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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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호의 기회를, 천재일우의 상황을 우연찮게 잡았음에도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입술에 자기 자국을 새기지 않은 것은 ‘아쉬움’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애절함과 안타까움에 찬 아쉬움.
왜 그때 용기를 내어,
연모하는 남자의 입술을 훔치지 않았냐며….
다음에는 기필코 빼앗고 탐하겠노라는,
그가 만약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탐닉하겠다는 목적의식을 후일의 자신에게 새기기 위해서였다.
‘만약 제가 그대로 애절한 분위기에 휩쓸려서 결국 입맞춤까지 했다면… 과연 성휘는 저를, 힘과 권력에 집착하는 괴물인 저를… 과연 받아줬을까요?’
혹시라도 만일,
그 사람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입맞춤했다면 육욕(肉慾)에 못 이겨 나를 탐하려 하지 않았을까?
동백꽃들이 핀 꽃밭에 나를 쓰러트린 채,
의복을 찢어발기듯 거칠게 잡아 뜯으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남성으로 나를 힘껏 눌러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어 버렸다면…,
나는 과연 육욕에 달아오른 그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었을까.
‘무, 무슨 생각을…!! 성휘는 자상하고 정직한 성정의 대장부예요! 여자를 강제로 취하는, 혈기에 못 이겨 그릇된 행동을 할 남자가 아니라고요! 게다가….’
뇌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망상을 그려 나가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파렴치하고 음란하기 짝이 없는 망념.
무심코 떠올려 버렸다.
“본초 님.”
“아, 예… 이제 그만 귀환하죠.”
“알겠습니다!”
안량의 우렁찬 부름에 짙은 상념에서 깨어나게 된 원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귀환 명령을 내렸다.
이제 다시 기주로 돌아간다.
발해군으로 돌아가, 기주 지역을 제패하기 위한 대업을 속행할 것이다.
아쉬움에 찬 눈길로 고개를 돌려 진류군을 바라본 금발의 여인은 이내 확고한결심을 내린 듯, 결연한 눈빛을 지으면서 휘하 병마들을 재촉했다.
“발해군으로 돌아가죠.”
원소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새하얀 갈기의 백마가 위풍당당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속력을 냈다.
‘머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이미 안배는 마련해 뒀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금발의 여인은 아쉬움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풋풋한 사랑을 나눴던 이와
가까운 시일 내로 다시 재회하게 될 것을 믿으면서 망설임을 떨쳐 냈다.
당장의 이별에 슬퍼하는 것은 연약한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나약함일 뿐이었으니까.
* * *
발해군에서 출병하여 연주의 흑산적 토벌에 참전했던 원소가 마침내 병마들을 이끌고 회군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늠름한 자태를 뽐내면서 병마들을 지휘하는 원소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뜨거운 용맹함과 차가운 냉혹함을 겸비한 여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성휘는 어젯밤의 아찔했던 시간을 떠올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귀관.”
“예, 맹덕 님.”
조조의 부름에 이성휘는 상념을 떨쳐 낸 채 발걸음을 움직였다.
연주를 제패한 그녀를 따라,
천하를 도모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할 때였기에.
원소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겨둔 채 망설임 없이 떠나갔듯, 이성휘 또한 미열처럼 애잔하게 마음을 데우고 있는 마음을 간직한 채 본분을 이어 나갔다.
“연주성으로 거점을 옮겨 세력권에 둔 영토들을 온전하게 편입시키는 것과 동시에, 소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주(豫州)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1차 목표는 예주 북부에 위치한 영천군(穎川郡)이 되겠군.”
“예, 그렇습니다.”
조조와 원소의 목표는 낙양 내전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앙 권력을 거머쥔 거대 군벌의 출현.
황제와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군벌이 향후 출현하게 된다면 필시 황명을 내세워 제후와 군벌들을 억지로 통제하려 들 터.
조조와 원소에게는 중앙 조정의 통제에 거역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 귀관….”
“예.”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의논하던 중,
흑발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보내면서 이성휘를 쳐다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이성휘는 잠자코 조조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본초와… 아무 일, 없었나?”
원소가 발해군으로 귀환하기 위한 출병 준비를 할 때부터 조조는 계속 이성휘의 동태를 살폈다.
한쪽으로 몰린 가자미눈이 될 것처럼,
빈번한 곁눈질로 이성휘의 분위기를 살피던 조조는 결국 그의 심중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하면 분명 크게 언짢아 할 텐데…. 그렇다고 함구하기도 그렇고.’
주군의 물음에 이성휘는 확답을 내릴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대로 낱낱이 고해야 할까.
아니면 끝내 입을 다물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던 이성휘는 결국, 조조에게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이성휘의 대답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원양, 5천의 병력을 맡기겠다. 연주성의 주변 지역들에 산재된 불온한 무리들을 모두 토벌해라.”
“알았어, 맡겨만 둬.”
조조의 명령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제 가슴을 툭 치면서 대답했다.
여전히 많은 도적 떼들이 연주 지역에서 항거를 일삼고 있었다.
집단을 이끌던 두령들을 참하였으나,
그 산하에 있던 도적 떼들은 초가집 지붕에 숨은 빈대처럼 끈질기게 기승을 부렸다.
연주의 치안을 악화시키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는 도적 떼들을 뿌리 뽑기 위해서 조조는 친족들을 동원하여 모조리 추살하려 했다.
“부르셨습니까.”
하후돈에 이어 조인이 주군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기 위해 다가왔다.
짧은 단발을 기른 묘령의 여인.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답게 조인 또한 조조와 조홍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미용과 미장을 꾸미는 여성다움을 등한시한 채,
무인으로서의 의무와 직분만을 강조하는 강직한 성정이었던 조인은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기를 좋아하는 조홍과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평상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게 어려울 정도로 갑옷만 고집하는 것 같은데. 설마 갑옷을 입은 채로 자는 건 아니겠지?’
항상 갑옷을 고집하는 흑발의 여인을 힐끗 쳐다본 이성휘는 예쁜 보석처럼 빛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조조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효.”
“예, 언니.”
“부관과 함께 병마를 이끌고 연주성에 입성하여 동군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도적 떼들에게 번번이 침탈을 겪어온 동군 백성들은 다시 도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에 조조는 이성휘와 조인을 투입시켰다.
중원제일 검으로 무명이 높은 이성휘와 기오현 전투에서 큰 활약을 거둔 조인.
이성휘와 조인이 병마를 이끌고 연주성에 입성하면 동군 백성들 또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원양은 물론, 요즘은 자렴도 부관에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보냈었지….’
조조는 처음부터 이성휘에게 깊은 호감을 표시했던 하후돈은 물론, 매번 날카로운 경계심을 드러냈던 조홍까지 요즘 이성휘에게 호감에 찬 모습을 보이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후돈도,
그리고 조홍도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도둑고양이처럼 보이기 시작한 사촌들이 부관의 마음을 가로챌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조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생인 조인을 적임지로 선택했다.
* * *
정원군에게 승기가 기울었던 낙양 공방전은 하내도위(河內都尉) 왕광의 거병과 함께 일방적으로 향하던 승세가 뒤집히게 되었다.
무맹도위 정원이 이끌던 군세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마치 독 안에 든 시궁창 쥐가 된 듯,
사예주의 군벌과 지방관들이 정원군을 노리기 시작했다.
“잡아라! 저기 역적이 있다!”
“사예주 백성들의 철천지원수 같은 백파적과 손을 잡은 역적이다! 반드시 그 목을 쳐라!”
소수의 병력으로 움직이는 유격대처럼 사예주의 군벌과 지방관들이 이끄는 병력이 정원군의 측면과 후미를 들이쳤다.
거점들을 차례대로 공격한 것은 물론,
병주에서 낙양 전선으로 수송되던 정원군의 보급대까지 급습해 버렸다.
장졸들을 먹일 병량을 비롯하여 군마를 먹일 마초마저 밑바닥을 드러내게 된 정원군은 큰 낭패에 당하게 되었다.
특히 기병부대에 많은 치중을 두고 있는 정원군에게 있어 군마를 먹일 마초가 부족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으로 작용했다.
“약탈 밖에 모르는 저 빌어먹을 백파적 놈들과 손을 잡은 것부터가 화근이었습니다!”
“놈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사예주의 민심이 우리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겁니다!”
정원군의 무장들은 승승장구하던 전세가 단번에 역전된 패착이 백파적과의 동맹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예주를 중심으로 살인과 약탈, 방화를 일삼은 백파적과 동맹 관계를 맺었기에 사예주의 군벌과 지방관들이 바둑돌 뒤집듯이 단번에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봉선 님, 장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대로 전투를 속개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장료는 정원에게 불만을 품은 장졸들이 반란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며 우려를 보냈다.
사예주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기세등등하게 승기를 점하면서 무리한 공세를 가하던 정원군은 수세에 몰리고서야 자신들이 포위당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실로 대담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수도를 미끼로 한 연환계(連環計)라니.
고도의 전술들이 한꺼번에 동원된 판짜기에 제대로 걸려 버렸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돼. 아니면 정면 돌파를 감행하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여기서 다 죽을 뿐이야.”
여포는 맹수 같은 날카로운 직감을 발휘하여 적들이 서서히 아군의 목을 죄어오고 있음을 간파했다.
전술과 전략을 모르는 문외한이었지만,
사선을 넘나들며 터득했던 백전(百戰)의 직감이 있었다.
적들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물쩍대며 결정을 미루다간 적들이 던진 올가미에 목이 붙잡힌 채 죽게 될 테니까.
“봉선 님!”
여포가 장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무맹도위 정원을 향한 불만을 토로하던 휘하 무관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소장들이 의지할 사람은 비장 밖에 없습니다.”
“백파적 따위와 동맹을 맺은 무맹도위와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습니다. 비장께서 부디 소장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패착과 화근을 불러일으킨 정원의 어리석은 행동에 크게 실망한 병주 출신의 무관들은 여포에게 의탁하려 했다.
적들의 급습에 병참이 끊어졌다.
심지어 병사들의 사기까지 바닥을 치게 된 불리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에 장졸들은 여포의 압도적인 무위에 희망과 기대를 품었다.
무수히 많은 적들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을 무너뜨렸던 그 가공할 정도의 무위라면 이 불리한 국면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군세를 재정비하고 내 명령을 기다려. 내가 선봉에 서서 포위망을 뚫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무관들에게 출진 명령을 내린 여포는 장료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에 장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봉선 님. 고순 장군과 함께 군세를 정비하고 있겠습니다.”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하는 여포를 지원하기 위해 장료는 고순이 있는 군진으로 향했다.
여포 또한 출진을 위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여포의 휘하 무관이 다가왔다.
“봉선 님.”
“왜?”
여포가 묻자 무관이 머뭇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겁대가리 없이 당당하게 군문까지 와서는 봉선 님을 뵙겠다는 놈이 있습니다. 동향 출신이라면서 말입니다.”
“나하고 동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동탁 군의 끄나풀처럼 보였습니다.”
불리한 척 속임수를 부리면서 아군을 제대로 엿먹인 동탁 군의 개가 혈혈단신으로 군문까지 왔다는 말에 여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내 앞에 데려오기나 해 봐. 동탁 군의 개가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지껄이면 바로 목을 쳐 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한 여포는 방천화극을 들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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