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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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측근들과 함께 최대한 빨리 수적떼들의 배를 타고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했다.
야음을 타서 사수를 건넌 뒤,
백파적이 점거한 하동군(河東郡)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말을 타고 병주로 철퇴한다.
다소 큰 위험이 따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동탁 군에 의해 모든 길목들이 봉쇄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원은 호재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수(汜水)의 수적떼에게 의탁하기로 했다.
“도위, 수적떼의 두령 흑건이 도위의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교섭을 무사히 성사시켰다는 호재의 보고에 정원은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적들은 설마 한 척의 배도 보유하지 못한 아군들이 수로를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갈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치 못했을 터.
지긋지긋한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들을 두고 도망쳐야 한다는 것에 회한과 비참함을 느꼈지만, 정원은 다시 병주로 돌아가 상경군을 일으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수적들이 이르기를, 짙게 깔리는 새벽의 물안개에 숨어 이동한다면 결코 동탁 군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겠네. 최대한 서둘러 준비토록 하지.”
호재를 위시한 백파적 두령들과 의논을 거친 정원은 자기 심복들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다.
무려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들을 사지에 내던진 채로 탈출하는 일이다. 만약 장졸들이 이를 알게 된다면 필시 끔찍한 하극상이 벌어질 터였다.
정원은 백파적 두령들을 부른 자리에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의견을 전달했다.
“도위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장양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정원에게 가세했다.
적들에게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 두려워 정원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허면 비장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장양이 물었다.
여포는 병주 제일의 맹장이며,
또한 무맹도위 정원의 수양딸이다.
군영에서 살벌한 파행을 겪었으나 여포는 정원군에 있어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무쌍의 용력을 갖춘 장수였다.
반목과 마찰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여포 같은 장수를 두고 떠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추.”
“예, 도위.”
정원의 부름에 양추가 대답했다.
“봉선에게 내 말을 전했느냐?”
“비장의 둔영으로 향했으나… 답이 없었습니다.”
양추의 대답에 정원은 노여움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여포가 끝내 화해의 손길을 거절했다.
완고한 자존심에 큰 균열이 생겼는지, 수양딸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거센 분노를 토해냈다.
“이 양부는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대업을 위해 온갖 치욕을 감내하고 있거늘, 딸이라는 것은 양부의 마음에 계속 대못을 박는다는 말이냐! 방약무인하기 이를 때가 없구나!”
포위망을 피하여 병주로 향하려는 양부의 곁을 목숨을 다해 보필하지는 못할망정, 잠깐의 혈기와 의기를 참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여포의 행동에 정원은 크게 노성을 내질렀다.
“장양, 양추. 측근들을 모두 소집해라. 오늘 새벽에 군중을 빠져나갈 것이다.”
“도위, 허면….”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휘하 장졸들에게 사실이 알려지면 군중에 큰 자중지란이 벌어질 터. 필시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면서 배를 뒤엎으려고 들 테지.”
지체할 수록 크게 불리해진다.
동탁 군이 언제 급습을 가해 올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사실을 듣게 된 장졸들이 하극상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기에 정원은 최대한 빨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차마 두고 떠날 순 없었는지,
정원은 재차 양추를 보내어 여포를 설득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일세. 마지막으로 설득해 보게.”
“알겠습니다, 도위.”
그에 양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 *
하지만 결국 여포는 끝내 오지 않았다.
장졸들을 사지에 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장졸들을 사지에 버려 둔 채 도망치려는 양부가 노여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정원은 심려에 찬 한숨을 내쉬면서 부하들과 함께 수적들이 기다리고 있을 나루터로 향했다.
“물안개가 짙고 삼엄하여… 배를 타고 이동하면 동탁 군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겠군.”
이른 새벽에 나루터에 도착한 정원은 수적들이 했던 말대로 뿌연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새벽녘의 강은 매우 조용하고 정숙했다.
물고기가 펄떡 뛰어오르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헌데 어찌하여 양추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여포를 설득하러 떠난 양추가 돌아오지 않았다. 정원은 그를 수상하게 여겨 장양에게 물었다.
그에 장양은 양추가 여포의 둔영으로 향한 이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답했다.
“정녕 그 말이 사실이냐! 설마 봉선이 기어코…!”
군영에서 파행을 일으키며 불만을 토해냈던 여포가 설득을 위해 둔영으로 온 양추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정원은 불안감에 찬 모습을 보였다.
“일단 어서 나루터로 가시지요! 두령들이 수적떼와 함께 도위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장양이 크게 당혹스러워하는 정원의 팔을 애써 이끌면서 말했다.
양추의 행방이 묘연해졌으나,
지금은 우선 배를 타고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나루터로 먼저 향한 백파적 두령들이 수적떼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터. 만사를 젖혀두고 일단 배를 타는 것이 먼저였다.
정원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는지,
장양과 휘하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배가 있습니다!”
“어서 서두르시지요.”
물안개를 뚫고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
정원과 휘하 장수들은 정박된 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적떼의 선박들이 분명했다.
갑판 위에는 이미 백파적 두령들이 약삭빠르게 오른 뒤였다.
그를 본 정원과 장수들은 서둘러 배에 타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차 재촉했다.
하지만 그때,
‘두두두두두두!!!’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전우들을 배신한 늙은이가 있다!”
“참살하라! 모조리 다 죽여라!!”
창을 든 기병들이 쏜살처럼 달려들더니 정원을 호위하던 근위대를 강타했다.
마갑을 두른 철기병이었다.
물안개를 뚫고 난입한 그들은 미처 급습을 예상치 못했던 정원 일행들을 쓸어발겼다.
“이, 이놈들! 봉선이 보냈느냐!!”
정원이 크게 일갈하면서 검을 뽑아 들어 자기 목숨을 노리던 기병을 벴다.
북방의 군웅으로 무명을 떨친 맹장답게 불의의 기습을 당했음에도 달려드는 기병들을 베어 쓰러트리며 용전을 벌였다.
“화해를 청하러 간 양추를 죽이더니, 이제는 이 양부의 목숨마저 노린단 말이냐…! 이런 패악 무도한 년이!!”
정원을 뒤따라온 100여 명의 인원들은 안개를 뚫고 달려온 기병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뒤이어 보병들이 가세하였다.
날카로운 창검을 든 보병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던 정원의 심복들을 살해했다.
전우를 사지에 내버려 두고 살길 찾겠다고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배신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다고 말하듯이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무…, 문원!”
정원이 이를 빠득 갈면서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걸어온 흑발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수많은 인원들을 참살했는지,
그녀의 새하얀 갑옷은 붉은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푸른 눈동자.
핏물로 물들어 버린 새하얀 뺨.
검의 혈조(血漕)를 타고 칼끝으로 떨어지는 핏물까지.
꿈에 나타날까 무서운 귀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전우들을 배신하셨습니까, 주군.”
장료가 물었다.
그에 정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답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양추를 보내어 재차 설득하려 하였거늘…, 네년들이 결국 대의를 저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역심마저 품고, 양추를 살해한 데 이어 주군인 나를 시해할 셈이냐!”
사방에서 들리는 끔찍한 비명 소리.
그것은 곧,
정원군의 몰락을 의미했다.
병주로 귀환하여 다시 낙양을 도모하기 위한 상경군을 일으키려 했었건만, 결국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무너지게 되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들조차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시는 주군께서 천하를 거머쥐신다고 한들, 그 천하가 몇 년이나 가겠습니까. 주군은 천하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십니다.”
“이, 이 계집년이…!!”
장료의 싸늘한 비난에 정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온몸을 피로 물들인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원을 전율케 만들었다.
“멀리는 도망 못 쳤네, 양부.”
물안개를 뚫고 달려온 방천화극을 든 금발의 여인이 정원의 발치에 무언가를 던졌다.
핏물을 뒤집어쓴 장양의 머리였다.
단칼에 목을 베어 버렸는지 장양은 경악에 찬 표정을 한 채로 혀를 길게 내밀고 있었다.
“여봉선, 네 이년!!”
끝까지 정원의 곁을 보필했던 장양이 결국 여포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장양의 수급임을 확인한 정원은 크게 소리치며 여포와 장료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양부인 내게 대든 것으로도 모자라… 양부를 배신하는 패륜까지 저지른단 말이냐! 내가 지금껏 금수만도 못한 년을 키웠구나!!”
정원의 일갈에 여포가 두 눈을 부릅떴다.
“배신은 네놈이 먼저 저질렀지. 부하들을 죄다 사지에 내던지고 저 혼자 살겠다며 달아난 필부. 지금까지 네놈 같은 필부를 양부랍시고 받들었던 내 자신이 한심할지경이야.”
“가, 감히…!!”
방천화극을 든 여포가 정원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우들을 배신한 변절자를 처단하겠다.”
병주의 비장(飛將)으로서.
북방을 호령했던 정원군의 선봉장으로서.
무인의 기개와 명예를 저버린 필부를,
장졸들의 신뢰와 기대까지 땅에 내던진 채로 살길을 찾아 달아나려 했던 배신자를 처단하려 한다.
“죽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여포가 방천화극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핏빛으로 빛나는 창끝.
당장에라도 늙은 늑대의 목을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아아아아!!”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는지 정원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검은 닿기도 전에,
늙은 늑대의 가슴에 방천화극이 꽂히게 되었다.
“카헉!!”
뜨겁게 용솟음치는 가슴을 꿰어 버리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여포는 두 눈에 차가운 분노를 담은 채 양부를 향해 일격을 내질렀다.
이미 각오를 깊이 새겼는지, 결연함이 느껴지는 두 눈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정원 일행이 비장 여포의 습격을 받은 것을 두 눈으로 본 백파적 두령들은 다급히 현장에서 달아났다.
제발 배에 태워달라며 정원을 따르던 장수들이 목 놓아 소리쳤으나 이미 떠나버린 배는 결코 되돌아오지 않았다.
뱃머리가 향한 곳은 하내군(河內郡).
기이하게도 백파적 두령들이 향한 목적지는 하동군이 아닌 하내군의 나루터였다.
“아으, 추워 죽겠네. 하필이면 새벽으로 시간을 잡아가지곤….”
선박에서 내린 두령들의 모습을 확인한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투덜대면서 말했다.
싸늘하게 피어난 물안개.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매우 쌀쌀한 날씨였다.
동탁 군 무관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향해 백파적의 두령들이 다가왔다.
“저, 정원은 죽었소!”
“수양딸 여포의 손에 죽는 광경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소이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늘씬한 두 다리를 뻗으면서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은 비장 여포가 무맹도위 정원을 살해했다는 보고에 두 눈을 반짝였다.
“여포가 정원을 죽였다고요?”
“그렇소! 분명하오!”
“음….”
양봉의 악에 받친 대답에 여인은 ‘내 계략이 빗나갈 줄이야….’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정원이 죽었으니 큰 활약을 한 셈이지만,
여인은 자신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계략에 큰 변동이 벌어졌다는 것에 불쾌하게 여겼다.
‘이건 정말 예상 밖이네요. 설마 여포가 제 양부를 죽일 줄이야…. 분명 그녀는 무명과 명예를 중시하는 성격이었을 텐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도톰한 입술을 쿡쿡 찌르면서 고심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녀를 잘못 생각한 걸까.
무명을 중시하는 그녀의 성정이라면 분명 무맹도위 정원과 함께 움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통하게 된 백파적을 동원하여 정원과 여포를 수적떼로 위장한 동탁 군의 배에 태운 뒤, 하내군의 나루터로 유인하여 단숨에 교살하려고 했다.
“가후 님.”
무관이 다가왔다.
그에 가후라는 이름의 여인은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손을 내저었다.
“허탕이네요. 다들 철수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가후의 명령에 무관이 높게 치켜든 붉은 깃발을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커먼 그림자들이 서서히 일어섰다.
사수 강가에 빽빽하게 솟은 갈대밭에 매복하고 있던 1천 명의 병력이었다.
강노병과 중장보병을 비롯하여 비장 여포를 사냥하기 위한 동탁 군의 정예부대들로, 가후는 일기당천처럼 낙양 전선을 크게 휩쓸고 다녔던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1천 명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비장 여포…. 아깝네요, 그 용맹한 비장을 부디 제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요.”
안타까움에 찬 숨결을 흘리며,
타액에 젖은 혀로 손가락을 슬쩍 핥았다.
마치 사내의 그것을 애무하는 듯한, 요염함이 깃든 눈길로 음란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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