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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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편린이 쏟아졌다.
그 남자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 또한 기분을 좋아졌어야 했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가라앉았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질투? 시기? 어쩌면 두 감정들 모두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시커먼 감정.
그것은 분명 질투의 감정이 틀림없었다.
열등감과 모멸감.
남몰래 연모하는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품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분했다.
‘분명 그 사람은…, 내가 아닌 맹덕을 연모하는 거겠죠. 이제야 이해가 돼요. 훨씬 좋은 조건들과 우대를 약속했음에도, 내가 아닌 맹덕을 선택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네요.’
격렬하게 요동치는 가슴을 움켜쥔 원소는 이성휘를 포섭하기 위해 끊임없이 접근했던 자기 노력이 한낱 허사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몇 번이고 손을 뻗었던 상대가 사실 다른 여자, 자기 오랜 벗을 연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원소는 질투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후우….”
분노와 모멸감에 찬 한숨을 깊게 토해낸 원소는 머리를 식힐 겸, 찬 바람을 쐬기 위해 바깥을 출입했다.
“본초 님.”
이른 저녁에 처소 바깥으로 나서려는 원소의 행동에 호위를 담당하고 있던 문추가 다가왔다.
그에 원소가 입을 열었다.
“내일 발해군으로 귀환하겠어요. 장군, 채비를 부탁합니다.”
“존명.”
“저는 잠시 산보를 다녀오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멀리 나가진 않을 테니.”
원소는 문추에게 지침을 전달한 뒤, 10여 명의 근위병들을 대동한 채 저녁 산보를 나섰다.
그녀의 오랜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심정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은은한 광휘를 내뿜는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 아래를 정처 없이 걷고는 했다.
‘맹덕이 아니라 제가 먼저 다가섰다면… 제가 먼저 그 남자를 알게 되었다면, 맹덕이 아닌 저를 연모의 대상으로 바라봐줬을까요?’
입술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만약 나를 연모하게 되었다면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을까?
이 세상에 ‘만약’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클수록,
사람들은 항상 만약, 이라는 무지몽매한 경우를 쫓기 마련이다.
‘본초 님,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제게서 3보 이상 떨어지지 마십시오.’
원소는 서글픔에 찬 눈꺼풀을 슬며시 내리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구원을 떠올렸다.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눈 채 송현에서 살육을 일으켰던 살수들로부터 나를 지켜 준 은인.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당장 꺾일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든든하게 지켜 주었던 사내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 연약함에 떠는 한 명의 소녀가 된 것 같았죠.’
천하에 명성을 떨친 원본초가,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소녀가 되어 버린 날.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자기 한계와 무력함을 깨닫게 된 날이면서도, 동시에 진심 어린 사랑을 느끼게 된 날이었으니까.
천하에 명성과 위용을 떨친 여걸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여인.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지켜 주는 사내에게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온 순정을 빼앗기는 것은 다를 게 없었다.
“읏.”
흑단처럼 풀어헤친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를 하늘하늘 걷던 여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찔할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을 품고 있는 동백꽃들이 화려하게 만개한 정원이었다.
동백꽃들이 만개한 정원의 정중앙에 자리하는 한 정자. 이성휘와 조조가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불쾌감에 가까운 질투를 일으키게 만든 현장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 장소에 도달한 걸까.
금발의 여인은 항상 투철한 이성을 추구하던 자기 머릿속이 바닥에 무심코 내던져진 실타래처럼 엉켜가는 것을 느꼈다.
“제가 어째서 이곳에 발걸음을….”
참으로 우스운 말이었다.
본인이 자기 스스로,
제 발로 걸어와놓고 딴소리를 하다니.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애틋하게 사랑을 나눴던 공간에 제 발로 와버린 원소는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면서 발걸음을 황급히 돌리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이 종착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밤하늘 아래를 하늘하늘 걸었던 발걸음이 동백꽃들이 화려하게 핀 정원에 우뚝 선 채였다.
‘미, 미쳤지! 제가, 제가 미쳐 버린 게 분명해요.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미쳐 버리지 않고서야…!!’
금발의 여인이 잘 익은 앵두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손을 강하게 움켜쥔 채,
오늘따라 유독 쓸쓸하고 연약해 보이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사람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 벗을 질투해서, 진심 어린 사랑을 받은 벗을 내쫓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동백정에 발걸음을 향한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심중에 품고 있는 자기 시커먼 욕망을 대면하게 된 원소는 투철한 이성을 잠시 침식시킬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본초 님?”
“히약!”
모멸감에 찬 상념에 빠진 채 동백정으로 발걸음을 향한 원소는 자신을 부르는 남성의 목소리에 격한 반응과 함께 귀여운 비명 소리를 냈다.
원본초의 비명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새된 목소리의 귀여운 비명이었다.
“놀라게 하여 죄송합니다.”
“다, 당신이… 당신이 왜 여기에….”
이미 동백정에는 선객이 있었다.
그 선객은 금발의 여인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방금까지 그 얼굴을 아련하게 떠올리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오게 되었습니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동백꽃들이 화려하게 만발한 정원의 중심에서,
원소는 뇌리에 그리던…
연모하는 상대와 만나게 되었다.
결코 뜻하지 않았던,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을 성사하게 된 원소는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이 지금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질투와 시기에 빠진 나머지 허영을 만들어 버린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반응이었다.
“…정말로 중원제일 검인가요.”
“예?”
금발의 여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이성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찔렀다.
탄탄한 근육들이 느껴지는 가슴팍.
헛것이 아닌 실체다.
오늘 낮에 보았던 그 사람이 분명했다.
“본초 님, 무슨 일이십니까!”
멀리서 호위를 서고 있던 무관들이 원소의 새된 비명 소리를 듣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관들의 목소리와 기척을 들은 원소는 여전히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보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 근위병들은 잠시 호위를 느슨하게 서주세요.”
“알겠습니다.”
어두운 저녁이었기 때문에 동백정에 있는 이성휘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했는지,
가까이까지 다가왔던 근위병들이 원소의 명령에 따라 동백정에서 일제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호위를 섰다.
“본초 님?”
굳이 근위병들을 먼 곳에 두어 남녀 간의 밀회처럼 보일지도 모를 위험성을 높이는 원소의 행동에 이성휘가 의문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에 원소가 입을 열었다.
“중원제일 검은 설마, 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불편한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괜찮겠네요.”
항상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이성휘와 단둘뿐인 상황이 된 원소는 억지에 가까운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다소 뻔뻔해 보이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은 금발의 여인은 이성휘를 슬쩍 곁눈질하고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분명 방금 전까지 기분이 울적했는데… 이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활력이 돋다니.’
수줍게 웃음 지었다.
그와 단둘뿐인 이 상황이,
이렇게 아름답고 근사한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이 상황이… 입가에 계속 헤픈 웃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너무도 좋았다.
‘크흠! 큼큼! 참아요. 참아야 해요. 계속 헤픈 미소를 지으면서 헤실헤실 웃었다간 분명 헤픈 여자처럼 보일 테니까.’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만약 강아지처럼 엉덩이에 꼬리가 달렸다면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었을 정도로 그녀는 남몰래 연모하는 이와의 만남을 기뻐하고 있었다.
“헌데 본초 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잠시 머리가 복잡해서 찬 바람을 쐬려고요.”
원소는 이성휘를 향해,
‘당신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거라고요!’라고 일갈하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장난을 치고 싶은 본능을 애써 억누르면서 입을 다물었다.
“저기, 중원제일 검.”
“…성휘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이성휘는 자신을 계속 낯간지러운 별명으로 부르는 원소를 향해 조심스럽게 정정을 요청했다.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는 허락에,
원소는 뜻밖의 고백받은 것처럼 온몸을 움찔 떨었다.
갑작스러운 경우를 경험하게 되면 근육이 수축되고 솜털들이 곤두서는 것처럼, 원소는 이름으로 불러 주기를 원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서…, 성휘….”
“예.”
자기 부름에 응하는 이성휘의 대답에 원소는 질투에서 비롯된 고독에 잠겨 있던 자기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우으으…!!
무심코 앓는 신음을 냈다.
“성휘에게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이성휘가 허락하자,
원소는 각오를 다지려는 듯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성휘는 맹덕을… 한 명의 이성으로서 연모하는 건가요?”
“…….”
그 말에 이성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는지 과묵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주군을 연모하고 있다는 말을…
그녀의 친한 벗이자, 훗날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툴 숙적이 될 여성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성휘가 선택한 대답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정의 침묵이 아닌 긍정을 뜻하는 침묵으로서 원소에게 전해졌다.
“불경하네요, 모시는 주군을 연모하다니.”
항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이성휘는 침묵한 채 압을 다물 뿐이었다.
하지만 원소는 이성휘를 힐난하거나, 트집을 잡을 목적으로 말을 꺼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이 남자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그녀가 진심으로 부럽고 질투가 날 뿐…. 그를 미워하거나, 그의 마음에 감정적인 부정을 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모습, 싫지 않아요.”
금발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면서 이성휘를 향해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깊은 장난기에 물든 눈빛과 함께,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리면서 그의 메마른 입술을 손으로 덮어 버렸다.
부드럽고 새하얀 손바닥이 입가를 감싸자 이성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잘 익은 과육처럼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입가를 자극했다.
“이건 목숨을 구해 준 답례… 그리고 낙양에서 헤어질 때, 다하지 못했던 이별 인사예요.”
그렇게 속삭인 금발의 여인은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으면서 자기 손등에, 마치 이성휘를 향해 입맞춤을 하듯이 그의 입가를 뒤덮고 있던 손등을 향해 입맞춤했다.
쪽.
입술에 닿지 않았으나 입술에 닿은 듯한,
입술에 닿은 것보다도 자극적인… 풋풋한 사랑으로 가득 찬 입맞춤이었다.
“후후. 불경한 접문이네요.”
빨갛게 물든 석류처럼,
남성을 향한 경애의 감정을 품은 미녀의 홍조가 새하얀 뺨에 깃들었다.
“주군을 연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휘는 또 한 번 불경한 짓을 저질러버린 거예요.”
두 눈을 부릅뜬 채, 붉게 물들어 버린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이성휘의 반응을 본 원소는 실웃음을 지으면서 기뻐했다.
조조가 이 남자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듯,
나 또한 이 무뚝뚝한 남자를 두근거리게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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