잘렸다.
낙양 군단에 이어 정원군마저 흡수한 동탁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대군벌에 등극했다.
황실과 조정을 손아귀에 틀어쥔 동탁이 마침내 20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는 대군벌이 되었으니, 필시 지방에 할 거하는 군벌들을 통제하려 들 것이었다.
‘결국 여포가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동탁 군에 투항할 줄이야….’
이성휘가 기억하는 여포는 무인으로서의 무명과 자존심을 중시하던 여인이었다.
무업(武業)을 향한 열망을 두른 여걸.
무인의 드높은 기개와 기상을 크게 떨치면서 흉포한 용력을 휘둘러 온 여장부였다.
그런 그녀가 설마 지금까지 쌓은 무명과 무업을 모두 내던지는 패륜을 결국 저지르게 될 줄이야.
물론 양부를 살해하고 동탁 군에 투신하는 것이 본시 역사의 순리였겠지만,
난폭하고 사나운 모습을 보이 되 정정당당함을 강조했던 여포의 행동을 기억하는 이성휘는 다소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적에 맞서기 전에, 먼저 내부를 단속하려 하네."
조조가 말했다.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감히 내 사랑하는 이에게 더러운 망발을 지껄인 늙은이놈을.
당사자인 이성휘는 크게 괘념치 않는 모습을 보인다고는 하나, 조조는 결코 그 늙은이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놈의 처자식들은 물론, 그 일가친척들까지 모두 멸절하여 모욕에 대한 값을 철저히 받아 낼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