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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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유변와 양부로부터 새주(璽主)의 역할을 떠맡게 된 초선에게 전말을 듣게 된 이성휘는 혼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기존 궤도를 크게 벗어난 변칙.
일어날 수 없었던 이례(異例)가 발생하게 되었다.
본래 역사에 따라 전국옥새는 손씨 가문을 거쳐 원술에게 양도 되어야 했다. 하지만 황제와 하남윤이 연주 진류군으로 피난하는 진류왕 유협의 전속 시녀였던 초선에게 맡김으로서 변곡점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옥새를 도둑 맡거나… 천하에 전국옥새의 행방이 누설되게 된다면 어떤 낭패를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유협과 궁인들이 거처하는 진류태수의 치소는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했다.
병사들이 철통 같이 호위하고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담벽이 협소하여 외부 침입에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유협과 궁인들을 위해서라도, 황제 유변이 맡긴 전국옥새를 계속 은닉하기 위해서라도 궁궐에 버금가는 번듯한 새것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인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길을 걷던 이성휘는 충차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궁궐을 지으려면 당연히 돈이 든다.
그것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요구될 것이었다.
진류군에서 거병한 이후, 연속적으로 전쟁을 치른 조조 군에게 천문학적인 비용을 댈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어림총사!”
떠안게 된 문제를 전전긍긍하며 고심하고 있을 때, 황금 투구로 유명한 흑발의 여인이 그를 부르면서 다가왔다.
* * *
조홍은 심기가 매우,
무척이나 불편한 상태였다.
자신에게는 항상 무뚝뚝한 모습들만 보여주던 사내가 여남원씨 가문의 불여우에게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하는 반응을 보였을 뿐 더러,
동백정(冬栢亭)에서는 언니와 애틋하게 애정을 나누는 모습마저 보였다.
가지고 노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풋풋한 처녀의 마음을 왜 이렇게 사정 없이 뒤흔든단 말인가.
‘그 사람도 언니도… 엄청 행복해 보였지….’
기주의 불여우에게 보여 준 모습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서.
쑥스러움에 물든 이성휘의 표정을 보게 된 조홍은 가슴이 쇠사슬의 억압을 받게 된 것처럼,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아픔의 감정을 느껴버렸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인데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닌지, 둘의 관계를 방해할 뿐인 방해꾼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흥! 이제부터 나도 신경 안 쓰면 그만이야! 천하에 남정네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좋다고 애원하는 남자들이 어디 한두 명인 줄 알아?!’
그러다가 이내,
조홍은 제 분에 못 이겨 씩씩 분기를 터트렸다.
씩씩대면서 질투에 찬 발걸음을 내딛던 조홍은 익숙한 얼굴을 보고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심각한 고민이 있는지,
무뚝뚝한 얼굴이 더욱 경직된 이성휘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조홍은 고민에 빠진 그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움직일 했으나, 이내 고개를 홱홱 저으면서 충동질을 시작한 연모의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아, 안 돼! 저 남자는 천하의 바람둥이야! 얼굴 좀 잘생겼다고… 능력 좀 좋다고 여자의 마음을 사정 없이 후리는 난봉꾼이라고!’
조홍은 복잡한 여자관계를 자랑하는 이성휘를 힘껏 매도하면서 결코 마음을 주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고민에 빠진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이성을 위협할 정도로 범람하게 되었다.
결국 조홍은, ‘그래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도 좋지 않을까.’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이성휘를 향해 접근했다.
“어림총사!”
그래,
이야기 정도는 들어 보자.
나는 쉬운 여자가 아니니까, 고민을 듣는다고 해서 절대로 도와줄 리가 없겠지만.
“자렴 님.”
이성휘가 고개를 들어 조홍과 시선을 마주했다.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조홍은 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 진짜 잘생기긴 했네…. 좀 잘생겼다는 말은 취소.’
이성휘는 분명 준수한 용모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세의 미공자 같은 수려한 용모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홍은 이미 콩깍지가 씌일 대로 씌어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이성휘가 절세의 미공자조차 울고 갈 정도의 수려한 미남으로 보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척 보기에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아무 일도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성휘의 대답에 조홍의 눈썹이 분노로 휘게 되었다.
뺨이 일그러지는 것은 물론,
예쁜 미간에 노기 섞인 주름이 생겨났다.
“나한테 말 못 할 일이라는 거죠?”
“그, 그건 아닙니다만….”
“흥.”
말끝을 흐리는 이성휘의 반응에,
조홍은 불만에 찬 콧방귀를 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근데 왜 나한테 쩔쩔매는 반응을 보이지? 이 목석같은 남자가 별일이네. 평소 같았으면 계속 무뚝뚝한 모습을 일관했을 텐데. 음….’
눈치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 조홍이었지만, 이성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큼은 족집게 수준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성휘의 과묵한 얼굴을 힐끗 쳐다본 것만으로도 그가 큰 고민을 떠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나한테 부탁할 게 있는 거네.’
말끝을 질질 끌면서 불안에 젖은 반응을 보이는 이성휘의 모습에 조홍은 어렵지 않게 정답에 도달했다.
그것을 알게 된 흑발의 여인은,
짓궂은 장난기에 찬 눈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 * *
진류군에 이어 동군을 점령하게 된 조조는 진궁과 의논하여 거점을 옮기려는 계획을 준비했다.
연주에 중심에 위치하는,
동군 복양현(濮陽縣)의 연주성이 새것점으로 확정되었다.
오랜 세월 도적 떼의 침탈을 받아온 연주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함이며, 또한 청주에 주둔하는 황건적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귀관의 생각은 어떤가.”
조조가 물었다.
그에 이성휘가 대답했다.
“훌륭한 명안이십니다. 맹덕 님께서 연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립한다면 연주 백성들 또한 많은 지지를 보낸 겁니다.”
이성휘의 칭양이 기뻤는지 그 말은 들은 조조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연주성을 거점으로 삼고자 함에는 망탕산에서 항거하는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려는 목적 또한 있네. 연주성에 자리를 잡는 즉시 연주를 위협하는 잔적들을 모조리 소탕할 것일세.”
요원지화(爎原之火)처럼 급속도로 세력을 넓히면서 확장한 까닭에 기반이 확립되지 못했다.
그래서 조조는 연주성으로 거점을 옮겨 기반을 굳히려는 의도를 보였다.
“언니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당연히 따라야죠.”
거점을 옮기겠다는 조조의 결정을 듣게 된 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진류군에서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궁궐에 버금가는 가택이 조금 아까웠지만 조홍은 그것을 별장으로 두기로 했다.
재물을 가득 쌓은 창고들이 무려 1천 칸에 달하며, 또한 연주의 재단사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다 소비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비단과 1만 명이 넘는 노복들을 보유하는 재녀에게 있어 진류군에 건설 중인 가택은 다소 출혈이 크지만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소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연주성에도 가택을 지어야겠네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조홍의 모습에 이성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모습을 놓칠 조조가 아니다.
요즘 들어 부쩍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듯한 이성휘와 조홍의 관계를 의심했다.
꼬투리가 잡힌 것 같다고 할까. 유독 이성휘 쪽에서 조홍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진류왕은 부임지인 진류군에 계속 둘 것일세. 황제가 부임지에 있는 연주 백성들의 위무할 것을 명하지 않았나. 부임지인 진류군을 벗어나 동군으로 거처를 옮긴다면 필시 의심을 받게 될 것일세.”
지지기반을 형성하기 시작한 조조에게 있어 유협의 존재는 명분과 정당성을 마련하는 권문(權門)과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존재만으로 큰 부담을 안기게 만드는 제약과 같았다.
조조는 진류왕을 추종하는 인재보다는 자기 대의에 동참해 줄 인재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작은 황녀를 옥좌에 옹립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허영의 상징으로 남으면 족할 뿐,
유협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진류군에 입성하여 연주 지역의 실권을 장악한 자기 호령을 뒤로한 채, 선황(先皇)의 혈육인 진류왕 유협에게 부복하면서 충성을 맹세했던 연주 사대부와 호족들의 모습을 본 조조는 유협을 향해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맹탁에게 진류왕의 보필을 부탁할 터이니 심려하지 않아도 되네. 맹탁은 천하가 의협심을 인정한 팔주(八廚)의 명사가 아닌가.”
낙양에서부터 작은 황녀와 친분을 쌓아온 이성휘를 배려한 듯 조조는 진류태수 장막이 유협을 보필할 것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장막은 의협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필시 목숨을 바쳐서라도 유협을 보필하겠지.
호탕한 성품을 가진 명사에게 보필을 맡긴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이성휘는 조조에게 예를 취한 뒤 자리를 뜨게 되었다.
“저도 일어나볼게요.”
조홍도 이성휘에 이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조조는 의구심을 느꼈다.
단순히 함께 자리를 뜨는 것에 불과했지만,
요즘 들어 부쩍 교분이 깊어진 모습을 보이는 이성휘와 조홍의 모습을 의심하게 되었다.
무고한 의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 * *
긴히 부탁해야 될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이성휘의 내심을 간파한 조홍은,
도리어 그것을 빌미삼아 이성휘에게 번번이 요구하기 시작했다.
“…자렴 님.”
“저한테 부탁할 게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당돌하게 말한 조홍은 낚아채듯이 이성휘의 팔을 붙잡으면서 팔짱을 꼈다.
팔을 감싸 안는 부드러운 살덩이.
마치 갓 지은 떡처럼 부드러운 거유가 팔을 감싸면서 따스한 온기를 품어냈다.
실로 안타까운 몸매를 가진 사촌과는 달리,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조홍은 육체를 통한 미인계를 성립시킬 정도의 풍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처럼 찬연한 용모,
비단처럼 부드러운 피부.
귀여운 얼굴과 쭉쭉 빵빵한 몸매를 가진 조홍은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육탄전에 가까운 파상공세로 이성휘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래서 저한테 부탁할 일이 뭐예요?”
조홍이 물었다.
그에 이성휘는 놀란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치이,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요. 당신은 뜻밖에 반응이 단순해서 알기 쉬워요.”
흑발의 여인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마치 사랑을 고백하듯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뻥긋 움직였다.
“…그래서 좋은 걸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조홍은 본인이 꺼낸 말이었음에도 부끄러웠는지, “으으으!!”하고 부끄러움이 섞인 침음을 터트렸다.
“아, 아무튼! 부탁할 내용이라는 게 뭐예요? 이렇게까지 사람을 애태우게 만들 정도라면… 분명 큰일이겠죠.”
“진류왕과 궁인들이 머물 거처가 필요합니다.”
“네?”
이성휘의 대답에,
조홍은 마치 뜬금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의아함에 젖은 반응을 보였다.
올해 여덟 살의 꼬맹이 황녀.
현재 진류태수의 치소에 머무는 황녀와 궁인들의 새것처를 마련해주려 하는 이성휘의 행동에 조홍은 물음표를 그렸다.
“뭐… 진류왕이 매우 남루한 거처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지만, 굳이 어림총사가 나설 정도의 일인가요?”
조홍이 샐쭉한 반응을 보였다.
쀼루퉁한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여덟 살 황녀에게 필요 이상의 정을 보이는 이성휘의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알고 있다. 겨우 여덟 살 밖에 안 된 꼬맹이를 질투하는 게 얼마나 꼴사나운 일인지.
하지만 마치 친딸처럼 유협을 보살피려는 이성휘의 행동 또한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 자렴 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진류왕과 궁인들의 새것처를 자렴 님께서 비용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흠.”
이성휘에게 간곡한 부탁을 듣게 된 조홍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현재 진류군에 건설되고 있는 가택을 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가택의 토목공사에 천문학적인 재물에 소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람의 간곡한 부탁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들어 줄 수 있었다.
‘토목공사에 든 재물이야 몇 개월 동안 돈을 굴리면 바로 충당할 수 있긴 한데…. 그냥 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였으면 기쁜 마음에 빌려 줬을 것을, 왜 다른 여자를 위해서 나한테 돈을 빌리려는 거야? 진짜 못된 사람이네.’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이성휘가 재물을 부탁한다면,
가산의 절반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성휘가 낙양의 황녀를 위해, 하남윤의 수양딸을 위해 자금을 빌리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간곡하게 부탁하는 이성휘의 행동에 조홍이 질투를 느끼는 건 매우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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